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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진 Dec 29. 2021

3-7.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알아 가는 것만큼 가치 있는 것이 있을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가장 잘하는지,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을 발견하고, 삶을 디자인할 수 있다.      


해야 할 것은 내면으로 들어가 진정한 나를 마주하고, 경험이라는 문을 통과하는 것이다. 가슴이 이끌기 시작할 것이다. 그곳에 이전부터 존재하던 꿈 꾸는 내가 있다.




어려서부터 공부도 별로였고 인간관계도 넓지 않았던 내가 유일하게 인정받은 것은 글쓰기 하나였다. 식목일 글짓기에서 상을 받고 난 후부터는 자주 글짓기상을 받았다. 아이러니했던 것은 상을 받으려고 열심히 글을 써서 제출하면 오히려 상을 받지 못했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글을 써서 제출하면 교단에서 이름이 불렸다.      


언젠가부터 글짓기상을 받아도 기쁘지 않았다. 언니의 우등상과 비교당하는 것 같았다. 공부를 잘하는 언니가 우등상을 받아올 때마다 부모님은 매번 기뻐하셨지만, 글짓기상은 조금 달랐다. 글짓기 상장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상장을 받아도 부모님께 보여주지 않고, 교과서 사이에 접혀 보관하다가 장은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버려졌다.     


고등학교 땐 수업 시간에 끄적거렸던 시 같지도 않은 시를 반 아이들은 돌려가며 자신들의 사연으로 복제해 갔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편지로 되돌아온 적도 있다. 그런데, 그 글을 처음 쓴 ‘지은이’가 나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거나, 뿌듯하거나,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유일하게 나를 인정해 주던 선생님도‘국어 선생님’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서 매우 온화하고, 인품이 좋기로 소문나신 분이었다. 선생님은 가끔 교무실로 불러 백일장, 교내 전시회 등등에 출품할 글을 써오라고 하셨는데, 그런 미션을 받고 나면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몇 차례 선생님께서 써오라고 한 날짜를 어기다가, 나중에는 아예 글을 쓰지 않았다. 한없이 인자해 보이던 선생님은 교무실로 따로 부르지 않고, 어느 수업 시간 아이들 앞에서 나를 세워 두고 무서운 얼굴로 호통을 치셨다.     


“너에게 글을 쓰라고 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시나, 수필, 하나씩 두 편만 써 와! 그리고, 여자애가 교복도 안 다려 입고 뭐 하는 거냐?!”라는 말을 남기고 나가셨다. 선생님이 나가고 난 후, 아이들은 “국어 화내는 거 처음 본다.”라며 놀라워했다. ‘차라리 화를 낼 거면 시키지를 말지, 하필 교복 안 다려 입고 간 날 애들 앞에서 창피를 주나’하는  원망이 들었다. 도대체 욕까지 먹으면서 내가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작품(?)을 써서 제출했다.     

 

이후 그 작품은 졸업하던 날, 매년 졸업생들에게 지급되는 ‘문학 집’에 실려 내 손으로 돌아왔다. 책의 초반에는 그동안 학교에서 보낸 다양한 행사와 일상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두꺼운 책 중반쯤으로 책장을 넘기자 선생님께 제출한 글이 나타났다. 그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제목 옆에 새겨진 내 이름에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몰려와 바로 책장을 덮어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책을 들고 있는 모든 사람을 찾아가 모조리 회수하고 싶었다. 이후 두 번 다시 책의 행방을 찾지 않았다.      


퇴사 결정이 내려지고, 두 달간의 휴식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휴식에도 휴식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좀 더 깊게 이해하고 난 후, 조금 더 휴식하며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을 태권도장으로 보내고 난 뒤, 평소에 못 한 독서도 하고, 유튜브를 보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요즘은 다양한 분야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집필활동도 하고, 책도 출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현듯 삶을 통해 배운 것들이 누군가에는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아 내부에 먼지가 수북할 것 같은 데스크톱을 켜고, 무료 백신을 설치한 다음 바탕화면을 말끔히 정리했다. 이름을 넣어 폴더를 하나 만들었다. 한글을 열어 무작정 글을 써 내려갔다.‘그동안 왜 글을 쓰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갓 서른을 넘기면서, 내가 두 번이나 작가로서 도전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한 번은 드라마 아카데미를 수강하며 3개월도 되지 않아 포기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가로서의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채로 그럴듯한 타이틀이 갖고 싶었다. 수업에 들어간 순간, 지루하기만 할 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담당 교수의 강의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학원비가 아까워서 몇 번 왔다 갔다 하다가 그조차도 가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소설 공모전 소식을 접하고 글을 써 내려갔었다. 시작은 매우 흥미롭고 좋았으나,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소리 없이 사라지는 등 이야기가 막장으로 전개되다 결국 수습이 되지 않은 채 겨우겨우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써서 제출했다. 참가하는 데에만 의의를 두었다.      


작가로서의 꿈은 그렇게 영원히 사라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꿈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내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삶의 무게와 고통 아래에서 떠오르지 못하고 있었을 뿐, 내가 발견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삶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삶이라는 바다에 진심을 싣고, 그냥 나아간다. 진심이 있는 사람에게
진심이 있는 사람이 모이며, 진심은 진실로 큰 힘을 발휘한다. 나는 그저 삶이라는 흐름에 나를 맡기고, 삶을 신뢰하며 살아갈 뿐이다.     


나의 이야기가 글로 표현될 때의 희열은 삶을 글로써 이야기하는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다시 글을 쓰기 전까지 졸업 문학 작품집에 실린 글에서 수치심을 느꼈는지 알지 못했다. 만약 오래전 제출했던 공모전의 글이 손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아마 한 페이지도 읽지 못할 것 같다. 그 안에는‘진심’이 단 한 줄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억지로 써 내려간 글 속에 ‘진심’이 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며칠 동안 나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다 아이와 대형서점으로 나갔다.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살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을 흡입하듯 읽었다. 독자를 향한 작가의 진심과, ‘인간과 삶’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감히 이 책을 펼친 당신이 행운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사람을 살리는 책을 집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진정한 작가의 이름이 부여됨은 물론,
책을 쓰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용기와 확신, 의식적 성장이,
당신의 인생을 보다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책, 읽지 말고 써라》이승용



이미지 출처 Karyme França 님의 사진, 출처: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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