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는다는 것은 얻는다는 것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따뜻한 통영은 눈 내리는 겨울이 수년에 한번 올 정도로 정말이지 귀하다.
그럼에도 이번 겨울에는 세 번의 싸리 눈이 내리긴 해서 통영 온 동네방네가 들썩였다.
지나간 싸리 눈의 자리에는 이른 봄의 기운을 알리는 듯 아득한 주황빛을 품은 겨울 해가 건물들 사이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루의 시간 중 해 질 녘을 가장 좋아한다. 번잡하게 뒤섞인 생각들을 정돈하고 고요함 속에 나를 놓을 수 있는 황혼의 시간, 그 시간에는 어스름한 새벽과는 다른 힘이 있다. 바싹 마른 긴장감, 부단히 애쓰는 마음, 세상의 소음에 절은 고뇌들 모두 노을과 함께 보내며 오늘도 나의 불완전함을 적당히 소멸시킨다.
어떻게 살았니
엊그제였다. 전쟁 같았던 오전 영업과 며칠간 기대하던 (개인적으로 계획 중인) 거래가 성사되지 않아서 온몸에 진이 빠졌다. 짧은 휴식시간 동안은 그 어떤 언어도 듣고 싶지 않아서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연주한 Debussy 앨범을 연속 재생 해놓고 손님이 오기 전까지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행복한 시간도 잠시 금세 배달 주문이 연달아 들어오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짤랑 -
중년의 여성 손님 두 분이 들어와 메뉴판을 둘러본다.
"사장님, 제로페이로 계산할게요~"
바쁘지만 최대한 침착해 보이는 발걸음으로 주방에서 카운터까지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네, 드시고 가세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하고 포스기에 손을 얹으며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테가 없는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가늘고 곱게 늘어진 눈. 단숨에 알아봤다.
초등학교 5학년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혹시나 잘못본건 아닐까 하고 우선 주문을 받고 조리 후 음식을 드리며 다시 손님과 얼굴을 마주 했을 때 나는 그 담임 선생님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혹시 초등학교 선생님이세요?"
용한 점쟁이 보듯이 놀란 손님은 끄덕이며 동행하신 분과 함께 얼어붙은 채 나를 응시했다.
"김 00 선생님 맞으세요?"
"네 맞는데..?"
"아이고 너 제자인가 보다."
나는 모자를 벗어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에 꽂으며 말했다.
"선생님 저 기억나세요? 통영 초등학교 5학년 3반이었던 00이에요."
"세상에! 너구나!"
학창 시절 유독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한 분쯤 있을 것이다. 칼같이 애들을 다그치고 정 없이 한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대부분 연배가 조금 있는 선생님들 중에 유일한 아가씨 선생님에 단아하고 기품이 넘치셨던 분이었다. 그리고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선생님이었다.
유독 음악 수업을 좋아하고 악기를 다루는 재능을 보였던 나는 담임 선생님의 눈에 띄어 선생님이 이끌던 합창단에 소속되고 또 선생님께서 개인적으로 진행하던 소규모 작곡 수업을 듣기도 했었다. 그렇게 나는 학창 시절 여러 명의 음악 멘토(?)들을 만나며 자연스레 음악의 길로 걸어가게 된 것이다. 워낙에 긴 시간이 흘러 만난 지라 나는 자초지종을 최대한 짧게 요약하여 선생님께 설명했다.
"선생님 저 결국 음악 공부해서 미국에서 재즈 피아노 전공하고 왔어요. 유학 다녀와서 서울에서 음악으로 먹고살다가 몸도 마음도 다 망가져서 다시 여기로 좌천됐어요. 하하"
이 말은 들은 선생님은 역시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반응이었다.
"어머나. 그랬구나.. 그 좋은 재능을 너무 아깝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무력감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는가 싶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선생님의 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몇 초의 순간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말아줬으면 하고 불안에 떨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잘못된 선택으로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아 복합적인 생각들에 매몰되어 몇 번이고 무너졌기 때문이다.
내가 더 이상 음악을 고집하지 않은 이유는 뻔하다. 먹고사는 일이 쉽지가 않아서다.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시험해야 하는 예술인으로 살 수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 고통을 감내할 만큼 음악에 대한 마음이 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어릴 적 수술한 고통스러운 척추 통증에서 벗어나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할 돈이 필요했기에. 본가에 돌아와서도 피아노 레슨으로 벌이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저 어중간하게 음악을 잡고 있으면 시답잖은 미련만 남을 것 같았기에 과감히 내려놓았다.
음악이야 내가 어떤 상황이 되었든 악기만 있다면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 아픈 몸과 정신부터 고치는 게 시급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음악에 시간을 투자하며 하지 못했던 것을 이곳에 있는 동안 해보자 라는 마음을 먹고 또 다른 삶을 찾아 나선 것이다.
죽은 영혼
정말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는 일이다. 공직에서 몇 십 년간 근무하고 아름다운 정년퇴직을 맞이한 아빠와 음악에 거창한 꿈을 가졌지만 현실에 좌절하여 허우적거리고 있는 딸이 함께 샐러드 전문점을 차렸다.
코로나와 함께한 서울에서 피아노 강사와 글로벌 행정업무, 샐러드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돈을 벌고 영어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짬내어 공부를 하고 음악 회사에 이력서를 보내며 정체성 없이 살던 나는 막바지에 이르러 비현실감 증상을 느낄만큼 위태로웠다. 매일같이 타던 지하철에서도, 레슨을 하러 가서 학생들을 만나도, 퇴근 후 걷는 거리도 모두 이상했다. 마치 몸뚱이에서 영혼만 분리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먼지처럼 둥둥 떠다니는 유령이 된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영혼이 죽은 상태.
어느 날 부모님은 집안일로 가족회의를 해야 한다며 하룻밤 서울로 올라오겠다고 하셨다. 나는 알바를 마친 후 슬리퍼를 질질 끌며 지하철 역에 도착한 부모님을 마중 나갔다. 시루떡이 된 나를 본 아빠의 첫마디.
"아가 얼굴이 형편이 없노."
(아가 -> 얘가)
통영 토박이인 아빠의 언변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다. 형편이 없다는 말을 얼굴에도 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맞다 그 당시 나는 심각하게 형편이 없었다.
아빠는 정년퇴직 후 실컷 즐기던 백수놀이를 청산하고 다시 경제 활동을 해야겠다며 엄마와 함께 구상하던 사업을 오빠와 내게 상담했지만, 오빠와 나는 썩 좋은 반응을 내보이진 않았다. 밤새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까지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이렇다 할 답은 얻지 못하여 일단 아침을 먹기로 했다. 나는 엄마가 정성스레 쪄온 갈치와 함께 샐러드 가게의 사장 언니가 부모님이랑 같이 먹으라며 포장해 준 샐러드를 아침상에 풀었다.
아빠는 샐러드를 맛보고 잠시 생각에 잠긴듯했다.
"통영에는 아직 이런 가게가 없는데 참 괜찮네"
의외의 반응에서 시작된 창업 이야기에 아빠와 나는 어디 홀린 듯 확신을 가지며 가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하교 후 피아노 연습실에 가기 위해 재빨리 저녁을 만들어 먹고 가고 20살 이후로 7년간 자취하며 재빠르게 밥상 차리기 달인이 된 나는 나름 손재주가 있어서 악기를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요리를 하는 것도 좋아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이따금 본가에서 가족들에게 파스타나 리조토를 만들어 주기도 했는데 "식당 차려도 되겠다"라는 말을 들은 게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절대 음식점 같이 힘든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는데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잃는다는 것은 얻는다는 것
어떤 선택을 하든 득과 실은 따른다. 서울살이를 접는다는 것에 큰 용기가 필요했다. 꿈을 접는 것과 다름없기에 더욱 그랬다. 다 읽지 못한 소중한 책이 찢겨나간 듯 아직 이 이야기의 챕터가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아쉬운 마음에 결단을 내려준 것은 다름 아닌 전화 한 통과 뜨겁게 저물어가던 해였다. 레슨생과 상담을 마치고 나온 나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음악 동료였던 오빠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야. 진짜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다. 음악 아니면 뭐 어때? 진짜 진짜 응원한다."
격려하는 동료 오빠의 말에 울컥해 눈앞이 흐려져 횡단보도 앞에서 몇 번의 신호를 놓치고 서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넘어가는 노을에 미련 섞인 아쉬움을 보내며 이 숨 막히는 생활에 작별을 고했다.
음악인이 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 삶을 살기에 나는 나약했고 음악 말고도 재미난 것들이 더 많아졌고 세상을 향한 질문이 많아졌다. 그리고 자영업을 하는 사장님이 되어서는 어리숙한 나에서 조금 더 성장했다. 본가에 내려오니 돈의 흐름이 안정적으로 변했다. 무엇보다 월세가 안 나간다! 그 돈으로 재활 운동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서 건강도 많이 되찾았다. 어느 일도 쉬운 일은 없다. 주 6일을 일해야 하는 자영업을 선택한 것에 후회도 당연히 있다. 섣부른 선택인 것은 확실하지만, 어쩌겠나 이렇게 또 배운다. 가게에 손님이 많은 날은 앓는 소리를 내고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날엔 우는 날도 더러 있었다. 지난여름엔 수시로 수액을 맞으러 다니며 일했다. 손님이 없는 날에는 나를 위한 시간으로 사용한다. 그간 음악을 하며 피아노에만 열정을 쏟았지만 지금은 내면을 채우는 시간으로 사용한다.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보통 혼자 일하는 시간이 길어서 외로움이 극에 달하는 날들이 많지만 책을 벗 삼아 나를 채운다. 어떤 분야의 책을 읽든 하루하루 필요한 말들은 꼭 담겨 있다. 책에 담긴 말들은 기록하게 만들고 질문하게 만들고 뉘우치게 만들며 앞을 내다보게 만든다. 20살에 집 떠나 세상의 기준에 나를 맞추느라 정작 자기 성찰에 소홀했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다. 자영업 또한 못해먹을 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만, 지금 내가 이곳에 좌천되었다는 말은 더없이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이 선택에는 고독함이 따르지만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또 무언가를 얻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무슨 선택이든 일말의 아쉬움과 후회는 있기 마련이고 잃는다는 것은 실은 그저 잊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거니와 환경이든 가치관이든 무엇이든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들은 영원히 한 곳에 종속될 수 없기에 자의로든 타의로든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순간에서 새로운 것을 얻고 또 잃는 구조로 인생은 흘러간다.
그렇게 잃고 얻은 것들은 수많은 감정, 깨달음과 함께 '추억'이자 '기억'으로 남아 어느 길로든 걸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더욱 성숙하고 더 나은 결단과 함께.
이 귀한 시간들로 인해 어떤 새로운 나로 거듭날지 무척이나 기대 된다.
또 정신 없을 일주일간의 영업을 준비하며 오늘 밤 노트북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