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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보면 필요한 게 보인다

프롤로그

by 아이스블루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물건들이 있다.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물, 불, 음식등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일 것이다.

생활하면서 필요한 것들은 자꾸 생겼고 취향껏 물건을 더하게 됐다.

이제는 어떤 것이 없어도 되는 물건인지 추려내기도 힘들 만큼

소유하는 물건들이 많아졌다.


패션에 관해 1도 모르는 사람의 뇌피셜로도 기본적으로 꼭 갖춰야 하는

패션 아이템은 분명히 있다.

유행과 멋 내기는 차치하고라도 살아가면서 꼭 입고 걸치고 지내야 하는 것들이다.


내게는 '버리는 것 밖에 몰랐던' 대대적인 정리의 칼날 속에서도 살아남은

몇 가지 패션 아이템들이 있다.

이것을 가리켜 생존 아이템이라고 이름 붙였다.

끝까지 생존해 주었고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그런 물건들이다.

특별하지는 않아도 없으면 그립고 그것을 둘러야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것들이다.

옷뿐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만만하게 들 수 있는 나일론 가방,

꾸미기 귀찮은 날 나를 모두 가릴 수 있을 만큼 풍성한 스카프,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당당할 수 있는 우양산도 들어간다.

이런 모든 잡화들이 패션에 소심한 나를 드러내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사회생활이라는 전쟁에 임할 때 나를 도와줄 비밀병기인 캡슐옷장 안에

있는 것들이라면 이미 내 취향에 꼭 맞춘 옷들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 옷이야~"라는 말이 바로 나오게 되는 옷들이 대부분이다.

블랙원피스는 한 벌뿐이니까 그 옷이 필요할 땐 머뭇거리며 고를 필요가 없다.

중청색 스트레이트진도 딱 한 장이니까 그 분위기가 필요할 땐

1초도 걸리지 않고 청바지를 선택할 수 있다.

캡슐옷장을 만들고 나면 옷이 적어서 코디가 빠르다는 이점이 있는 만큼

필요한 조건도 뒤따른다.

코디가 빠르고 편하도록 옷의 개수를 줄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개수가 적은 만큼 최대한 활용해야 하므로 아이템의 퀄리티가 중간이상은 되어야

오랫동안 반복해서 사용해도 형태와 기능에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내구성이 좋은 것으로 골라야 스타일이 살고 옷맵시도 훌륭할 것이라는 말이다.




출처- unsplash





그러니 셔츠 하나를 사더라도 이것을 '반려'로 삼고자 한다면 대충 골라서는 안된다.

브랜드와 소재, 컬러, 디자인 등 모든 면에서 나와 찰떡궁합이 되는

아이템을 고르고 또 골라야 한다.

정말 마음에 들고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면 쉽게 찾아내기 힘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몇 시즌을 떠나보내도록 가을코트 없이 살아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내 인생에서 가을 코트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내 코트"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무조건 비싼 것으로 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비싼 것이 모든 면에서 훌륭하고 마음에 들 수도 있겠지만

체형에 잘 맞고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반드시 비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인 가격으로도 좋은 물건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고 계속 쓸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나는 한번 쓰기로 한 것은 싫증을 내지 않고 잘 쓰는 편이지만

물건에 금세 싫증을 내는 사람이라면 재킷 하나를 평생 쓸 각오로 구입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캡슐옷장을 만들고 옷정리 할 때처럼 평생을 사용할 필수 아이템을 선별하면서

의도치 않게 체형별로 잘 어울리는 바지 스타일이나 티셔츠 핏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었고 나의 스타일을 새롭게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어울리는 스타일이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나를 거울에 비춰보면서 자세히 관찰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옷 입기에서 시행착오를 겪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와서 갑자기 스타일에 변화를 줄 것도 아니고 이변이 없는 한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나와 끝까지 살아갈 것이다.

세탁하고 손질해 가면서 입고 쓰고 신고 들게 되겠지.

유행이 바뀌어도, 더 좋은 신상이 나왔다고 해도 내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아이템이라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이 가장 빛나 보일 것 같다.


나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거울 속 지금의 '나'는 필요한 것을 모두 갖춘 듯이 보였다.


drawing by 아이스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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