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법칙 | 시간을 건너온 어떤 편지를 읽으며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책이나 가사, 영화 등 스토리가 있는 무엇이든 흥미롭게 빠져든다. 그러다 어느 날은 문득 깨달음이 오더라. '잘 짜인 서사라면 도중에 입문해도 맥락을 이해하는 데에 큰 상관이 없더라'는 것. 정주행이 아니어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었다는 것. ㅡ맥락과 구조가 아주 탄탄하다는 전제 하에. 물론 그 설계가 제일 어려운 영역이다.
그래서 정교한 구조 속에서 사소한 에피소드들은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꺼내도 이야기는 전개될 수 있다. 오히려 주요 메시지나 장르에 따라서는 전략적으로 섞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해석이 달라져도 어차피 모든 조각들은 한 이야기로 흐르며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더욱 입체적이고 촘촘히 완성되어 갈 수 있다. 결국 작가조차 생각치 못할만큼 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얻을 수도, 작가가 구상하지 못했던 영역의 해석까지 꺼낼 수 있게 되는 웰메이드 스토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문득 궁금해졌다. 작가가 쓰지 않은, 원작에 없던 조각이 갑자기 추가되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내가 알던 서사의 법칙으론 답이 안 나온다. 쓰여야 할 메시지가 있다면, 우연을 빌어서라도 서사 속 한 문장으로 책갈피를 꽂는 걸까. 하필 그 문장이 독자에게 가장 깊은 울림을 주었다면, 이건 작가도 황당한 노릇이다. 이건 작가에게 거는 운명의 장난인 걸까, 조용히 작가를 사랑하는 운명의 방식인 걸까?
서사의 완성은 작가 홀로 애쓰는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에피소드가 풍성하다 해서, 구조가 좋다 해서, 이야기는 전부 완성되지 않는다. 창작이란 그런 거구나. 자기 작품이라는 애착과 고집에서 벗어나 여지를 남길 줄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우연한 개입을 허용하면, 혼자서는 전혀 구상도 못한 세계로, 놀라운 이야기로 확장된다. 사실, 작가는 꼭 남기고 싶은 문장이 있을 땐 어떻게든 행간의 틈을 파고들어 흔적을 남기거든. 이조차 삶이라면, 이야기를 사랑한 덕분에 나는 삶이라는 서사의 법칙을 배우고 있다.
‘작품을 남기는 이유가 자신을 남기고 싶어서’라고 했던 어느 예술가의 코멘트를 감히 공감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작품의 작가는 누구일까. 아니 쓰고 있는 내 작품의 작가는 과연 나일까? 나는 지금 누구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일까. 내 삶의 작가는 나 홀로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이 삶은 시간 순으로 흐르는 줄만 알았는데, 어쩌면 이 서사의 정답은 둘 다 아닐지도 모르겠다. 작지만 큰 확신이다.
지워지지 않는 나와 당신의 얼룩이 이렇게 내 글의 이야기가 되고 마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