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에서본시인 Nov 13. 2024

식탁 위에 놓인 오이샐러드

어색한 식탁 위에 놓인 낯선 대화

간만의 팀원들 간 공식적인 회식자리가 마련되어 점심을 먹게 되었다. 열댓 명 되는 대인원 탓에 넓게 둘러앉은 식탁 위로 공통된 화젯거리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나는 애써 처음 방문한 식당 인테리어만 구석구석 눈으로 좇아보았다. 마주 앉은 직원과 눈이 마주치지 않는 배려 어린 시선으로 천장, 창문으로 이어지는 높고 밝은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애써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비즈니스적인 태도를 끊임없이 유지하는 어색함. 이처럼 평소에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공간에서 어색한 관계들 가운데 공식적인 식사자리는 업무의 연장선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누군가 공허한 공백을 메우려는 듯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좋을 법한 공통된 주제로 대화의 물꼬를 트려고 시도했다. (얼마나 무의미한 주제였던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던져진 대화는 실을 이어나가는 뜨개질처럼 살포시 누군가에게 이어지거나 흐느적거리며 동시에 흔적도 없이 순간적으로 사라지기도 하며 애써 무덤덤한 분위기를 엮어내려는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애매한 팀원들 간의 분위기를 읽어내듯 직원이 접시를 들고 서빙을 시작한다. 이윽고 제공된 첫 번째 메뉴에 갈 곳을 잃었던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일순간에 하나로 모인다. 이제 눈앞의 시각적인 주제가 명확하니 불완전해 보이는 부차적인 이야깃거리는 그 목적성을 잃었다. 

직원이 단정하게 내려놓은 오이샐러드 한 접시. 

야채가 적당히 섞여있었지만 열댓 명의 식사로는 충분히 불충분해 보이는 작은 접시 사이로 포크를 헤집는다. 개인접시로 옮겨 담은 샐러드를 맛있게 먹으며 누군가 오이가 아삭이면서 상큼하다며 칭찬을 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대화의 바통을 이어받아 신선한 야채가 맛있다며 호응을 했다. 그 옆의 누군가는 이런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이해가 안 된다며 오이를 먹지 않는 사람을 끌어들였다. (다행히 그 자리에 오이를 먹지 않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있었다고 해도 아무도 아삭한 오이에 반기를 들며 대화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기에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이에 반응하듯 오이를 싫어하는 이유는 소수의 사람들이 가진 유달리 뛰어난 감각 탓에 오이향을 강하게 느낀다는 말도 누군가 첨언했다. (미국 유타대 유전과학센터에서는 ‘TAS2 R38(taste 2 receptor member 38)’라는 유전자를 예로 들어 입맛을 결정하는 데에 특정 유전자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혀냈는데, 인간의 7번 염색체에 존재하는 ‘TAS2 R38’은 쓴맛에 민감한 PAV 타입과 둔감한 AVI 타입이 존재한다고 한다. PAV 타입은 AVI에 비해 쓴맛을 100~1000배 더 민감하게 느낀다고 하여 실질적으로 미각의 차이가 특정 음식에 대한 기호의 차이를 드러냄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아삭한 오이에 대한 의견에 누구 하나 토를 달지 않았다. 오이는 잠시동안에 그렇게 회식자리에 참석한 제3의 게스트가 되었다가 그 다음에 나온 요리에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강한 오이향에 거북함을 느껴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을 생각했다. 아마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오이를 평범하게 마주하는 사람에게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이해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오이를 당연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전제 자체가 오이를 거부하는 몸의 반응이 없다. 때문에 가능성을 최대한 열어본다 해도 오이를 싫어할 수 있다는 경우의 수를 떠올릴 수 있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이를 먹을 수 있다는 본인의 배경 속에서 성립 가능한 상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이를 싫어한다는 사람은 기본 생각 자체가 오이는 먹을 수 없는 대상으로 인식되어, 그것을 먹을 수 있다와 먹을 수 없다는 전혀 다른 선택사항처럼 보일 것이다. 오이를 먹지 않는다는 점은 개인 취향을 떠나서 몸이 거부하는 반응 탓에 마치 타인에게는 기호처럼 보이는 선택사항처럼 여겨져 특정 음식을 기피한다는 결과만으로 상대를 유달리 예민하거나 신경이 곤두선 성격으로 평가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아량을 전제로 친절을 베푸는 듯 하지만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괜한 강요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타인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사자성어로 남겨서 후대에 전해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어렵고 험난한 마음가짐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작은 집단에 속해있으면서도 아직도 겉도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그들은 익숙한 분위기 탓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세세한 상황들이 나에게는 100배 혹은 1000배로 다가온다는 점을 그들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접시의 오이샐러드도 그러한데, 과연 나는 타인에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낯선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를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나의 희망에 지나치지 않을까.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단어들이 문장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바탕이 되었지만, 너무 오래되고 익숙한 발판이 되어 너저분하게 먼지 쌓여 있어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빛바랜 유물이 되었다면 현실로 끌어내지 않은 희박한 그을음에 그 존재는 무슨 의미를 갖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메뉴들로 가득 찬 접시로 풍성한 식탁을 이루었다. 첫 번째로 제공된 오이 샐러드는 그 초반의 관심은 온데 간대 없이 한 귀퉁이로 밀려나 소박한 존재감을 유지할 뿐이었다. 오이를 싫어한다는 것. 나도 알 수 없던 그 희미한 감각에 대한 타인의 취향에 조금은 귀를 기울여야 나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희망을 품지 않을까 입안의 질겅이는 오이 조각을 헤집으며 곰곰이 되새김질 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선택적으로 차단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