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

by 꿈에서본시인

휴대폰을 새로 샀다. 올해 들어 지출한 비용 중 가장 큰 금액이었다. 생각보다 큰돈을 갑자기 쓰고 나면, 마음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단순히 기계를 바꾼 일인데도 스스로에게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정말 이게 지금 필요한 소비였을까.’, ‘기존의 기기와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길래.’ 머릿속은 복잡해졌고, 숫자가 높아질수록 합당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함께 따라왔다. 사람은 어쩌면 금액의 크기만큼 의미를 부여하려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휴대폰 교체를 미뤄온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나름 오래된 기기를 끝까지 관리하며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묘한 자부심, 그리고 불편함마저 익숙함으로 둔갑시킨 생활의 감각이었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하고, 새 모델의 출시 주기는 짧아졌다. 사람들은 신제품을 기다리는 대신 이전 모델을 잊어버렸고, 나만 낡은 유물을 손에 쥔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불편하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한 건 아니었다.

용량은 32GB에 불과했지만, 그 덕분에 사진을 함부로 찍지 않았다. 기록할 만한 순간만 선별했고, 불필요한 앱은 주저 없이 삭제했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플레이리스트를 품을 수 없다는 제약이 오히려 나를 덜 산만하게 만들었다. 화면은 작았고, 카메라의 접사는 불가능했으며, 스피커는 한쪽에서만 울렸다. 그럼에도 통화와 문자,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여전히 충실했다. 오래된 기계와의 관계란, 마치 낡은 수첩에 계속 메모를 남기는 행위와 비슷했다. 손때 묻은 구석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불편함이 ‘익숙함’이라는 이름으로 방치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기가 느려져도, 배터리가 급격히 닳아도, 반응이 둔해도 그저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내 안의 기준점이 희미해진 탓이었다. 그리고 그 무감각함이 결국 나를 설득해 버렸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새 휴대폰을 받아 들던 날, 묘한 불안감이 함께 따라왔다. 반짝거리는 외관과 빠른 반응 속도, 선명한 화면은 분명 놀라웠지만 동시에 낯설었다. 새로운 물건을 손에 쥐는 기쁨보다 ‘이제 다시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이 더 크게 다가왔다. 세련된 기기 앞에서 내가 한없이 구식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설정을 마치고 사용 과정 중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소프트웨어가 불안정해 카메라 앱이 작동하지 않거나 갑자기 튕겨나갔고, 기기 자체가 멈춰버리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해당 문제가 몇몇의 사용자에게서도 발견되는 듯 사람들은 임시방편으로 ‘물리적 강제 셧다운’을 공유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껐다 켜며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새 기기를 손에 쥐고 그런 조언을 듣는 일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결국 나는 오전에 구매한 기기를 고스란히 들고 오후에 매장으로 다시 찾아갔다.


“고객님, 저희와 불편을 함께 하셔야 합니다.”

직원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그 문장 속에는 이상한 냉기가 흘렀다. 불편을 ‘함께 한다’는 말은, 사실상 혼자 감수하라는 의미였다. 기기의 문제는 이미 알고 있는 현상이라며 ‘강제 종료’를 임시 조치로 제시했다. 해결책이라기보다 시간 끌기에 가까웠다.

그들은 덧붙였다.
“한국은 원래 1차 출시국이 아니었다가 최근부터 포함된 거라서요. 안정화가 덜 된 상태에서 판매를 시작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언제나 책임의 자리를 비워둔다. 그 자리를 메꾸는 것은 늘 소비자의 몫이었다.

응대하는 직원 세 명은 마치 스크립트를 공유하듯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들 중 한 명은 외국인이었는데, 어눌한 한국어로 ‘업데이트, 카메라, 시스템 오류’를 되풀이했다. 단어의 배열만 다를 뿐 문장은 한 치의 틈도 없이 같았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대화의 목적은 ‘이해’가 아니라 ‘절차의 완료’였으니까.

어쩌면 이 장면은 작은 세계의 축소판이었다. 문제를 인지하면서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각자의 영역 안에서만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 ‘불편함을 함께 한다’는 말은 상호의 약속이 아니라, 시스템의 회피를 미화한 표현이었다.

나는 문득, 오래된 휴대폰을 쓰던 시절이 떠올랐다. 버벅거리고 느렸지만, 최소한 나와의 관계는 분명했다. 문제의 원인을 알 수 있었고, 해결의 범위도 내 손안에 있었다. 지금의 기기는 너무 복잡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데이터와 정책, 서비스와 업데이트가 뒤엉켜 있었다. ‘사용자’라는 말은 점점 추상적인 단어가 되어가고 있었다.


“소프트웨어 안정화가 곧 진행될 예정입니다.”
“지금은 임시로 강제 셧다운을 반복해주셔야 합니다.”


그들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옳은 말이 옳게 들리지 않았다. 원인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책임을 지우는 태도. 핵심을 피하면서도 정당한 어투로 포장된 언어는, 마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처럼 보였다. 원인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책임을 지우는 태도. 핵무기를 만든 이가 평화를 말하는 것처럼 어딘가 모순적이었다.

나는 그날 매장을 나서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해받지 못하는 불편함이란, 어쩌면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의 리듬’과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아무렇지 않은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이 된다. 불편함의 기준은 언제나 다르고, 그것을 설명해도 상대는 좀처럼 공감하지 못한다. 세상은 빠른 쪽에 맞춰 설계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불편함이란 단순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속도’가 묻어 있는 흔적이라는 것을. 빠른 세상 속에서 뒤처지는 나의 속도는 실패가 아니라 성향일지도 모른다. 그 느림 속에서만 비로소 나는 생각하고, 낯선 감정을 오래 바라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새 휴대폰의 화면은 눈이 시릴 정도로 밝았다. 전면 카메라에 비친 내 얼굴이 어색했다. 마치 낯선 조명 아래 놓인 피사체처럼, 나는 잠시 멈춰 섰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내 손에서 바뀌어왔을까. 음악의 방식, 사진의 저장, 대화의 주고받음, 그리고 관계의 속도까지. 나는 잠시 화면을 꺼두었다. 다시 들려오는 건 도시의 소음과 버스 안의 사람들 목소리, 어딘가에서 울리는 알림음이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화면 속에서 무언가를 넘기고 있었다. 나만의 불편함을 잠시 내려놓고, 그 익숙한 불빛들을 바라봤다.

새 휴대폰은 손안에 있지만, 손안에 들어오지 않는 감정이 있었다. 기술은 점점 작아지고 가벼워지지만, 마음은 반대로 복잡해진다. 오래된 기기를 버리며 나는 편리함을 얻었지만, 동시에 나를 둘러싼 세계의 속도를 인정해야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자주 생각한다. 진짜 불편함이란 무엇일까. 느린 기기일까, 아니면 느린 나일까. 아마도 그것은,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못하는 자신을 조용히 끌어안는 일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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