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다쳤다. 여행지였다. 오랜만에 떠난 해외라 마음이 들떠 있었고, 들뜸은 늘 그렇듯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헤프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자신감을 얹어주는 묘한 들뜸 말이다. 바다를 보러 갔고, 수평선이 손바닥만큼 더 가까이 다가와 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앞선 사람을 휙 뛰어넘어 바위 언덕 아래로 몸을 기울였다. 그 순간이었다. 발목이 바스러지는 듯한, 뿌직— 하고도 이상하게 찢어진 듯한,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들린 게 맞는데, 나는 곧바로 안 들린 척했다. 사람은 참 우습다. ‘안 들렸다’고 생각하면 사고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덮어둘 수 있을 거라 믿으니까. 나도 그랬다. 들려버린 것을 애써 귀에서 지워버리면, 고통도 현실도 따라 지워지리라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귀찮을 정도로 성실하게, 통증은 자신의 존재를 입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은근한 불편함은 뚜렷한 고통으로 올라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목 깊숙한 부분에서 무언가 휘청거리고 미끄러지고, 안쪽에서 한 번 더 꺾이는 것 같은 음산한 기분이 따라붙었다. 그래도 나는 애써 무마했다. “일시적이겠지.” “걷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여행이라는 들뜸은 자기부정의 힘을 키운다. 이미 비행기 표를 끊었고, 이미 수평선까지 왔고, 이미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야 하는 날이 정해져 있는 여행에서는 고통도 일정 안에 맞춰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몸이라는 건 일정표를 보지 않는다. 귀국하고서도 그 고집스러운 고통은 한 달 내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걷는다는 것은 평생을 쉬지 않고 해온 일이다. 너무 당연해서 고마움을 느껴본 적도, 특별히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일. 그런 걷기가 이렇게나 버거운 동작이었다니. 집 앞 편의점까지 십 분이면 될 길을 삼십 분에 걸쳐 절뚝이며 움직여야 한다는 건, 예상치 못한 난이도의 미션을 부여받은 것처럼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계단은 악몽이 되었다. 단 한 칸을 내려갈 때마다 발목이 쿡쿡 찔러왔다. 작은 문턱도 산처럼 느껴졌다. 평소 아무렇지도 않던 일상의 지형이 새로운 방식으로 나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부터, 평소의 하루가 너무 그리웠다. 그냥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자연스럽게 걷고, 자연스럽게 이동해서 자연스럽게 집으로 돌아오는 그 일련의 동작들이 얼마나 잃어서는 안 되는 귀한 능력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다리가 다쳤다는 사실보다 더 아프게 느껴진 건, 그 단순함이 나에게서 멀어졌다는 감각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늘 무언가를 잃어버린 후에야 뒤늦게 그 가치를 떠올린다. 잃기 전에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만, 실은 알고 있어도 모른 척 사는 것뿐이다. 불편함이 생기기 전까지는 편안함을 경시한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있는 것’을 잘 보지 못한다. 몸이 가르치는 삶의 방식은 늘 이런 식이다. 스스로 굳게 믿고 있던 ‘당연함’을 잠시 빼앗아 현실을 톡 건드리며 말한다. “이게 얼마나 귀했는지, 이제 알겠지?”
통증은 매일 묵묵히 내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어떻게 살아왔지?’ ‘너는 네 하루의 어떤 부분을 진심으로 소중히 여겼지?’ 젊을 때는 고장 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몸을 쓴다. 조금 뻐근하면 쉬면 되고, 피곤하면 잠자면 되고, 아프면 약 먹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은 작은 파열 하나에도 삶 전체의 구조를 흔들어놓는다. 걷지 못하는 동안 나는 비로소 내가 얼마나 걷는 사람인지 깨달았다. 내가 살던 삶은 사실 ‘걷는 삶’이었다. 이동의 편의, 빠른 걸음, 무심한 발걸음, 급하게 뛰어가는 직장 속도… 모든 것이 두 다리가 매일 쉬지 않고 나를 도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부엌까지 걸어가는 단 10초의 움직임마저 귀해졌다. 마트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그 평범한 장면조차도, 계절을 확인하듯 골목을 건너는 그 짧은 순간도. 일상 속 모든 풍경이 새삼스럽게 다시 빛났다. 내가 걷지 못하는 동안에도 세상은 그대로 걷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휙휙 지나가고,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찢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무심하게, 얼마나 성급하게 움직이며 살았는지를 그들이 지나가는 속도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삶은 어느 순간마다 우리에게 잠깐씩 의도적인 ‘멈춤’을 선물하는 게 아닐까 하고. 우리는 늘 더 빠르게 가려고 한다. 잠시라도 멈추면 뒤처질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몸은 우리를 붙잡아 자리에서 쓰러뜨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아주 작은 고장 하나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지 알려준다. 고통은 불친절하지만, 깨달음만큼은 정확하다.
절뚝이며 다니는 한 달 동안 나는 이상하게도 삶이 조금 더 고요해지는 경험을 했다. 서둘러 움직일 수 없으니 더 천천히 보게 됐고, 천천히 보는 동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대충 스쳐 지나가고 있었는지 알게 됐다. 누군가의 걷는 속도, 땅 위의 작은 돌멩이, 골목 끝에서 반쯤 열린 가게 문, 바람이 흔드는 가로수 잎의 결, 그런 모든 것들이 발목의 고통과 함께 시야에 들어왔다. 크게 아프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풍경들이었다.
우리는 흔히 “아프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아플 권리’도 우리에게 있는 것 같다. 삶이 가르치는 방식들 가운데 어떤 것은 아픔을 통과해야만 보이니까. 물론 아픔 자체가 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아픔이 가르치는 순간은 종종 값지다. 나는 그 한 달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위로를 걷기라는 행위에게서 받고 있었는지 알게 됐다. 걷는다는 것은 길을 이동하는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나를 나로 유지시키는 기본적인 리듬이었다는 것도.
통증이 완전히 가라앉은 어느 날,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시 ‘보통의 걸음’을 해보았다. 익숙한 속도로 걸을 수 있게 된 순간, 묘하게 코끝이 찡해졌다. 그저 평범하게 걷는 것이 이렇게 큰 선물이었구나. 우리는 매일 선물을 받고 있는데도 그걸 선물로 보지 않는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고 나서야 비로소 그게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렇게 생각하니, 평소의 하루는 정말이지 기적 같은 하루였다. 아무렇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감사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내가 다시 걷게 된 뒤에도, 나는 그 한 달을 생각한다. 다리가 나아버리면 고마움을 금세 잊을까 봐, 다시 그 무심함 속으로 돌아갈까 봐 조금은 걱정된다. 그러나 인간이란 잊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잊어야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마음속에 작은 다짐을 남겨두었다. 다시 걷게 되었으니, 가끔은 일부러 멈춰 서겠다고. 다시 평범해졌으니, 평범함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다고. 오늘의 걸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걸음일지라도, 그 뒤에 숨은 수많은 감각들을 잊지 않겠다고.
아직도 나는 걷는다. 하지만 그 걷기에는 예전과 다른 뜻이 조금 더 얹혀 있다. 발목이 크게 꺾여버렸던 그날의 순간, 그리고 절뚝이며 지나간 그 한 달이 내 걷기에 겹겹이 스며 있다. 그래서 지금의 걸음은 조금 더 고요하고, 조금 더 단단하며, 조금 더 따뜻하다. 보통의 하루는 사실 결코 보통이 아니다. 몸이 멀쩡히 작동해 주고, 나를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는 그 단순한 과정은 기적처럼 정교한 소리 없는 축복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몸이 잠시 내게서 이탈했던 그날에, 그 고통의 구간에서, 나는 감사라는 감정을 다시 배웠다.
부서진 하루의 자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다. 잃었다가 되찾았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사라져야만 볼 수 있는 감정들, 천천히 기울어가는 하루의 풍경들. 내가 다시 온전히 걷게 된 지금은, 마치 다시 살아나는 감각을 부여받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오늘도 걸을 수 있어서 고맙다고. 오늘이 또다시 보통의 하루로 흘러갈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그냥 걸을 수 있다는 이 평범함이, 정말로 기적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