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말은 무척 유명한 문장이다. 그리고 이것이 유명한 이유는 이 말에 따르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배고픈 대중들을 이긴 논리는 없다. (개인과 개인이 아닌 대중들에 있어서) 늘 급하고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생존의 문제는 가장 우선시되어야만 하는 사회 문제이고 개인의 문제가 된다. 사실 모든 철학적 문제는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인간이 부딪치게 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누군가는 육체적 배고픔, 생존의 문제에서 벗어나 무언가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쫓아가기도 하는데 누군가는 한 마리의 물고기를 얻기 위해 다른 갈매기들과의 뱄고 빼앗기는 경쟁의 삶을 멈추지 못한다.
무엇이 더 좋은가는 각자의 생각과 목표에 따라 다르겠지만 먹고사는 것 말고도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다만 급하게 여겨지는 것, 빨리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에 늘 밀려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 더 높은 수준에 이르는 것이야 말로 급하게 여겨지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열쇠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늘 내일 무엇을 먹어야 할지 무엇을 입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다음을 기약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다음 단계를 애써 외면하고자 하기도 한다. 그저 현재 닥친 급한 일들, 자신의 생존과 가족들의 문제, 생존의 방법, 건강에 대한 걱정 등에 늘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완전히 지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당장 내일 배가 고플 것이 두렵고 누군가 다치게 될까 봐 두렵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부스러기에 집착하면서 그것마저 빼앗기게 될까 봐 불안해한다. 그래서 어쩌면 배부른 돼지들을 경멸한다 하면서도 사실 마음 저쪽에서는 돼지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숨어 있는 경우도 많다. 내가 부러운 것은 그들이 먹고 마시는, 걸치는 것들이 아니다. 그들의 배부름으로 인해 나오는, 겉으로 보이는 여유에서 오는 자유이다.
부끄럽지만 난 배부른 돼지가 부럽다. 소크라테스는 너무나 멀리 있고 풍요로운 돼지는 바로 곁에 있다. 이 세상이 더 나아지고 높은 수준으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노력하지 않고 배고픔에 고민하며 삶의 찌꺼기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상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더 높은 가치를 위해 희생해야만 하는 것들에 자신의 몫을 내놓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돼지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가치 있는 것에 매달리는 그들은 어쩌면 사회 악으로 비칠 수도 있다. 진짜로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착각임을 아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이웃들은 그를 눈앞에서 없애야만 자신들이 돼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그를 제거하기로 암묵적 합의에 이르게 된다는 점이다.
차라리 자신이 돼지인 것을 인정하면 누군가를 제거할 필요가 없다. 부끄러움은 오롯이 내 몫인 것이다. 세상을 바꿀 만큼의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있는 나이지만 부끄러움만큼은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 돼지에 불과한, 사실상 배부른 돼지도 되지 못하는 굶주림에 지친 돼지이지만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앞으로 나아갈 날이 있을 것이란 착각을 하고 있지만 현재 배부른 돼지를 동경하는 부끄러운 돼지이다.
"나는 자신에 대한 변론을 행하는 동안에도 위험을 피할 요량으로 자유민에게 합당하지 못한 짓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런 식으로 변론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슨 짓이든지 해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변론하다가 죽는 쪽을 택한 것이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법정에서든 전쟁터에서든 나를 비롯한 어느 누구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일념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
- 소크라테스
여전히 생존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기고 있는 것이 스스로를 돼지로 만드는 것, 부끄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