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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문정 Jul 19. 2024

프랑스 두 작가와 침묵의 성녀

평범한 소녀들은 훗날 각자의 길에서 등불처럼 희망으로 세상을 밝혀주었다!

[대문 사진]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중세 고딕양식 석회암 (1163년-1345년) 정면 중앙 장미창 스테인드글라스, 가운데는 첨탑, 위쪽 두 개 종탑 중 오른쪽은 15톤 엠마누엘 종이 있던 남쪽 종탑, 왼쪽은 25개의 전자종이 울리던 북쪽 종탑, 아래 세 개의 문(좌측부터), 성모마리아의 문, 최후 심판의 문, 성녀 안나의 문! 석회암과 하늘빛 절미하다. 그때 내가 노트르담 대성당을 찾은 날,  두눈과 마음, 진에 담긴  마저 조화로웠다.



2024년 빠리 올림픽 개막식이 26일에 있을 예정이라 18일부터 26일까지 지하철과 거리 곳곳 그리고 주요 광장 등을 통제합니다. 많은 국가 선수들이 참가하고 열광하는 세계인들 축제가 열리니까 당연한 것이겠지요!  


현대적 에너지가 모여 분출되는 빠리에는 중세와 근대 역사적 건축물과 사람들 이야기가 입체적인 그림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아울러 말로는 설명할 수 조차 없는 초자연적인 일들이 일어나기에 분명 다른 도시와 차별화되고, 복합적인 의미가 스민 독특한 공간입니다.



이 글은 <감동 가득한 사람이야기>에 실은 글입니다.


저술가 플로라 트리스탕 /

소설가 조르쥬 상드 /

생뜨 카뜨린느 라부레(성녀)



플로라 트리스탕(Flora TRISTAN)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프랑스 최초 여성 노동운동가이며 저술가  플로라 트리스탕



몇 해 전 파리 인근 몽트뢰이에 있는 프랑스 노동 총 연맹(CGT, 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한국 대표단과 프랑스 책임자가 한 시간가량 간담회를 하면서 프랑스 최저임금제라든가 프랑스 노동조합 현황 등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당시 나는 통역 역할로 배석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홍보담당이 친절하게 건물 내부 안내와 전체적인 브리핑을 하고 난 후에 잠시 여유가 생겼다. 내가 홍보담당자에게 혹시 플로라 트리스탕에 대해 아느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가 누구지요?”라고 반문했다.


그렇다. 플로라 트리스탕(1803-1844), 그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의 외할머니란 사실을 아는 이는 더더욱 없다.


그녀의 삶은 결코 행복하거나 평화롭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고되고 힘든 나날이었다. 그럼에도 19세기 척박한 노동현장에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 권리와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려고 혼신을 다 하며 여러 권의 책을 펴 냈다.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의 외할머니인 플로라 트리스탕


페루 인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플로라 트리스탄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파리에서 무척 곤궁하게 살았다. 그즈음 작은 인쇄소 사장 샤잘이 열일곱 살 밖에 안 된 플로라에게 청혼했고, 딱히 경제적 돌파구가 없었던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샤잘은 그럭저럭 일은 했지만 늘 알코올에 절어 지냈으며 난폭한 사람이었다. 사랑 없이 결혼한 데다 술주정뱅이 남편으로부터 극심한 폭력에 시달리던 플로라는 집을 떠날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세 아이 때문에 고민하고 망설였다.


1820년대 시대적 분위기는 지금과 같지 않아서 이혼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고 샤잘은 플로라에게 가학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그녀에게 강하게 집착했기 때문에 그녀가 남편 몰래 집을 나가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어둔 절망이 배어 있는 집을 탈출했다.


샤잘은 자신을 떠난 플로라를 증오하며,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모성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그는 끈질기게 플로라 행방을 추적하며 괴롭히고 그녀에게 총을 쏴서 부상을 입혔다. 그리고는 외려 플로라를 프랑스 법원에 고소했다.


그는 그녀를 남편과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가출한 몹쓸 여자, 딸을 강제로 납치한 파렴치범으로 몰아갔다. 가정 파탄의 원인이 샤잘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법원은 샤잘에게 손을 들어줘 플로라가 아이들을 만나거나 키울 수 없게끔 판결했다.


그런 개인적인 고난과 역경이 있었지만 플로라 트리스탄은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과 적은 임금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프랑스 전역의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이라는 개념을 인식시키려 고군분투했다.


그녀가 태어난 1803년부터 그녀가 활동하던 때 프랑스 정치 사회는 전반적으로 혼란하고 암울했던 시기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면서 4년 동안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해 왕족, 귀족, 왕당파와 혁명 위원회 사람들까지도 단두대 기요틴에서 처형당했다.


그런 공포의 도가니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유럽동맹군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재정은 물론 기강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지 오래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유럽 동맹군을 제압하며 승승장구한 후에 1804년 12월 2일 빠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하면서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는 제1제정을 맞는다. 국가의 위상은 높아갔지만 상대적으로 전쟁이 이어지면서 백성들(국민들) 특히 서민들의 생활은 곤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폴레옹 제정이 무너지고, 루이 18세, 샤를르 10세에 이르러서 정치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플로라 트리스탕이 집중적으로 활동했던 1830년부터 1844년까지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오를레앙계의 루이 필립이 1830년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왕정시대였다.


그는 18년간 통치하면서 훼손된 수많은 문화재를 복원하긴 했다. 특히 혁명 때 분노에 찬 혁명군들이 엄청나게 훼손한 노트르담 대성당건축가 비올레 드 뒥으로 하여금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럼에도 왕족과 귀족 부르주아를 제외한 일반 사람들 생활은 헐벗고 궁핍했고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제정과 왕정시대에 살던 플로라 트리스탕이 ‘노동조합’이란 것을 인지하고 그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단체를 만들어 서로 돕고 정보를 교환하며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노동자가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위대하다.


프랑스 대혁명을 거쳤다지만 아직 인권이나 노동자들의 권익 등은 존재하지 않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플로라 트리스탕은 몸을 사리지 않고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오랜 세월 동안 노예처럼 굳어 있는 현장 노동자들의 인식부터 바꾸려 노력했다.


플로라는 최악의 조건에서 프랑스 전역을 돌며 자신을 비난하고 빈정거리는 부르주아나 공장 주인들은 물론 “약한 여자 주제에! 여자가 뭘 하겠다고!”라는 선입견을 갖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냉대하며 다가오지 않는 노동자들의 억센 손을 잡고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결국 남편이 쏜 총탄에 맞은 상처를 제대로 치료도 못하고 강연하던 플로라 트리스탕은 영양실조와 과로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장티푸스에 감염돼 마흔네 살에 지난한 삶을 접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변화시켰다.





조르쥬 상드(George SANDE)


여성에게도 자유와 권리를!

조르쥬 상드


조르쥬 상드(1804-1876),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 중에는 그녀가 쓴 작품 제목은 몰라도 그녀가 사랑한 연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쇼팽을 기억할 만큼 쇼팽과의 사랑은 유명하다.


많은 연인들 중에서 그녀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고 그리워했을까? 죽는 순간에 떠오른 이름은 누구였을까? 이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것일 수도 있다. 왜냐면 그녀가 사랑한 순간만큼은 누가 제일이랄 것도 없이 모두를 열정적으로 사랑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로 프랑스 파리 국립유공자 묘지인 팡테옹에 묻힌 작가다. 그렇듯이 그녀를 위대하게 만든 건 그녀가 쓴 작품이었다. 19세기까지도 여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글 쓰는 일이 금기 시 되던 시대였다.


조르쥬 상드는 남장을 하고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해서 보란 듯이 성공을 거둔 것은 물론, 어느 누구도 여자가 쓴 글이라고 폄하하고 무시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답답하기 짝이 없는 관습을 시원스레 걷어버린 여인이 조르쥬 상드였다.


그녀는 플로라 트리스탄보다 1년 늦은 1804년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 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하던 때다.


어린 시절 그녀 이름은 오로르 뒤팽으로 아버지 모리스 뒤팽이 사고로 죽자 할머니가 사는 노르망디 지방의 노앙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열네 살부터 열여섯 되던 1820년까지는 프랑스 귀족 가문 딸들이 그렇듯이 파리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녀는 1822년 만 열여덟 살에 카지미르 뒤 드방 남작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노앙에서 머물며 이듬해 맏아들 모리스를, 1828년에는 딸 솔랑쥬를 낳았다. 다행히 그녀에겐 할머니 유산으로 받은 땅과 집이 있어 경제적인 여건이 뒷받침되었으며, 그녀의 미모와 독특한 매력도 거친 상황을 이겨내는데 한몫했다.


조르쥬 상드는 여러 연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곤 했는데, 결정적으로 1830년에 작가 쥘 상도를 만나 함께 파리로 가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여자가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녀는 쥘 상도와 공동 집필했고 작가로서의 이름이 필요했던 그녀는 조르쥬 상드라는 필명으로 <앵디아나>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로 그녀는 거침없이 작품을 썼고 발표했다.


19세기 중엽 보수적인 프랑스 사회에서 그녀는 당당하게 여성이 아닌 사람으로서 편파적인 시대적 편견에 맞서 활동했다. 그녀 작품은 늘 어렵고 힘든 상황에 놓인 여주인공이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설정이다. 그런 시련과 고통 속에서 자아를 찾고 일시적인 사랑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감으로 인간성을 찾자는 주제를 다루었다.


1800년대를 살던 여성들과는 다른 인식으로 자아와 능력을 찾았던 사람, 남성이 세계를 주도하고, ‘여성은 단지 남성에게 종속된 역할만을 할 뿐’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던 사회에 여성의 존재를 부각하는데 공헌했다.


비평가들이나 동시대 작가들 중에는 그녀 능력을 폄훼하기 위해서 그녀 사랑을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했지만, 그녀 사랑은 21세기에는 하등의 문제 될 것이 없는 자유로운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풍요롭게 지내며 많은 작가들과 교류했던 그녀는 1876년 노앙에서 긴 여정을 마무리했다.




카타리나 라부레 성녀(Sainte Catherine LABOURE)


침묵하며 사랑을 실천한 성녀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


프랑스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카타리나 라부레(1806-1876)를 성녀라 부른다. 앞서 이야기한 플로라 트리스탕(1803)과 조르쥬 상드(1804)는 파리에서, 카타리나는 1806년 5월 부르고뉴 지방의 휑 레 무티에르 농가에서 10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카타리나 라부레 성녀를 비롯하여 플로라 트리스탄과 조르쥬 상드가 살던 시기는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혁명에 이어 나폴레옹이 황제로 집권한 후 유럽동맹군과 전쟁을 하고, 또다시 왕정복고와 혁명 등으로 프랑스 농민과 일반인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그런 힘든 상황이었으나 카타리나는 평화로운 농가에서 자상한 부모님과 형제자매와 함께 행복하고 단란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녀가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3년 후에는 언니가 파리에 있는 빈체시오 아 바로로 성인이 창설한 <사랑의 딸> 수녀회에 입회하면서 어린 그녀 생활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언니가 파리로 가고 나서는 카타리나가 그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린 카타리나는 가족의 식사 준비는 물론이고 오빠들과 동생들의 빨래와 바느질, 집안에서 기르는 가축들 먹이 주는 일 등을 도와야만 해서 학교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온화한 성품을 지닌 카타리나는 불평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해냈다.


스무 살 되던 해, 그녀는 고향을 떠나 파리로 가서 잠시 식당에서 일했다. 그때 카타리나는 척박한 환경에서 적은 임금을 받고 고된 일을 하는 도시 노동자들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열 살 전후된 아이들이 하루 열 시간 넘게 일하는 것을 목격했다. 더구나 일거리가 없어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들과 길에서 걸식하는 사람들, 병들어도 병원조차 갈 수 없는 수많은 빈민들을 보고 가슴 아파했다.


카타리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빈민들이나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돕고 싶어도 그들 삶 자체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는 1830년 7월에 파리 6구 뤼 뒤 박에 있는 ‘사랑의 딸 회’에 입회했다.


이곳은 언니가 입회해서 봉사하고 있던 곳으로써 17세기에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과 루이즈 드 마리약 성녀가 창설한 봉사회다. 그곳은 ‘사랑의 딸’ 수도회 회원들이 기도하면서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빵과 희망을 주는 공간이었다.


지금은 ‘기적의 메달 성당’이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1830년 7월 18일 밤과 11월 27일 그리고 12월, 세 번 성모 마리아가 카타리나 라부레에게 발현했다. 두 번째 발현 때는 아픈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과 희망을 주는 ‘기적의 메달’을 만들라는 메시지를 카타리나 성녀에게 전했다.



프랑스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여러 번 이뤄지는데,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30년 파리 기적의 메달 성당에서 카타리나 라부레 성녀에게 세 차례 발현한다.


두 번째는 1858년 피레네 산맥에 있는 루르드에서 벨베르나데뜨 수비루 성녀에게,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열여덟 차례에 걸쳐 발현하셨다.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 한 곳을 파하는 말씀에 베르나데뜨 성녀가 그렇게 하자 샘물이 솟았고, 그 성수를 마신 홤자들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지이다.


세 번발현은 1871년 노르망디 라발, 퐁맹에서 어린이들에게, 네 번째는 1883년 노르망디 알랑송에서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녀에게 발현하셨다..파리 기적의 메달 성당, 루르드, 라발의 퐁맹, 리지외는 로마 교황청에서 인정한 성지이고, 세계 각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끊임없이 어어지며 그곳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는 공간이다.


카타리나 성녀는 1830년 11월 27일 밤 발현 때 보고 들은 내용을 알라델 신부에게 전했고, 초기에는 기적의 메달 2천 개가 만들어졌다.


메달을 지닌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견디는 힘을 갖게 되었으며, 이 이야기는 세상 곳곳에 알려졌다. 일 년 내내 파리 6구 골목길에 있는 작고 아늑한 기적의 메달 성당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카타리나 성녀가 성모 마리아 발현 이후 46년간을 침묵과 봉사로서 지냈다는 점이다.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양로원과 요양소 등에서 연로한 환자들을 간호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탁장 등에서 빨래와 허드렛일 등을 하며 사랑을 실천했다.


계속되는 혁명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헐벗은 빈민들을 위해 헌신하고 겸손과 봉사로 일생을 지내다 1876년  선종했다.


그 후 1907년 로마 교황청에서 시복을 위한 심리를 시작했고 1947년 성인품을 받았다. 교황 비오 12세는 카타리나 라부레 성녀를 ‘침묵의 성녀’라 불렀으며, 성녀는 지금도 ‘기적의 메달’ 성당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전하고 있다.


환자와 고통받는 사람은 물론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신비로운 기적의 메달.



플로라 트리스탄은 열악한 환경에서 터무니없는 임금을 받으며 고용주들을 위해 노예처럼 일하던 노동자들에게 타성에 젖은 그들의 인식을 바꾸려 노력했다.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알리고 그들과 연대해서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혼신을 다 했다.


조르쥬 상드는 여자가 공식적으로 글을 쓸 수 없고, 그저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국한된 삶을 살아야 했던 시기에 여자도 남자들과 동등하다는 인식을 바꾸는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아울러 작품 주제도 남녀 간에 사랑보다는 이상적인 사회나 공동체 사회로 나아가자는 주제로 사회변혁을 시도했다. 당시 명성을 날리던 작가들의 질시와 미움을 받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여자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플로라 트리스탄과 조르쥬 상드가 사회적 인식과 변혁을 위해 노력했다면, 카타리나 라부레 성녀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전 생애를 바쳤다. 가톨릭 신자라면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워했을 성모 발현을 체험하고도 46년간이나 양로원과 세탁장 등에서 묵묵히 자신이 맡은 임무를 다하며 겸손과 봉사로써 사랑을 실천했을 뿐이다.


자신을 드러내기에 급급한 요즈음, 겸손과 침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느낀다. 나와 가족 챙기기에 바빠 주위에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돌아볼 여유는 있었는지!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남보다 좀 더 나은 대우를 받기를 바라는 세상 속에서도 은은한 빛을 내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그나마 따뜻하게 이어져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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