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는 우리나라 항공사 기내방송에서조차 ‘낭만과 예술의 도시’라는 수식어를 붙일 정도로 문화예술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아울러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파리는 예술 아닌 게 없다며 감탄을 아끼지 않는 곳이다. 파리보다 더 운치 있고 멋진 도시도 있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파리를 그렇게 평가하는 이유는 단지 외형적 아름다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파리는 중세이래 건축사에 자리매김된 건축물들과 절절한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문학, 미술, 음악, 장식예술 등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과 예술에 관한 진진한 기록과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곳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도시, 파리는 그 안을 들여다보면 씨실과 날실이 한 올 한 올 엮여 천이 되듯이 각각의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연륜이 배어 그것들이 서로 조화롭게 공존한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며 지켜나갈 수 있는 이유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탄탄하고 막강한 저력과 지속적인 관심 덕분이다.
파리 세느 강변에 서있는 토마스 제퍼슨.
혁명 직전 프랑스 파리 주재 대사였고, 미국 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 역시 정치적 노선은 달랐지만, 세상에서 자신이 선택하고 싶은 곳이 있다면 프랑스 파리라고 말했듯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예술가들이 파리를 사랑하고 이곳에 머물다 갔다.
아울러 파리는 1, 2차 세계대전을 겪었으면서도 세트장을 만들지 않고 영화 촬영이 가능할 만큼 예전 모습으로 건재하다.
시테 섬에 자리한 중세 고딕의 걸작 노트르담 대성당, 쥬느비에브 언덕의 팡테옹과 소르본느 대학, 앵발리드 광장에 위치한 황금빛 돔 성당과 군사박물관, 샹 드 마르스에 자리한 에콜 밀리테르와 에펠탑이 그렇다.
샤를 드골 에트왈 광장에 있는 개선문, 몽마르트르에 우뚝 선 듯한 사크레 쾨르 성당, 발 드 그라스, 센 강변의 르네상스 풍인 파리 시청사 등과 함께 이름을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건축물들이 파리에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폭파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자, 히틀러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위기감을 느꼈고, 유럽을 점령해서 초토화시키던 독일 롬멜 전차부대와 나치는 패전의 기운이 짙어졌다.
뒤틀린 영혼 히틀러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당시 파리 최고 사령관이던 디트리히 콜티츠에게 수많은 파리 건축물과 퐁 뇌프, 미라보 다리 등 세느 강 좌안과 우안을 잇는 다리들을 폭파하고 기밀서류는 소각한 뒤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콜티츠가 만약 자신의 양심이나 소신 없이 히틀러 명령을 그대로 이행했더라면 파리는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그런 끔찍한 명령을 한 히틀러도 이미 파리에 와서 즐거움을 만끽했었다. 그 역시 여느 관광객들처럼 트로카데로 언덕 샤이오 궁 앞에서 에펠 탑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샤를르 갸르니에가 설계한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도 감상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그저 입으로만 예술과 음악을 좋아했을 뿐,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는 기형이었다. 그는 악랄하고 파괴적 성향을 지닌 괴물이었으므로 파리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관 명령대로 행동하는 유형 중,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사르다나팔의 죽음> 속에 궁녀를 죽이려고 잔뜩 힘을 모은 병사다.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1798-1863)가 1827년에 완성한 이 그림에는 폭군과 추종자들의 오만함, 그들로부터 살해당하는 왕궁 안 사람들과 동물의 표정에서 절망과 공포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낭만주의 화가 으젠느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의 죽음> 루브르 박물관
메소포타미아 지역, 고대 앗시리아에 잔인하고 포악한 왕 사르다나팔은 궁을 포위한 무리들이 궁 안으로 곧 진격할 거라는 보고를 받는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왕은 천인공노할 명령을 내린다.
그는 부하들에게 왕궁 안에 생명이 있는 건 모조리 죽이고 자신과 측근들은 최후에 자살할 것을 결정한다.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다. 사르다나팔은 붉은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 살육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발가락마다 발찌를 끼고 온갖 장신구를 한 채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표정은 불안하면서도 비정상적인 심리상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와 함께 가해자로 묘사된 병사들은 사르다나팔 왕만큼이나 잔인하다. 궁정 사람들을 더욱 공포에 떨게 한 건 침입자가 들어와 죽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아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찾아다니며 죽이기 때문이다. 왕궁을 지키며 인사를 나누던 병사들은 살인자로 변해서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다. 그들은 왕궁 내부 지리는 물론 비밀 통로까지도 알고 있어 사람들은 숨을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다. 그들은 사람과 심지어는 동물들까지 죽이려 한다. 가해자인 그들은 그저 명령대로 움직이는 무감각한 모습이고 눈의 초점은 흐려져 있다.
그림 속 병사들에게 자신의 신념 따위는 허상이고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오로지 상관이나 지휘관의 명령대로만 행동하는 인간 유형의 전형이다. 그들은 명령이 옳건 그르건 본인이 판단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이행한다. 한 사람을 죽이건, 대학살을 하건 그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누군가가 책임을 물어도 “그저 명령대로 했을 뿐이다.” 또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라고 앵무새처럼 말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무지한 일이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들라크루아가 <사르다나팔의 죽음>이란 작품에서 어찌나 사람들과 동물 심리를 잘 묘사했는지 주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말의 눈에 어린 공포와 그렁거리는 눈물이 그림 바깥 현실로 흐르는 듯하다. 특히 있는 힘을 다해 궁녀를 잡은 병사 눈빛엔 ‘오직 명령대로 하리라’는 집념만이 이글거린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은 어찌 될까?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 세상엔 악인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대다수다. 양심을 갖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며,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독일인 디트리히 콜티츠다.
파리를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한 디트리히 콜티츠
그는 1894년 실레지아에서 태어났다. 독일 동남부 지방의 드레스덴에서 교육받은 그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부상당했다. 이후 그는 지휘관으로서 여러 곳에 머물렀고, 1944년 8월 초에 파리 주둔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잔인한 독일군 사령관과는 달리 온건했고 즉결 처형될 위기에 놓인 프랑스 레지스탕스 요원들을 풀어주는 관대함을 보였다.
당시 히틀러는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이 시시각각 주요 도시로 진격하고 프랑스와 파리에서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로 인해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불안에 떨던 히틀러는 8월 23일 디트리히 콜티츠에게 파리 주요 건축물과 교각을 모조리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콜티츠는 이전부터 히틀러가 비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고 폭파 명령을 받은 상황에서도 그것이 그릇된 판단이라 여겼다. 하지만 당시 히틀러의 영향력은 황제보다 더 위력이 있었으며 히틀러 추종자들은 그를 신처럼 떠받들던 때라 명령 불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군인이었으므로 상관이자 최고 통치자인 히틀러 명령을 받고 침통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웠다.
파리의 모든 문화유산은 산산이 부서져 흔적도 남지 않을 상황이었다. 불안한 시간은 흘렀다. 깊은 밤이 지나고 그가 머무는 뫼리스 호텔 창 밖으로 옅은 여명이 번지고 있었다. 밤새 잠 못 이루던 그는 아직 검푸른 기운이 흐르는 창 밖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파리의 수많은 건축물들은 몇몇 사람이 결정해서 파괴해 버릴 것들이 아니다. 인류 문화유산이며,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들이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야 한다. 군인으로서 상관 명령에 불복종은 있을 수 없지만 나는 히틀러의 명령을 이행할 수 없다. 그의 명령은 정상이 아니고, 파리에 있는 문화유산은 영원히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양심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온밤 내내 고민하다가 마침내 히틀러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리라는 확고한 결심을 했다.
그와 더불어 또 한 사람, 스웨덴 출신 외교관 라울 노르들링(1905-1944)을 잊을 수 없다. 히틀러가 전권을 휘두르는 시기에 사령관 콜티츠 곁에서 소중하면서도 귀한 조언을 아끼지 않은 그 역시 존경받을 인물이다. 그는 8월 19일 드골 계열 사람들과 콜티츠와의 만남을 주도했으며, 체포된 레지스탕스 요원 즉결 처형 중지 및 주요 사안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공헌했다. 프랑스와 파리에 애정을 갖고 확고한 신념으로써 도시와 사람을 살려낸 그는 아쉽게도 3일 후 8월 22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파리엔 그를 추모하고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8월 25일, 디트리히 콜티츠는 그가 집무실로 사용하던 뫼리스 호텔에서 파리로 입성한 르클레르 장군과 레지스탕스 FFI 소속 콜 대령에게 체포됐다. 만행을 저지른 독일 전범들이 처형당하는 시기였으므로 콜티츠 역시 감옥에 갇혀 여러 차례 재판을 거치면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그는 1947년에 자유의 몸으로 풀려났다. 광기에 사로잡힌 히틀러의 압제 속에서도 결코 신념을 굽히지 않고 사람들과 파리를 구하기 위해 행동했던 사건들을 그는 회고록으로 남겼다.
그는 명예로운 군인이기도 했지만,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정직하고 좋은 마음을 지녔으므로 잘못된 것 앞에서 괴로워하며 고민했다. 그런 의식이 있었기에 위험한 상황에서 의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디트리히 콜티츠는 참혹하고 끔찍한 1, 2차 세계대전을 차례로 겪고 비극적인 격동기를 견디며 1966년 11월 5일 바덴바덴에서 일흔두 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파리를 사랑한 수많은 사람 중에 은은하게 빛을 내는 이름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신념과 용기를 갖고 혼란한 시기에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을 온전히 지켜낸 콜티츠의 고귀한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