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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업 Sep 19. 2023

벼랑 끝의 스터디

목표에 관한 생각을 버리기로 하고 난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불안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잘하면 잘하는 대로

일단은 눈앞에 닥친 것부터 열심히 해보자




마음을 고쳐먹은 후로 도서관에서의 집중력은 한층 향상됐다.

매번 스터디에 나가서 문제에 손도 못 대고 와도 아무렇지 않았다.

대신 스터디가 끝나자마자 복습하고 또 복습하면서 최대한 시험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고 내 발제 순서가 왔다.

보통 한국은행의 문제는 해외대학교의 교수가 만든 Problem set을 번역해서 가져오기도 하고, 이미 입행한 선배들의 자료를 참고해서 발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어떠한 자료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구글링에 의존해야 했다.

게다가 실력도 부족한 상태여서 1개의 문제를 완성하는 데 하루를 온전히 투자해야 할 정도였다.

사실 아무런 문제나 번역해서 가져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단은 스터디원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문제를 만들어가려고 했다.

게다가 워낙 준비하는 사람들의 풀이 좁다 보니, 한국은행 수험시장에서의 개인의 평판은 알게 모르게 중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만든 문제는 정말 다행히도 스터디원들의 극찬을 받았다.

경제학 공부를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좋은 문제를 만들어올 수 있냐는 것이다.

내 노력과 열정을 갈아 넣은 보람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뿌듯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예상대로 스터디원들과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다.

스터디가 끝나고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시험과 관련된 정보들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한동안 이렇게 스터디가 유지되면서 별다른 잡생각 없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역시 사람의 인생은 굴곡이 있을 수밖에 없나 보다.

스터디에 가장 열심히 참여하고 실력도 좋은 2명이 스터디를 나가겠다고 통보했다.

둘 다 다른 금융공기업에 합격해서 더 이상은 스터디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야 좀 안정적으로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는데

몇 개월 동안 함께 공부하면서 친해진 사람들이 나간다고 하니 서운하기도 했고, 또 가장 열심히 참여했던 사람들인지라 앞으로 어떻게 공부해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이제 시험도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새로운 스터디원을 모집해야만 했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아서인지 한국은행만을 준비하는 사람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제대로 된 스터디에 소속되어 착실하게 시험을 준비해나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은 머릿수라도 채우자는 생각으로 발제가 가능할 것 같으면 일단 모집하기로 했다.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문제 만드는 데에만 시간을 쏟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집된 사람들은 스터디가 시작하기도 전에 나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아마 그 사람들은 한국은행을 포함해 다른 금융공기업도 함께 준비하는 곳인 줄 알고 들어왔을 텐데, 우리는 첫 만남 때부터 한국은행만을 준비하는 곳이라고 명확하게 얘기했다.

시험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방향이 맞지 않는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2주 동안 계속 사람을 구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참... 사람 인생 쉽게 흘러 지가 않는구나

남은 스터디원들도 나도 이제는 사람을 구하는 데 많이 지쳤나 보다.

앞으로 어떻게 스터디를 해야 할지에 대해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동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주만이라도 잠시 휴식을 갖자고 했다.



그런데 잠시 스터디를 쉬고 있는 도중에 한 통의 쪽지가 왔다.

친구와 함께 스터디에 들어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람 구하느라 지쳐있었는데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쪽지의 내용이었다.

자기와 같이 들어오려고 하는 친구는 올해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정말' 좋다는 것이었다.

기존에 같이 스터디했던 사람들도 내 기준에선 실력자였지만 항상 합격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당당하게 합격을 자신할 수 있다고 하니 너무 궁금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함께 하자고 했다.


이들은 원래 교내에서 스터디를 하다가 좀 더 새로운 사람들과 하고 싶어서 교외 스터디를 알아보고 있었다고 했다.

시험을 앞두고 이런 결정을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용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스터디를 선택해 줘서 고마웠다.


그렇게 운 좋게 2명을 충원하고 나니 또 다른 누군가가 스터디에 함께하고 싶다고 쪽지가 왔다.

한국은행만을 준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발제를 정말 열심히 할 것 같다고 느껴졌다.

정원을 초과하긴 했지만 또 누군가가 갑자기 나갈 수도 있으니 그냥 받기로 했다.

스터디원을 못 구해서 앞으로 어떻게 스터디를 해나가야 하나 막막했던 것도 잠시, 3명이나 충원되니 뭔가 모르게 든든해졌고 의지도 다시 충만해졌다.


그리고 이때 들어온 3명은 그 누구보다 내 수험생활에 정말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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