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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 Jun 30. 2023

고요한 우연으로 이루어진 나날들

<독서정담 세 번째 : 고요한 우연>

이번 주가 시작된 첫날부터 저녁이 바쁘다. 월요일엔 직장 동료이자 지금은 퇴직 또는 이직해 뿔뿔이 흩어진 '돌사모'회원님들과 저녁 약속, 화요일엔 서울나들이 후 늦은 귀가, 그리고 수요일. 퇴근 후 독서정담이 있는 날이다. 독서동아리 친구들한테 감기가 옮았는지 목이 칼칼하고 컨디션 난조 상태라 일단 정담을 나눌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샘~, 오늘 만나는 날인데 괜찮으실까요?"

"네, 저는 괜찮은데요. 왜요?"

"제가 감기 기운이 있어서... 혹시라도 옮을까 봐."

"전 상관없어요~."


명쾌한 그녀의 대답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일이라기보다는 힐링의 시간. 뽑은 논제 2부를 출력해 혜00 베이커리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잠시 기다리니 그녀가 도착. 날씨가 도와주는지 강렬하던 햇볕은 오후 어느 시간즈음인가 잦아들었고 공기는 시원 촉촉하다.  


"저희 여기 단골이에요. 한 달에 두 번은 온답니다."

"그것도 이른 저녁이요. ㅎㅎ"


시골밥상처럼 차려주는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보통저수지를 걸었다. 어느새 연꽃이 피었건만 꽃이 그리 탐스럽지는 않다. 그래도 저수지 가장자리를 군데군데 두른 연은 또 색다른 풍경이다.


 

가벼운 산책 후 차를 마시며 <고요한 우연(김수빈/문학동네,2023)>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책이나 나의 책이나 포스트잇으로 표시해 둔 부분이 빼곡하다. 

 


<고요한 우연>은  흔한 이름을 가진 평범한 이수현, 친절하고 다정한 모두의 우상 한정후, 별다른 특징 없이 배경처럼 살아가는 이우연, 이쁘고 공부도 잘하고 흠잡을 데 없지만 따돌림당하는 은고요, 수현의 든든한 단짝친구 서지아. 이들이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오가며 겪는 17살 청소년 이야기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는 면에서 근래 읽은 책 중 괜찮은 책이라는 평이 오갔다.   


첫 번째 논제는 자유논제로 따돌림당하는 고요에 대한 수현의 태도를 바라보는 문제였다. 

수현은 따돌림당하는 고요를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커 선 뜻 나서지 못합니다. 음악 수행 평가 조별 과제에서 따돌림받은 고요를 도와주려다 수현은 상처를 입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을 어떻게 보셨나요?
나는 고요가 싫지 않다. (중략) 그 애를 도와주고 싶지만, 선뜻 나설 수가 없다. 그럴만한 용기도 없고 괜히 다른 아이들의 반감을 살까 걱정스럽기도 하다.(59쪽)
-그리고 너처럼 이쪽저쪽 눈치 보면서 착한 척하는 애들.(중략)
-진짜 재수 없어.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너무 아프고 부끄러웠다.(중략)
차라리 가만히 있을 걸 그랬다.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나의 보잘것없음만 깨닫게 됐다. 그건 내가 겁쟁이라는 사실보다 더 비참하고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중략) 나는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걸까. 나는 내가 시시하다. 나는 내가 재미없다. 나는 내가 별로다. 나는 사실, 내가 참 싫다.(94,95쪽)


초등학교 때 친구관계로 상처가 컸던 고요를 이해할 수 있으나 타인을 내치는 게 지나치다는 의견을 나누었다. 더불어 고요에게 받은 상처로 수현이 너무 자학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도. 사실 이 논제는 집단따돌림 시 다수의 방관자에 대한 문제와 연관되어있기도 하다. 내가 수현이라면 어땠을까. 나 역시 쉽게 나서지는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주려는 수현과 정후, 우연의 마음들이 모여 사건은 전개되고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두 번째 자유논제는 예고 입시에 떨어졌던 우연에 대한 이야기다.  


예고 입시에 떨어졌던 우연은 기대를 많이 했던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특별 한정판’이 아닌 “23번 피규어라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하는데요, “23번이라도 괜찮냐고 묻는 시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을 어떻게 보셨나요?                    


-27번까지 줄을 세운다면 대충 23번쯤 되지 않을까.
-예고 입시에 떨어졌을 때, 엄마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어이없게도. 엄마가 기대를 많이 했었거든.(158쪽)
-근데 이젠 괜찮아. 난 내가 23번 피규어라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였거든. 내가 저 피규어를 바라보듯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바라본다고 해도 상관없어. 다만 가끔....(중략)
-23번이라도 괜찮냐고 묻는 시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어.(159쪽) 


내가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것과 타인이 나를 받아들이는 시선의 문제는 좀 다르다. 게다가 17살 우연은 수현이 일러준 그림대회에 응모했다 다시 한번 실패의 쓴맛을 본다. 괜찮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우연, 늘 주인공이 아닌 배경처럼 살았던 우연에게 손을 내밀어준 수현이라는 우연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살기에는 17세라는 나이가 너무나 풋풋하고 아름답다. 


다음은 선택논제로 이어졌다. 첫 번째는 고요의 삶에 대한 태도를 묻는 문제다. 고요와 수현은 SNS에서 만나 친구가 된다. 고요는 '바다'라는 이름으로, 수현은 '수리'라는 이름으로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지만, 수현은 바다의 정체를 알게 된다. 


SNS에서 만난 바다-고요는 익명의 수현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길고양이 아폴로를 “좋아하는데 무섭다”며  만지지도 못하면서 ‘먹을 걸 주’는 행동이지요. 이에 대해 바다(고요)는 “영영 챙겨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마음을 주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요. 여러분은 바다(고요)의 이 말에 공감하시나요?   

-  공감한다  / 공감하기 어렵다
잠시 말이 없던 바다가 물었다. 
-좋아하는데 무섭다고?
-응
-만지지도 못하는데 먹을 걸 주고?(중략)
-영영 챙겨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마음을 주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해.(106,107쪽)


이에 대해 그녀와 나는 '공감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나누었다. 


"샘은 개를 키웠었고, 저는 고양이를 키워서 그런가요~? ㅎㅎㅎ"


농담을 주고받다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고요처럼 살기에는 삶이 너무 팍팍하지 않은가. 게다가 챙겨주다 평생 챙겨주는 관계가 될 수도. 우연에 대한 관심, 정후에 대한 동경심, 설령 상처받더라도 고요를 도와주고 싶었던 수현의 마음, 그런 수현을 곁에서 지켜보는 친구 지아. 이런저런 마음들이 모이고 또 그런 마음에 힘입어 사람은 한 발짝씩 더 내딛게 되는 것은 아닌지.  


선택논제 두 번째는 익명으로 속마음까지 털어놓게 된 사이에서 수현이 고요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고요는 SNS에서 만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게 된 친구 ‘수리’가 누군지 모릅니다. 반대로 수현은 ‘고요의 바다’가 고요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요. 그때부터 수현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거짓말을 하게 되는 셈입니다. 여러분이 수현이라면 ‘수리’가 자신임을 밝힐 건가요?

-  밝힌다  / 밝히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지금부터는 거짓말이 된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112쪽)    
-수리야, 나는 너랑 멀어지고 싶지 않아.
고요는 영원히 자기 곁에 있어 달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진짜 이름이나 사는 곳처럼 개인적인 정보는 절대 말하지도, 내게 묻지도 않았다.(113쪽)
-근데.....
-어쩌면 우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중략)
-네가 정말로 좋으니까.
나는 고요의 다음 메시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리 절대로 만나지는 말자. (114쪽)



그녀는 '밝힌다'는 입장이었다. 어쨌거나 상대를 알고 있는데도 모른척한다는 건 거짓말이 되는 것이므로. 나는 '밝히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상대를 모른 상태에서라도, 수현이 고요를 대하고 말했던 건 거짓이 될 수는 없으니까. 수현은 결국 고요에게 정체를 밝히고, 고요는 수현에게서 멀어져 갔다. 길게 보면 차라리 수현의 선택이 옳았을까. 긴 시간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보다 당장의 고통을 감수하는 편이 나았을 수도. 훗날 수현의 마음을 알게 된 고요가 다시 돌아와 마음의 문을 조금이라도 열 수 있으리란 희망을 기대해 본다. 


<고요한 우연>은 이쁘고 잘생기고 무엇이든 잘해 존재감 뿜뿜인 눈에 띄는 아이들 고요와 정후, 수현 표현대로라면 '생긴 것도 그냥그냥, 하는 일도 그냥그냥', 딱히 개성도 없어 보이고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아이 수현과 우연. 이들이 한 교실에 어우러져 주고받는 각자의 삶과 상처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다. 

'꿈을 꾸는데도 밑천이 필요'해 꿈을 꾸지 못하는 아이들은 삶이 조용하고 잔잔하고 심심하다. 하지만 이면에는 나름대로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거. 그들은 모두 반짝거린다.


"네 삶의 이유는 뭐야?"

묻는 수현의 질문에 절친 지아는 답한다.

".. 사람이 사는 데 이유가 꼭 필요해? 사람이니까 살아가는 거지. 사람만이 아니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아갈 권리가 있고,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는 거라고."(139쪽)


누군가를 만나고 마음을 주고받는 모든 우연들이 모여 삶은 나아간다.




연일 저녁 약속으로 귀가 시간이 늦었다. 평소에는 남편의 귀가 시간이 훨씬 늦는 편인데 요즘따라 일찍이다. 

거실의 약한 불빛, 현관을 열고 들어가니 조용하다. 잠들었나 보다. 싱크대 안이 깨끗하다, 아침 출근 전 수북이 쌓여있는 상태였는데. 모처럼 이른 남편의 귀가 시간,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주방. 이것도 우연일까.  


 

혜00 베이커리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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