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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 Jul 20. 2023

사서 J의 벽은

<독서정담 네 번째  :  빨간 벽>

윗사람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토를 달면 안 된다. 아랫사람은 하인처럼 '네, 네'하며 윗사람 의중을 파악해 비위를 맞춰가며 머슴처럼 일해야 한다. 먼 조선 시대의 일이 아니다. 가깝게는 학교도서관 사서를 교육청이 아닌 학교장이 뽑던 시절, 사서들이 모이면 관리자의 횡포(?) 하나쯤 쉽게 입에 오르내리곤 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교육청에서 발령을 내는 데다 학교의 민주주의니 민주적 의사소통이니 하는 문화를 강조하기에 한결 나아진 듯 보인다. 


사서 J는 결재를 올릴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교장이 불러서 사사건건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100일의 독서메모, 이런 거 왜 해요?", "자료구입비 3%를 추경(추가예산평성) 올렸던데, 어떻게 된 거예요?", "현장수서(현장에 의한 수서) 출장 올렸던데, 수서가 무슨 뜻이에요?"  등 일단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결론은 자기를 내세우고 자신에게 권한이 있음을 내비치는 식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쉽게 결재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드러낸다. 사서 J는 그때마다 관련 근거, 규정 따위를 출력해 제시하며 합리적 설득을 이뤄내야 했고, 변명조로 둘러대는 주제와 상관없는 그의 대화에 응해야 했다. 그렇게 5년. 교장은 정년을, 사서 J는 다른 학교 발령을 앞두고 있다. 


사서 J는 깨달았다. 자신에게 두터운 '마음의 벽'이 생겼음을. 누군가 도서관업무에 대해 몰라서 물어볼 수 있는 것임에도 관리자 급이 물어보면 쉽게 방어기제를 작동한다. 이제 그 벽을 허무는 건 사서 J의 몫이 되었다. 민주적 의사소통이니 뭐니 시대가 바뀌었다 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은 건 어찌해야 할까. 관료로서 관료주의가 만연하던 시절을 겪은 사람이 변화할 가능성은 있는 걸까. 현대를 살아가면서도 근대적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을 수 있으나, 그 자리가 타인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브리타 테켄트럽의 <빨간 벽>을 챙겨 융건릉으로 향했다. 비 온 뒤 숲의 녹음을 만끽하고 싶어서다. 역시 숲은 독서정담을 나눌 그녀와 나를 온 기운을 뿜어 반겨주고 안아주었다. 



<빨간 벽>은 동물들이 사는 마을에 언젠가부터 늘 있었던, '빨간 벽'에 대한 동물들의 태도를 통해 우리 삶을 반추해 볼 수 있는 그림책이다. 벽 너머 세상에 대한, 호기심 가득한 생쥐를 통해 이야기는 전개된다. 내가 뽑은 논제 3가지, 그녀가 뽑은 논제 3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나의 자유논제 1.


벽 너머 세상이 궁금한 생쥐는 겁 많은 고양이, 늙은 곰, 언제나 행복한 여우 등 동물 친구들에게 묻습니다. 그중 언제나 행복한 여우는 “벽 뒤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뭐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자기처럼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을 어떻게 보셨나요?                    

꼬마 생쥐는 언제나 행복한 여우에게 물었어요.
“저 벽 뒤에 뭐가 있는지 아니, 여우야?”
“벽 뒤에 뭐가 있든 무슨 상관이야.” 여우가 씩 웃었어요.
“꼬마 생쥐, 넌 질문이 너무 많아. 뭐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러면 나처럼 행복해질 테니까.”(12쪽)


내가 이 논제를 뽑은 이유는 '있는 그대로'에 꽂혔기 때문이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혜안이 필요했을 수도. 그녀는 오히려 여우에게서 현실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벽 너머의 세상이 어떤 줄도 모르고 관심조차 갖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모습 말이다. 예를 들어 그 벽이 어떤 누군가를 향한 편견이었어도 여우는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내가 무엇인가 놓친 것은 없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작품의 전체적인 맥락보다 부분에 너무 집착했었던 건 아닌지. 최근 독서토론에 대한 연수를 듣다 강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사람은 머릿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하지요. 하나는 선입견의 개, 다른 하나는 편견의 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살면서 쌓이는 이런저런 경험의 바탕 위에 알게 모르게 생긴 나의 기준들, 사람을 보는 안목, 나아가 세상에 대한 잡다한 생각. 그것들이 선입견 또는 편견이 아닐 가능성은 몇 퍼센트나 될까. 어쩌면 독서토론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나의 노력이기도 하다. 


# 나의 자유논제 2.


어느 날 꼬마 생쥐는 파랑새를 타고 벽 너머 세상으로 날아가 ‘색색가지 아름다운’ 세상을 발견합니다. 파랑새는 생쥐에게 “어떤 벽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지만 대부분은 스스로 만들게”된다고 하는데요. 여러분은 파랑새의 말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꼬마 생쥐야, 네 인생에는 수많은 벽이 있을 거야. 어떤 벽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지만 대부분은 네 스스로 만들게 돼.”(34쪽)


과연 그럴까. 대부분 국가와 사회가, 가정이 만들어 놓은 무수한 벽들에 영향을 받으며 나 또한 새로운 벽을 세우는 것은 아닌지. 예를 들어 사서 J에게 생긴 '마음의 벽'이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정담을 나눈 그녀는 어쨌거나 스스로 만드는 벽이 크다고 말한다. 그것은 즉 자신의 책임이며 스스로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되는 셈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쩌면 '벽'을 누가 만들었는보다 '벽'을 깨닫고 이후에 취하는 태도일 수도 있겠다.   

 

# 나의 선택논제.


벽 너머 세상이 궁금했던 꼬마 생쥐는 파랑새를 타고 벽 너머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여러분이 생쥐라면 파랑새를 타고 벽 너머로 날아갈 건가요?  

  -  날아간다  / 날아가지 않는다.        

“파랑새야, 날 벽 너머로 데려가 줄 수 있니?” 꼬마 생쥐가 물었어요. 
“벽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
파랑새와 꼬마 생쥐는 함께 벽을 넘어 날아갔어요.(26쪽)

그녀나 나나 당연한 듯 '날아가는' 쪽을 택했다. 이 논제를 뽑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책 읽어주는 사서' 시간에 1, 2학년에게 이 책을 읽어주고 위의 질문을 해본 적이 있어요. 저는 당연히 아이들이 '날아가는' 쪽을 택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의외로 '날아가지 않겠다'는 아이들이 더 많은 거예요."


사실 그때 난 의아했다. 한창 호기심과 모험심이 생길 나이에 '벽 너머' 세상을 가지 않겠다니. 가볍게 던진 질문과 의외의 반응에 궁금했던 나는 아이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기억컨대 대부분의 아이들이 '친구를 떠나고 싶지 않아서', 또는 '친구들 곁에 있고 싶어서'였다. 어린이책에 대한 지식이 많은 그녀의 설명이 뒷따랐다. 아이들은 문학작품 속에서 돌아오지 않는(못하는) 결말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모험담이나 집을 떠나는어린이 문학작품의 경우 결말은 대부분 돌아오는 것으로 끝난단다. 그래야 아이들은 정서적 안정감, 안도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벽 너머' 세상으로 날아가지 않겠다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많은 모험담을 읽으며 아이들은 어떤 힘을 갖게 될까. 세상을 살아갈 내공의 힘을 키우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보다는 용기를 배우고,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니 말이다. 


# 그녀의 자유논제 1.


꼬마 생쥐는 벽 너머의 세계에 대해 호기심을 갖지만 다른 동물들은 익숙한 듯 관심 갖지 않습니다. 고양이는 벽이 ‘우리를 지켜’ 준다고 말하고, 곰은 ‘삶의 일부’라며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여우는 ‘벽 뒤에 뭐가 있든’ 상관없다며 ‘뭐든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자는 벽 뒤에 아무것도 없다며 멍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봅니다. 이 동물들이 세상을 대하는 다양한 모습을 대변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동물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생쥐는 겁 많은 고양이에게 물었어요. (중략)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있는 거야. 벽은 우리를 지켜 줘. 꼬마 생쥐야. 저 바깥쪽은 위험해.” (중략) 늙은 곰이 말했어요. “기억이 안 나는구나, 꼬마 생쥐야. 
저 벽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단다. 이제 내 삶의 일부야.” (중략)
꼬마 생쥐는 언제나 행복한 여우에게 물었어요.(중략)
“꼬마 생쥐, 넌 질문이 너무 많아. 뭐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러면 나처럼 행복해질 테니까.” (중략)
“벽 뒤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냥 커다랗고 시커먼 없음이 있지.”(중략)
그러고는 생쥐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멍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았어요.

나는 굳이 선택하자면 '여우'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일종의 정신승리라고나 할까. 그녀는 돌이켜보면 위 동물의 모습을 모두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어떤 때는 고양이처럼, 어떤 때는 곰처럼, 또 어떤 때는 여우처럼... 사안과 상황에 따라 선택했던 삶의 모습을 들여다본 듯했다. 


# 그녀의 자유논제 2.


꼬마 생쥐는 ‘눈 닿는 데까지 뻗어 있’는 빨간 벽 너머의 세계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여러 동물들을 찾아다니지만 익숙한 듯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급기야 혼자 벽을 넘어간 꼬마 생쥐는 벽 너머에 펼쳐진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감탄합니다. 파랑새는 말합니다. 인생의 수많은 벽 중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말이지요. 여러분이 만든 벽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파랑새가 설명해 주었어요.
“그 친구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봐서 그래.
너는 궁금해하면서 봤잖아. 넌 정말 용감했어.
진실을 스스로 찾아 나설 정도로 말이야.
꼬마 생쥐야, 네 인생에는 수많은 벽이 있을 거야.
어떤 벽은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지만
대부분은 네 스스로 만들게 돼.”


나는 가족 간의 벽에 대해 말했다. 오히려 (사람 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추측하고 판단하기 쉬웠던 것은 아닌지. 무수히 있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기는 오해와 편견 등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녀가 내게 묻는다. 


"선생님은 그럴 때 어떻게 해요?"

"음... 머리를 비우려고 하지요. 그들과 최대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편이에요." 


그녀의 벽은 요즘 '다문화 가정'에 대해서다.

"선생님 (다니는) 학교에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가 어떤가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그녀는 근래 다문화 가정에 대한 벽이 생긴 것 같단다. 일종의 편견이다. 학교에서 만난 다문화 가정 아이 중 하나가 부모로부터 방치된 채 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대화도 안되고 한글도 못 깨쳐 학교생활이 어렵다.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는데 나아지는 거 없이 반복되고, 여러 사례를 접하다 보니 편견이 생긴 것 같다고. 


"그 아이가 꼭 다문화 가정의 아이어서가 아니지 않을까요? 

어떤 부모든, 나라에 상관없이 자식을 그렇게 방치한다면 누구든 그 아이처럼 될 수 있으니까요."


편견은 경험을 먹고 자란다. 그런 나의 경험이 전부가 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듯. 


# 그녀의 선택논제.


벽 너머의 세상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깜깜하지도 으스스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꼬마 생쥐는 ‘친구들에게 말해 줘야겠’다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파랑새는 친구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됐을 수도 있’다며 타이릅니다. 그러나 생쥐는 그래도 해 보겠다고 하며 친구들에게 돌아갑니다. 여러분이라면 생쥐처럼 친구들에게 바로 이야기하겠습니까, 아니면 때를 기다렸다가 이야기하겠습니까?  

  -  바로 이야기한다  / 기다렸다가 이야기한다  

“친구들에게 말해 줘야겠어.” 생쥐가 소리쳤어요.
“아직 준비가 안 됐을 수도 있어, 꼬마 생쥐야.” 파랑새가 타일렀어요.
“그래도 해 볼래.” 생쥐는 말했지요.


"저라면 기다렸다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래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꼬마 생쥐는 파랑새의 말을 듣지 않고 친구들에게 돌아가 자기가 본 것을 말해준다. 

다행인 건 친구들이 모두 귀 생쥐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는 점이다. 


 



사서 J는 '마음의 벽'을 허물 수 있을까. 파랑새의 말은 전한다.


"벽은 처음부터 없었어. 

두려운 마음으로 보지 마. 

네가 마음과 생각을 활짝 열어 놓는다면 

어느새 그 벽들은 하나씩 사라질 테니까."



막히지 않은 벽, 융건릉의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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