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정담 여섯 번째 - 인간실격>
방학 중 연수로 바쁜 한 주였다. 연수 주제는 북트레일러와 북모티콘 제작. 실습 위주라 꼼짝없이 컴퓨터와 모바일을 오가며 쫓아가기 바빴다. 마치는 시간도 빠듯해 독서정담이 있는 약속 장소를 향해 후다닥 출발, 혜*궁 베이커리 주차장에 도착하자 저어만 치서 그녀의 실루엣이 보였다. 방학 중에는 어린이 청소년 책이 아닌 일반도서를 선정해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첫 번째 책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일본 문학이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서문>에 한 남자의, 세 장의 사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첫 번째 사진은 유년 시절의 사진이다. 웃고 있으나 억지웃음인 게 느껴져 표정이 기괴하다. 두 번째 사진은 고교 또는 대학 시절의 사진이다. 사진 속 남자는 외모가 출중하다. 대단한 미남이다. 이 사진 역시 웃고 있으나 유년 시절의 기괴한 웃음이 아닌 깃털처럼 가벼운 웃음이다.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마지막 세 번째 사진 속 남자는 존재하고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 듯 아무런 인상조차 느껴지지 않는, 머리가 희끗한 기묘한 얼굴의 남자다.
세 장의 사진 속 인물이라 여겨지는 요조,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서문의 뒤를 이어 세 개의 수기로 펼쳐진다.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난 요조가 인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끝내 파멸해 가는 이야기다.
독서정담을 나누는 그녀와 준비해 온 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 나의 자유논제
어린 시절부터 인간들의 위선과 잔혹성을 보며 인간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요조는 나름 ‘익살꾼’을 자처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인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도 '익살'을 선택하는데요, 여러분은 이런 요조의 행동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중략)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19쪽)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저는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익살로 아침부터 밤까지 인간들을 속이고 있으니까요.(26쪽)
페르소나. 다른 사람 눈에 비치는, 특히 그의 실제 성격과는 다른, 한 개인의 모습. 가면에 대한 이야기다. 요조는 일찌감치 가면을 찾았다. '익살꾼'이라는 가면. 어느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내거나 거절할 줄 몰랐던 데다 인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익살'을 통해 감추기 위해서다.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요즘 집에서 '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있어요. 실제로는 괜찮지 않은데 말이에요. 대학생 두 명 뒷바라지하는데서 오는 경제적 어려움, 직장도 다니는데 주말에 밑반찬 만들고 식구들 모이면 무얼 해 먹일까, 장보고 요리해야 하는데서 오는 누적된 피로, 남편과 소통의 어려움에서 오는 스트레스... 이런 것들 때문에 힘든데도, 정작 가족들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해요. 분위기 망치고 서로 힘들어질까 봐..."
그녀 또한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무수히 많은 가면을 써왔다고 한다.
결국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꺼내 쓸 가면도 많은 것은 아닌지. 어떤 때는 A라는 가면을 썼다가 또 어떤 때는 B라는 가면을 썼다가. 가면 쓴 삶이 못마땅해지거나 비로소 커다란 문제에 봉착했을 때쯤 아! 진솔한 내 모습을 보여줘야겠구나, 깨닫고는 솔직해지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 인생은 아닌지.
요조는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기 전까지 자신의 가면을 벗지 못했다.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 없"(17쪽)다고 했으나 결국 아무도 믿지 못한 '익살꾼' 요조의 삶은 불행했다.
#. 그녀의 자유논제
호리키는 화방에서 만나 꾸준히 교우하는 친구입니다. 신뢰하지 않지만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만나는 사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매 순간 요조의 곁에는 호리키가 있습니다. 때로는 호리키가 자신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신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도 호리키 때문이라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둘의 관계를 어떻게 읽으셨나요?
호리키와 나.
서로 경멸하면서 교제하고 서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이 세상의 소위 ‘교우’라는 것이라면, 저와 호리키의 관계도 교우였음은 틀림없습니다. (105쪽)
흠칫했습니다. 호리키는 내심 저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겁니다. (중략) 호리키에게는 쾌락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을 이용하면 그뿐인 ‘교우’였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저라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습니다. (110-111쪽)
저는 어째서인지 잠 못 드는 밤이면 그 상인에 대한 증오보다는 처음 발견했을 때 큰기침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저한테 알리러 다시 옥상으로 돌아온 호리키에 대한 증오와 노여움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괴로워했습니다. (116쪽)
요조의 인생에서 가장 가까웠던 친구 호리키. 그런데 요조가 호리키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사람에 대한 공포가 있었던 자기 대신 계산을 해주고, 거리를 활보하게 해 주었으며, 어색한 침묵이 없도록 자기 대신 떠들어주었다. 게다가 호리키를 통해 요조는 술, 담배, 창녀를 알게 되고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잊게 해주는 꽤 괜찮은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요조는 호리키가 자신을 이용했다고 생각하지만 요조 또한 호리키를 이용한 것이 아니냐 말이다.
"만약 호리키의 관점에서 글을 썼다면 어땠을까요? 요조에 대한 생각, 내용이 또 달랐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다.
#. 나의 선택논제
카페에서 만나 하룻밤 잤던 쓰네코와 요조는 밤바다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합니다. 쓰네코는 죽지만 살아난 요조는 자살 방조죄로 수사를 받고 기소유예로 풀려나게 되는데요, 이후 고향에서 보낸 준 돈으로 넙치의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이후 넙치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생각이냐”라고 요조에게 물으며 대화를 나누는데요, 대화 과정에서 요조는 넙치의 태도와 말투에 세상 사람들의 불필요한 경계심, 불가사의한 허영과 체면 차리기를 느끼며 넙치의 말 때문에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요조의 생각에 공감하시나요?
-공감한다/공감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겁니까?”(중략)
“기소유예라는 것은 전과 몇 범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갱생도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중략)
그런데 넙치의 말투에는,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말투에는 이처럼 까다롭고 어딘지 모호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듯 한 미묘한 복잡함이 있어서, (중략) 말하자면 패배자의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중략)
그런데 넙치가 괜히 신중한 척 둘러 말했기 때문에 묘하게 일이 틀어져서 제가 살아 나갈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77쪽)
넙치와의 대화에서 나는 구석으로 몰린 요조의 모습을 보았다. 마치 잘못을 해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 자식에게 다짜고짜 "너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 생각이냐?"고 따져 묻는 부모와 자신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데 부모의 질문에 궁지로 내몰린 자식의 모습 말이다. 게다가 그동안 요조는 자살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좁은 방 한 칸에 갇혀 지내야 했다. 생각해 주는 척하는 넙치와 점원 시부타의 멸시를 받으면서 말이다. 인간의 위선과 허세, 폭력성에 상처받고 예민했던 요조는 결국 넙치의 집에서 도망치는 방법을 선택하고 만다. 그때 일을 회상하며 요조는 말한다. 넙치가 다음과 같이 말했더라면 자기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을 거라고.
"공립이건 사립이건 어쨌든 4월부터 아무 학교에라도 들어가세요. 당신 생활비는 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고향에서 좀 더 넉넉하게 보내 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 말했더라면. 설령 요조의 삶이 바뀌지 않더라도, 그냥 있는 그대로만 말했더라면.
무척 안타까웠다. 말은 사람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말이 아닌 칼이 될 수 있다. 또 상대방을 생각해 준답시고 어쭙잖게 했던 말이 더 헷갈리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말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 그녀의 선택논제
요조는 어느 곳에도, 누구에게도 안주하지 못하고 떠돌다 무조건 무엇이든 믿는 요시코를 만나 보통 인간의 삶을 꿈꾸며 결혼합니다. 그러나 ‘신뢰의 천재’라고 여겼던 요시코가 그 신뢰로 인해 봉변당하는 것을 본 후 삶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순결무구한 신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능하다 / 가능하지 않다
사실 요시코는 신뢰의 천재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교바시의 바 마담과의 관계는 물론 제가 가마쿠라에서 저지른 사건에 대해 말해 줘도 쓰네코와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거짓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때로는 노골적으로 말했는데도 요시코한테는 그것이 전부 농담으로만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106쪽)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요시코가 더럽혀졌다는 사실보다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그 뒤에도 오래오래 저한테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저처럼 비루하게 쭈뼛쭈뼛 남의 안색만 살피고 남을 믿는 능력에 금이 가 버린 자에게 요시코의 순결무구한 신뢰심은 그야말로 아오바 폭포처럼 상큼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룻밤 사이에 누런 오수로 변해 버렸습니다. (116쪽)
신뢰는 과정이다. 완결된 어떤 결과물, 또는 형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신뢰는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키워나가는 것이 아닐까. 결국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보면 일방적인 무한의 신뢰를 발사하던 때가 있었다. 바로 자식을 키우면서다. '아이는 믿는 만큼 자란다'는 나름의 신조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의 모습이 나쁘지 않다. 대견하고 기특하다. 어떤 모습이든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믿음을 주었을 때 삶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은 것 같다.
<인간실격>은 요조를 통해 인간의 이기심, 허영, 위선, 잔혹성 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사람을 아무도 믿지 못한 요조가 너무 불쌍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어느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못한 요조, 결국 스스로 패배자라며 인.간.실.격.이라고 판단하고 만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던질 차례다. 인간의 자격 기준은 무엇일까, 라고 말이다.
연수 종료 겸, 이 책으로 북트레일러를 만들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