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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 Jun 03. 2024

불안과 집착에 대한 이야기

-<독서정담 N번째 : 관리의 죽음>

한 학기, 6개월 간격으로 그녀도 나도 학교를 옮겼다. 둘 다 모두 다니던 학교에 비해 규모가 커져 적응과 관련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곤 했는데, 바뀐 환경에서 읽고 쓰기를 지속하기란 쉽지 않았다. 적응기에 있었던 나를 그녀가 기다려주고 나 역시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메멧 : 계절이 지나간 자리>(이사벨라 치엘리/웅진주니어, 2023>를 시작으로 5월에 재개된 그녀와의 독서정담, 귀한 시간이다.   




계절의 여왕 5월이 가기 전, 그녀가 나를 초대했다. 그녀의 고향이면서 온갖 빛깔의 꽃이 만발한 용인 친정 집, 힐링의 장소다. 늘 그랬듯 어머님이 편하게 맞아주셨다. 꽃밭이며 작물, 나무 등 탁월하게 잘 가꾸시는 능력자다.


꽃잎이 겹겹이 쌓인 탐스러운 라넌큘러스. 하나하나 빛깔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매발톱(왼쪽)과 꽃양귀비, 수레국화, 안개꽃이 어우러져 핀 뀿밭(우)


여러 가지 들풀과 꽃, 나무, 토끼가족과 고양이 가족, 낯선 내가 다가가자 푸드덕 울어대던 닭 가족(이호백 님의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이 절로 떠올랐다), 직접 키운 작물로 해주신 집밥. 있는 그대로 자연과 어우러져 자연의 일부인 양 살아가는 터전. 외지인이 산책 삼아 오더라도 마당을 기꺼이 내어주는 어머님의 마음까지 존경스럽다.  




저녁을 먹고 인근 카페에서 도란도란 담화를 나눈 책은 <관리의 죽음(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글/고정순 그림/길벗어린이, 2022)이다. 불안과 집착이 낳은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풍자적인 단편소설이 고정순 작가의 날카로운 그림과 만나 곱씹어 보게 되는 책이다.    




오페라를 보던 체르뱌코프가 공연을 보다 재채기가 나왔다. 막을 수 없는 생리 현상이다. 괜찮은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침 앞에 앉아있던 브리잘로프 장군이 자신의 장갑으로 목과 대머리를 닦고 있는 게 아닌가. 체르뱌코프의 침이 튀었기 때문이다. 체르뱌코프는 곧장 사과를 하고 장군은 괜찮다고 했으나, 체르뱌코프는 괜찮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사과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불안이 그 안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불안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불안의 늪에 빠진 체르뱌코프는 결국 죽고 만다.


처음엔 어이없는 죽음에 이르게 된 체르뱌코프가 어리석고 한심하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 누구나 갖고 있을 불안과 집착에 대해 매우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뽑은 논제는 다음과 같다.





#. 자유논제


체르뱌코프는 공연장에서 한 재채기로 앞자리에 앉아 있던 브리잘로프 장군에게 침이 튄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과를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체르뱌코프는 불안감에 시달리기 시작하는데요, 급기야 브리잘로프 장군에 대해 제멋대로 해석하게 됩니다. 이 내용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잊어버렸다고 하지만 눈에는 원한이 담겨 있는걸.’
체르뱌코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장군을 흘깃거렸다.(25쪽)
“그래, 그래, 바로 그거야! 사과를 했는데도 그 사람은 뭔가 이상했어... 한마디 대꾸도 없더라고. 하긴 제대로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지만.”(27쪽)
‘화가 났다는 이야기야... 아니, 이대로 내버려 둬선 안 되겠어.. 해명을 해야지..’(37쪽)


불안은 집착을 낳고 생각을 제멋대로 널뛰게 하며 급기야 이성을 잠식한다. 그 과정이 잘 나타나있다. 그녀와 나는 체르뱌코프와 같은 경험을 나누었다. 어린 시절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의 부모님, 아빠의 외도로 엄마는 툭하면 소설 한 편을 써도 될 만큼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하셨다. 아빠가 일 때문에 늦거나 외박이 생길 때마다 잠 한숨 못 주무시고 밤새 전전긍긍, 불안해했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남편 회식 날, 예상보다 귀가 시간이 늦어질 때 걱정이 불안으로 이어졌던 경험을 말했다. 나 역시 공감. 


"불안이 잘못된 감정은 아니잖아요."  그녀의 말이다. 맞다. 절로 생기는 감정을 어찌 잘못됐다 할 수 있을까. 단, 그 감정을 알아차리고 조절하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 불안이 커져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길 정도면 다른 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이 책을 보다 불안이라는 감정을 잘 표현한 그림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조미자 작가의 <불안>이다. 

  



#. 선택논제


공연장에서 돌아온 체르뱌코프는 아내에게 자신이 범한 행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내는 이 사건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그래도 남편에게 “당신이 가서 사과”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아내의 말에 찬성하시나요? (찬성한다/반대한다.)


집에 돌아온 체르뱌코프는 아내에게 자신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보기에 아내는 이 사건을 너무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중략)
“그렇더라도 당신이 가서 사과하세요.”(26~27쪽)


아내는 체르뱌코프의 사건(?)을 가볍게 받아들이면서도 왜 브리잘로프 장군에게 가서 사과하라고 했을까. 남편의 마음을 이해해서일 수도 있으나 그녀는 당시 계급이 명확했던 사회적 특성을 짚었다. 그렇더라도 누군가에게(설령 남편이라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탐탁지 않게 생각되기에 나는 아내의 행동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논제는 다음과 같다.


#. 자유논제


오페라를 보다 재채기를 한 체르바코프는 남에게 폐를 끼친 건 아닌지 걱정합니다. 그의 아내도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합니다. 여러분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의식할 때는 언제인가요?


체르바코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친 다음 예절 바른 사람답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재채기 때문에 남에게 폐를 끼친 건 아닐까?  (17쪽)

“그렇더라도 당신이 가서 사과하세요.”
그녀는 말했다.
“안 그러면 당신이 사람들 있는 데서 예절도 못 차린다고 오해할 테니!”   (27쪽)


내가 타인을 의식했던 경험을 별로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 그녀는 반대였다. 성장과정을 살펴보니 나는 도시에서, 그녀는 자기와 관련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누구네집 아이가 어떻더라~."는 소문이 마을에 퍼져 부담과 곤란함을 겪었던 시골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타인의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에 비해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무척 자유로웠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타인에 대한 배려와 마음 읽기로 모나지 않아 보인다면 나는 때론 하고 싶은 말을 거르지 않고 내뱉곤 해 가끔 후회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나이가 들고 보니 성장배경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작지 않음이 보인다. 

 

#. 선택논제


체르바코프는 오페라 공연을 보며 행복해했습니다. 그러나 재채기 한 번으로 행복은 사라지고 맙니다. 체르바코프를 불안하게 한 것은 브리잘로프 장군이 자신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지요. 만약 주변 사람들이 모두 체르바코프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면 체르바코프의 행동은 달라졌을까요?

- 달라졌을 것이다/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앞의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던 노인이 자신의 대머리와 목을 장갑으로 열심히 닦으며 뭐라 투덜거리는 것을 보았다. 체르바코프는 그 노인이 운수성에 근무하는 브리잘로프 장군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저분에게 침이 튀었어,’
체르바코프는 생각했다.
‘우리 부서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곤란하게 됐군.
사과를 해야지.’   (17쪽)


달라졌을 것이다. 그녀나 나나 같은 생각이다. 실제로 똑같은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아는 사람일 경우와 모르는 사람일 경우 반응은 180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운전을 하다가 어떤 사람이 말도 안 되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운전을 했다. 


1. 모르는 사람일 경우 : "저 사람 미친 거 아냐?", "헉! 왜 저런 식으로 운전을 하지??"

2. 아는 사람일 경우 : "어! 무슨 급한 일이 있나?", "무슨 사정이 있겠지.."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쉽고 어떤 면에선 비겁하고 얄팍한 존재가 아닐까. 

체르뱌코프씨, 브리잘로프 장군이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절대 마주치지 않을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불안에 시달리지 않았을까요. 


누구나 겪어보았을 불안과 집착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를 꺼내보게 한 안톤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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