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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 Jun 20. 2024

시간과 친구 하기

<독서정담 N번째 - 지금, 시간이 떠나요>

햇볕은 따갑고 살갗에 닿는 바람은 시원하다. 대지과 바람의 온도가 다르게 느껴지던 날, 그녀를 만났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시간에 쫓기듯 운전을 했다. 뙤약볕을 피해 나무 밑 그늘, 벤치에 앉아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초록초록한 숲 속 그늘 아래 앉아 있는 그녀를 보자 나의 시간은 어느새 차분해졌다.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눌 책은 '시간'에 대한 책이다. 독일 작가의 작품으로 <지금, 시간이 떠나요(베티나 오브레히트 글, 율리 푈크 그림/다산기획, 2022>, 그림책이다. 

  


보일 듯 말 듯, 알 듯 말 듯한 형상으로 '시간'을 표현한 그림이 독특하다. 라라와 시간은 친구 사이다. 라라의 할아버지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수학 퍼즐을 하고, 엄마와 아빠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텔레비전을 보고, 언니와 오빠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휴대폰 게임을 한다. '시간'은 더 이상 라라의 집에 머물고 싶지 않아 떠난다. 시간을 찾아 떠나는 라라, 라라는 시간과 동행하며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녀의 논제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유논제 1.


라라의 할아버지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숫자 퍼즐을 풀고 있습니다. 힘들게 왜 하느냐는 라라의 질문에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서라고 대답하자 시간이 인상을 찌푸렸지요. 시간이 인상을 찌푸릴 만한 행동을 한 적은 언제였나요?


할아버지는 숫자 퍼즐을 풀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퍼즐이 어려울 때마다 큭 한숨을 쉬었어요. 
“할아버지, 힘들게 왜 하시는 거예요?” 라라가 걱정스레 물었어요. 
“그게 할아버진 이렇게라도 시간을 보내야 한단다.” 
듣고 있던 시간이 인상을 찌푸렸어요.


"저는 핸드폰으로 게임을 했어요." 내가 먼저 운을 띄었다. 

"그런데 그 게임하는 시간이 게임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주로 머리가 복잡할 때 하게 되더라고요. 무엇인가를 잊기 위해 게임을 하며 시간을 버는 것 같아요."

생각 꼬리물기가 쉽게 멈춰지지 않을 때 게임을 한 적이 있다. 하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생각은 어느새 멈춰 있다. 문제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시간을 버는 느낌. 게임 멈추는 타이밍을 잘 맞췄다면 다행인데 그러지 못했을 경우가 문제다. 단순한 퍼즐 게임이어도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느껴지는 작은 쾌감 때문에 쉽게 멈추지 못했을 때, 시간은 인상을 찌푸린다. 

그녀는 풀을 뽑았던 경험을 얘기했다. 잡초다. 한참을 뽑고 나면 생각도 정리되고, 풀 뽑은 밭을 돌아보면 나름 뿌듯하고 성취감이 생겼다고 한다. 요즘엔 영화를 보기도 한단다. 


자유논제 2.


라라는 시간과 달리기를 합니다. 처음에는 라라가 앞서지만 결국 시간이 이기지요. 시간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습니다. 똑같은 속도로 꾸준히 갈 뿐이지요. 여러분은 시간을 이길 수는 없지만 시간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고 있는 일이 있나요? 즉, 어떤 일을 시작해서 꾸준히 했거나 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그럼, 시작!” 시간이 소리치자, 
라라와 시간은 달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라라가 앞서 달렸어요. 
시간은 절대로 빨리 뛰지 않았어요. 
시간이 피곤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라라는 금방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라라가 뒤처지자, 시간이 라라를 앞서기 시작했어요. 
결국 시간이 이겼어요.


오래전 정년을 앞둔 주무관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돌이켜보니 결국 인생은 습관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스치듯 떠오르는 깨달음. 

결국 읽는 습관, 먹는 습관, 자는 습관, 말하는 습관... 그것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습관은 어느 노래가사처럼 '무서울 때'도 있고, 답답할 때도 있는 것일까. 

한번 들인 습관을 고치거나 새로운 습관을 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과 어깨동무를 하고 꾸준히 했던 일. 떠오르는 일이 없자 그녀가 말한다.

"선생님이나 저나 변함없이 어린이 책을 꾸준히 읽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건 일이기 때문이잖아요."

"일이어도 어린이 책에 별 관심 없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그렇다. 그녀나 나나 꾸준히 관심을 갖고 읽고 살펴보는 어린이 책, 벌써 수년 째다.

현재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을 어린이책에서 배웠다는 말을 공통분모처럼 갖고 있는 그녀와 나는 그 매력에 빠져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나의 선택논제.


할아버지는 ‘이렇게라도’ 시간을 보내고, 엄마와 아빠는 시간을 때우고, 언니와 오빠는 시간을 죽이는 중입니다. 가족들 모두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거나 죽이고 있어요. 더 이상 라라의 집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한 시간은 떠납니다. 시간을 유의미한 시간과 무의미한 시간으로 나누는 것에 찬성하시나요? (찬성한다/반대한다)


“그게 할아버진 이렇게라도 시간을 보내야 한단다.” - 숫자 퍼즐을 푸는 할아버지 
“아니, 중요한 경기는 아니야. 그저 시간을 때우는 중이지.” -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와 아빠
“우린 지금 시간을 죽이는 중이야.” - 휴대폰 게임을 하는 언니와 오빠


어떤 시간에서든 무엇을 선택했든 간에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있음을 알기에 의미 없는 시간은 없지 않을까. 젊은 시절의 그녀라면 유의미한 시간과 무의미한 시간을 나누는 것에 찬성했을 거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젊은 시절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 것 같으면 자괴감에 빠져들기도 했다. 몸과 마음을 돌볼 여유 없이 내달렸던 수많은 나날들이 순간 스치듯 떠올랐다. 그렇게 보낸 과거의 시간들이 있기에 지금의 시간이 그나마 영글어가는 걸까. 현재의 시간은 숨 가쁘게 지냈던 과거의 시간을 거쳐야만 하는 걸까.  

  

나의 자유논제.

시간과의 달리기 시합에서 져 속상한 라라에게 시간은 업어준다고 합니다. 이 내용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화내지 마, 라라.” 시간이 말했어요. 
“대신에 네가 원한다면 널 업어줄게.”


시간에 기대던 때가 있었다. 특히 나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다. 나를 포함한 가족 누군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중요한 결과를 기다릴 때 등. 그럴 때면 나를 업고 달리는 시간이 얼마나 고맙던지. 

"시간이 약이다, 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다. 




<지금, 시간이 떠나요>는 시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라라는 시간과 친구가 되었다. 시간은 정말 그렇다. 친구처럼 오랜 시간 공을 들일수록 배신하지 않는다. 친해지면 깊어지고 의지하게 된다. 나 역시 시간과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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