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1월 ~ 4월 - 카르스(Kars)
- 눈의 왕국 카르스의 겨울은 예상했던 대로 무척이나 추웠다. 1월이 되자 최저기온이 영하 30도 가까이 떨어지는 나날이 이어졌다. 날씨가 이렇게 춥다 보니 집 안의 유일한 난방 기구인 라디에이터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한밤중에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금 이불의 매무새를 고쳤고 너무 추우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침낭을 꺼내 그 속에 파묻혀 잠이 들었다.
나는 때때로 오밤중에 마법과 같은 힘에 이끌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창문 커튼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창문 너머의 바깥세상을 바라보았다. 바깥에는 어느새인가 소리소문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카르스의 눈은 가랑눈처럼 입자가 작고 가늘었다. 어둠의 정적 속에서 가로등 불빛 아래 휘날리는 눈은 마치 별이 쏟아지는 듯 아름다웠다.
이곳에서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이렇게 눈이 왔다. 일단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그건 세상을 하얗게 물들일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마치 천사의 날개가 대지를 감싼 듯 온 세상이 하얬다. 아직 사람의 때를 타지 않은, 아침햇살 아래의 눈은 알프스에서 봤던 그것처럼 너무나도 깨끗하고 순결해 보였다.
겨울잠을 자는 듯 모든 게 멈춘 카르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걷는 것만이 유일하게 이 눈 덮인 도시와 함께 호흡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겨우내 밑창이 너덜거리는 여름용 신발을 신고(신발이 이것밖에 없었고 집에 돌아갈 때까지는 신발을 사지 않기로 했다) 카르스의 거리를 부지런히 걸었다.
대문을 나선 후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언제나 손으로 눈을 가리는 것이었다. 하얀 눈에 반사된 태양빛이 너무나도 밝아서 눈을 제대로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사는 곳은 도심 외곽에 있었기에 조금만 걸어가면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눈 덮인 들판이 나타났다. 눈 위에는 사람이나 동물이 지나간 어떠한 흔적도 없었다. 내 발자국이 이 새하얀 눈 위에 남겨질 유일한 흔적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자 내 마음은 아이처럼 설레었다.
잔인할 정도로 고요한 풍경 속, 시선의 끝에는 언제나 설산이 있었다. 산이라고는 해도 그 봉긋한 모습을 제외하고는 산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어떠한 특징도 찾아볼 수 없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으로 덮여 있던 산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저랬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하나의 거대한 눈 그 자체였다.
도심 속 풍경은 들판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집집마다 처마 끝에 뾰족한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어떤 것은 그 길이가 일 미터에 달할 정도로 길고 굵었다. 행여나 저런 것이 머리에 떨어진다면 머리에 구멍이 뚫릴지도 모를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지 한 아저씨는 무심결에 고드름 밑을 걸어가고 있던 내게 머리 위를 조심하라고 일러주기도 했다.
도심의 눈은 한낮의 햇볕이나 자동차의 열기 따위로 서서히 녹다가 눈이 오면 다시 쌓이기를 반복했다. 햇볕이 유난히 강한 날에는 처마에서 눈이 녹으면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지상에 쌓인 눈은 서서히 기화되면서 온천수처럼 뿌연 수증기를 내뿜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지구가 숨을 쉬는 듯 신기해 보였다.
이 모든 건 하나의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했지만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눈이 녹으면서 거리가 진창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때로는 진창을 피하려고 곡예를 하듯 지그재그로 걸었고 때로는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거위처럼 뒤뚱뒤뚱 걸었다. 하지만 이런 불편 따위 살인적인 물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름과 비교하여 청과물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의 장바구니는 가볍다 못해 홀쭉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름처럼 엄청난 양의 청과물을 사가는 광경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겨울에는 아마 카르스 전체의 무게가 '카르스 인구 x 2kg' 정도만큼은 줄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독한 겨울을 맞아 카르스의 산천과 들판을 점령하던 소와 양, 거위 등의 가축들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녀석들은 아마 축사 안에 옹기종기 모여 건초와 사료를 먹으며 겨울을 나고 있을 테지. 추운 겨울에는 태어나자마자 얼어 죽는 새끼나 병에 걸리는 가축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하지만 가축들의 생존과 번영이 사람들의 생존과 번영에 직결되는 만큼, 녀석들은 사람들의 보살핌 속에 어찌어찌 살아남을 테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사람들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카르스의 들개였다.
터키의 들개가 아무리 크고 강인하다지만 영하 30도 가까이 내려가는 날씨는 녀석들에게도 가혹한 시련이었다. 이 도시에서 밤의 정적을 깨는 건 오로지 두 가지였다. 바람소리와 들개 짖는 소리.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날씨가 추워질수록 들개 짖는 소리는 더더욱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거 같았다. 녀석들은 기온이 떨어지는 밤에는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동사를 면했고 낮에는 양지바른 곳 내지 폐건물에서 휴식을 취했다. 가난한 도시, 카르스에는 버려진 폐건물이 많았는데 이런 곳은 들개들의 거처로 활용되곤 했다.
투르크메니스탄 친구들은 두라크(러시아의 유명한 카드 게임)를 하거나 ‘해신 장보고’, ‘주몽’ 등 한국 사극을 보며 빈둥대다가 돈을 벌러 다시 이스탄불로 떠났다. 그러자 북적북적하던 집은 명절을 맞아 찾아온 친척이 떠나간 집처럼 썰렁하고 조용해졌다. 홀로 남은 나는 하루하루 바쁘게 보내려고 노력했지만 이따금 지루함에 몸부림을 쳤다. 새롭게 발견한 체스라는 취미도, 독서도, 영어 공부도 나의 지루함을 다 떨쳐버릴 순 없었다. 시간이 내 손가락 사이로 하염없이 새어 나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추운 겨울이 어서 끝나고 다시 자전거를 탈 수 있기를 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