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라사에서 라마단 보내기
터키(D+418) 라마단 - 마드라사(Madrasah)
- 이슬람 최대의 축제인 라마단이 다가왔다. 나는 작은 가방에 속옷과 여분의 옷, 세면도구 등 필요한 짐을 챙겼다. 오늘부로 나는 지금 지내고 있는 집을 떠나 마드라사로 간다. 마드라사는 수도원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는 이슬람의 교육 기관이다. 그곳에서 생면부지의 무슬림들과 함께 난생처음으로 금식을 하며 라마단을 보낼 예정이었다.
약 일주일 전, 나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26살의 젊은 청년, 에네스를 만났다. 그는 대학교에서 영어교육학을 전공하고 있어서 영어를 잘했고 우리는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에네스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내게 그가 살고 있는 마드라사를 소개해 주었다. 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그 마드라사는 널찍한 마당이 있고 페인트로 파랗게 칠한 벽이 인상적인 4층짜리 건물이었다. 내부는 채광이 잘 되고 깨끗하며 안락했다. 종교 교육 기관인데도 불구하고 딱딱하지 않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데 그건 순전히 그곳에서 지내는 털털한 무슬림 덕분이었다. 나는 차를 마시며 사람들과 대화를 했고, 특히 에네스로부터 이슬람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 뒤, 그는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마드라사에서 우리와 함께 라마단을 보내는 건 어때? 금식을 하는 게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숙박이랑 음식은 무료로 제공되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이슬람에 대해서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게다가 공짜 음식까지! 가뜩이나 따분해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건 일석삼조의 기회였다. 다만, 마음 한편으로는 심각한 저체중인 내가 팔자에도 없는 금식을 하다가 뼈만 남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부엌에서 냉장고를 열어 본 나는 마음을 굳혔다. 냉장고는 오늘도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함께 살고 있던 투르크메니스탄 친구들은 겨울 동안 일을 하지 못해 호주머니 사정이 안 좋았다. 음식을 살 돈도 없었던지 우리는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으며 생을 연명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이 집에서 서서히 살아 있는 해골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짐을 챙겨 마드라사로 향했다.
마드라사에서의 경험을 얘기하기 전에 잠시 라마단에 대해서 알아보자.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제9월을 뜻하며 무슬림이 꼭 지켜야 할 이슬람의 다섯 기둥 중 하나이다. 라마단은 보통 매해 한 번씩 30일 동안 이어지는데 라마단 기간 중 무슬림은 해가 떠 있는 동안 금식을 하고 성행위와 담배 등을 금한다.
라마단의 가장 실천적인 부분은 단연코 금식이라 할 수 있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1,600년 전 이슬람이 창교된 이래 신분과 계급, 빈부 등을 떠나 모든 무슬림은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했다. 한때 전 세계를 호령하던 오스만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술탄조차 길바닥에서 살아가는 가장 가난한 사람과 동일하게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음식은커녕 물조차 입에 대지 않았다.
금식을 통해 무슬림은 가난한 자, 억울한 자, 고통받는 자, 배고픈 자 등의 어려움을 잠시나마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절제와 과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진정한 영적 공동체를 이룩하고자 했다. 비록 세상에 태어난 조건과 모습은 모두 다르더라도 신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에네스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나를 거실로 안내했고 곧 기도를 드려야 하는 시간이라면서 나를 홀로 남겨두고 사라졌다. 나는 거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종교 관련 서적을 훑어보며 시간을 때웠다. 대부분 사이드 누르시(Said Nursi, 1876 ~ 1960)의 책들이었다. 사이드 누르시는 오늘날 터키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이슬람 학자이다. 그는 이슬람을 근대적인 삶에 부합하도록 갱신하고 꾸란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고전임을 증명하고자 6,000쪽의 역작, ‘빛의 책’을 집필했다. 이 마드라사의 무슬림은 그의 가르침을 토대로 이슬람을 공부했다.
나는 한참 동안 거실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장내는 신자들이 기도하고 공부하는 곳답게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너무나 조용한 나머지 과연 건물 크기에 걸맞은 충분한 사람들이 있을까, 라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의구심은 나의 기념비적인 첫 번째 이프타르가 찾아왔을 때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이프타르(Iftar)는 라마단 기간 중 해가 지고 나서 먹는 저녁 식사를 말한다. 이 기간에 이슬람 국가의 식당에 가면 무슬림들이 저녁 식사를 앞에 두고 시계만 주시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다 같이 식사를 시작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텅 빈 깡통인 줄 알았던 마드라사에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었던지 이프타르 시간이 되자 거실 겸 식당에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수가 얼핏 봐도 스무 명은 넘을 거 같았다. 터키인들은 그렇다 치고 흑인과 아랍인 그리고 나와 비슷한 아시아인까지 국적도 인종도 가지각색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위해 준비된 음식만큼 나를 놀라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바닥에 차려진 음식이 얼마나 성대하던지 임금님 수라상 저리 가라 할 정도이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 터지게 먹고도 남을 정도로 양도 엄청나거니와 종류도 다양하고 어느 것 하나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고기 요리, 야채 요리, 국물 요리, 밥 요리, 샐러드, 빵 그리고 디저트까지 터키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음식이 눈앞에 있었다.
비스밀라(‘알라의 이름으로’란 뜻으로 보통 식사 전에 말함)와 함께 시작된 식사 시간은 매우 활기찼다. 금식에 대한 보상은 달콤했다. 음식 맛이 아주 기가 막혔다. 일 년 넘게 터키를 여행하면서 이런저런 향토 음식을 많이 먹었지만 단언컨대 이보다 맛있는 음식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음식을 함께 나눠 먹을 사람들과 공복이라는 최고의 조미료 그리고 공짜라는 행운까지.
이프타르와 달리 동트기 직전에 먹는 아침 식사, 수후르(Suhur)는 비교적 소박했다. 한참 꿈속을 헤매다가 새벽 4시쯤 일어나서 먹는 아침 식사는 결코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다들 게슴츠레한 눈으로 좀비처럼 걸어 들어와서는 말없이 먹고 사라졌다. 하지만 이프타르 시간에는 라마단 기간 내내 위와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지역 주민이 무료로 제공해 준다는 음식은 메뉴가 날마다 바뀌어서 결코 질릴 일이 없었다. 술탄이 부럽지 않은 상차림 속에 금식으로 시작한 하루는 결국 포식과 폭식으로 끝이 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15시간 동안의 금식이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었다. 일단 몸이 그 흐름에 적응하고 나자 물 한 모금 없이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나중에는 한낮의 땡볕 아래 달리기를 하는 등 운동을 해도 멀쩡했으며 오히려 금식을 통해 더 건강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금식을 통해 가난하고 아프고 배고픈 자들의 어려움을 체험하려는 게 아닌가? 그런데 지금 내 모습이란 하루 종일 빈둥대다가 때가 되면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상에 숟가락을 얹히는 한량과도 다름없었다. 금식을 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나는 내 33년 인생의 가장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과연 이래 가지고 라마단의 본래 의의를 실천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닌, 풍족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 무슬림이 가진 공통된 문제이기도 했다. 라마단 기간 중 망가진 생활 패턴이나 폭식으로 인해 건강을 해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회교도인 호자는 나에게 이렇게 일러주었다.
“라마단 기간에도 평소처럼 먹는 게 중요해. 배가 고프다고, 음식이 맛있다고 해서 너무 많이 먹으면 일을 그르치게 되지.”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음식에 대한 내 태도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일은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나를 유혹하는 건 비단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나를 끊임없이 유혹했다. 그들은 먹는 속도가 느려서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음식이 남으면 처치하기 곤란하니까 천천히 다 먹어야 해. 이것도 남은 한 숟가락 마저 먹지 않을래? 옳지! 잘 먹으니까 참 보기 좋네.”
나이 서른이 넘도록 사람들의 칭찬 앞에서는 사족을 못쓰던 나였다. 나는 결국 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며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게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께서도 이런 나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라마단을 보내기 위해서 이 마드라사에 온 외부인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 세계 각지로부터 먼 길을 날아왔다. 말레이시아, 카자흐스탄, 시리아, 예멘, 모리타니, 카메룬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온 나까지. 우리는 피부색도 언어도 모두 달랐다. 어느 날, 나는 굉장히 이국적으로 보이는 친구에게 너는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고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렸냐고 물었다. 그는 자기는 터키인이고 바로 옆동네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왔다고 말했다. 미국처럼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터키에서는 이런 웃지 못할 일도 가끔 일어났다.
다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때면 터키어와 아랍어를 중심으로 프랑스어, 중국어 그리고 순전히 나 하나 때문에 영어가 쓰이는 등 다양한 언어가 교차했다. 의사소통의 어려움 따위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금식과 금욕을 하는 특수한 상황과 따뜻한 차 한 잔은 우리 모두를 상하관계가 없는 군대처럼 하나로 통합시켰다.
무슬림에게 형제는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혈연관계, 둘째로 전 세계 모든 사람들 그리고 셋째로 이슬람이라는 깃발 아래 뭉친 사람들. 세 번째 의미의 형제가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데 이런 맥락에서 마드라사의 사람들은 모두 진정한 형제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한 지붕 아래 함께 숙식하면서 기도와 공부, 토론에 매진했다. 하루에 한 번, 다 같이 둥글게 모여 앉아 차를 마실 때면 웃음과 농담, 서로에 대한 격려의 말이 끊이지 않았다. 대머리 남자들만이 서로 잘 지내는 건 아니었다. 예언자 무함마드를 본받아 수염을 기르는 이 털북숭이 남자들도 대머리 남자들 못지않게 화기애애하게 잘 지냈다.
나는 이곳에서 유일한 비무슬림이었다. 그 많은 무슬림 속에서도 나는 이곳을 집처럼 편안하게 여겼는데 그 이유는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은 결코 나에게 이슬람을 가르치려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이슬람은 평등의 종교라고 한다. 나와 그들의 관계는 ‘비무슬림-무슬림’이나 ‘학생-선생님’ 따위가 아닌 ‘사람-사람’의 평등한 관계였다.
단, 스스로 궁금해서 질문을 하면 그들은 ‘옳거니’라며 수많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꼴이었다. 나는 말 한마디 내뱉었다가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가만히 앉아서 상대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종교적이고 현학적인 내용을 나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어떨 때는 너무 노력한 나머지 증기기관차처럼 그들의 정수리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 나오기도 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호자는 누구보다도 많은 증기를 뿜어낸 나의 과외 선생님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자진해서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이프타르가 끝나고 이샤(Isah, 무슬림이 하루에 올려야 하는 다섯 기도 중 마지막 기도)가 시작되기 전, 우리는 차를 마시며 종교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내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수없이 많은 물음표 속에서도 가장 큰 물음표는 역시 사후 세계에 관한 거였다.
이슬람에 따르면,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의 날에 약속의 장소에 모이게 된다. 그곳에서 신을 얼마나 믿고 사랑했으며 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따랐는지 등에 의해 천국행 또는 지옥행이 결정된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과연 내가 운이 좋아서 천국에 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나는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지옥에 가게 된다면 그 사실을 알고도 나는 홀로 천국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내가 이곳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예를 들면 '이슬람을 알고도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간다'라는 것 등) 내가 사랑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지옥에 갈 확률이 높았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부적절하고 옳지 못한 일이기도 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본인의 자유의지가 아닌, 지극히 선천적이고 인간적이며 사회/문화적인 자연스러움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그들에게 앞으로의 운명을 뒤바꿀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떡하란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 세상을 떠난 몇몇은 이미 지옥의 불바다에서 고통받고 있을 게 분명했다.
호자는 이렇게 말했다.
"천국에 불행이란 존재하지 않고 신은 전지전능하지. 신께서는 어떤 식으로든 네가 천국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해주실 거야."
그러나 나는 끝끝내 그 말에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차라리 사후 세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사후 세계를 부정한다면 현세에서 평생 가난하고 아프고 억압받고 고통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삶은 영영 구원받지 못하겠지만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죽어서까지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누군가는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하고 누군가는 지옥에서 영원히 불행한, 가장 명확하게 분리되고 끔찍하며 차별이 만연한 세상을 말이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내게는 사후 세계보다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게 더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모두가 함께 ‘꿈을 꾸지도, 깨지도 않는 잠’이라는 영원한 안식에 드는 것이 가장 평등하고 행복한 최후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의 생각이란 천차만별이었다. 내가 이런 의견을 표하자 시리아에서 온 살라딘은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건 지옥에 빠지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또한 언제부터인가 하루의 마지막 예배인 이샤에 참가했다. 라마단 기간의 예배는 평소보다 더 길게 행해지는데 걔 중에서도 이샤는 무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라마단 기간에 행하는 모든 선행, 즉 신을 기쁘게 하는 일들은 평소보다 두 배의 가치가 있다는 데 이렇게 긴 예배 시간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었다.
예배는 어렵지 않았다. 줄을 맞추어 가만히 서 있다가 사람들을 따라서 절을 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물론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며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는 동안 신을 찬양하고 자신의 언행이나 마음가짐을 참회했겠지만 나는 달랐다. 이런 정적인 활동은 내게 맞지 않았다. 한동안 나는 도무지 잡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오늘 저녁은 뭘까?’, ‘파리는 얼마나 살 수 있을까?’ 등 쓸데없는 생각이 나를 못살게 굴었다.
하지만 행동은 사고(思考)의 틀을 빚는 법이다.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에도 평화와 안식이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건 비록 영적 체험까지는 아니었지만 명상과 침묵이 가져다주는 긍정과 치유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 시간을 통해 누군가에 말마따나 쉴 때조차도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조급함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참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자신의 언행과 마음가짐을 뒤돌아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나는 이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언제나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희망했는데 침묵 속에서 나를 돌아보는 일이야말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예배에는 누군가 앞으로 나와서 꾸란을 암송하는 과정이 있었다. 나는 여기서 하피즈(Hafiz)의 존재를 알았다. 하피즈는 글자 수만 77,430개인 꾸란 전체를 암송하는 자를 말한다. 긴 가사를 자랑하는 랩 한 곡이 보통 400~500개의 글자로 되어 있으니 77,430개가 얼마나 많은 글자 수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리라.
하피즈는 이슬람 세계에서 굉장한 존경을 받는다. 모리타니에서 온 무함마드는 하피즈였다. 그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넘은 젊은 친구였지만 동시에 ‘기도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다’라고 말할 만큼 신실한 무슬림이기도 했다. 그는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서서는 십 분이 넘어가도록 막힘없이 꾸란을 암송했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대로 아랍어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일지도 몰랐다. 시를 낭송하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에 내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무함마드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꾸란 전체를 암송할 수 있는 거야?”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야. 꾸준히만 하면 말이지.”
“어렸을 때부터 배운 거야?”
“응. 여섯 살 때부터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꾸란을 암송했어. 하루에 십 페이지씩 외우니까 꾸란 전체를 훑는데 한 달이 걸렸어. 그렇게 사오 년 정도 꾸준히 반복하니까 꾸란 전체를 암송할 수 있게 되더라고.”
그런가? ‘마틸다’ 같은 비범한 기억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닌 인내와 노력의 문제였던가? 생각해 보면 인내와 노력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는 많이 있었다. 내가 10,000km 가까이 달려서 터키를 한 바퀴 돌 수 있었던 것도 멈추지 않고 끈기 있게 페달을 돌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페달 한 번 돌리기가 천근만근 힘겨운 순간도 있었지만 삶의 진리란 어쩌면 이리도 단순한 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드라사에서의 한 달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터키 최대의 명절 중 하나인 라마단 바이람마저 끝이 나자 마드라사의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나에게 가장 많은 가르침을 준 말레이시아에서 온 호자 또한 떠나는 날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떠나기 이틀 전,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건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두호. 그동안 이슬람에 대해서 많이 배웠잖아. 꾸란도 읽고 예배에도 참가하고 금식도 경험해 보고. 그래서 말인데 혹시 원한다면 모두의 앞에서 무슬림이 되는 의식을 치르지 않을래?”
나는 그 자리에서 ‘아니오’라고 말했다. 그건 매우 정직한 대답이었다. 마드라사의 사람들은 기회가 생길 때면 나에게 신의 존재를 설파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최대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사람의 머리는 어찌할 수 있어도 가슴은 어찌할 수 없는 법.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게 ‘그래, 나 오늘부터 신을 믿을 거야’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현재로서는 내가 여전히 무신론자에 가깝다는 걸 나 자신뿐만 아니라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었다.
호자는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내 결정을 이해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호자에게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던 건 신을 믿고 싶어서가 아닌, 정말로 순수하게 무슬림의 삶과 가치관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더욱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작가, ‘카렌 암스트롱’이 말한 대로 타인의 고귀한 신앙에 불신과 편견, 무지를 심지 않기 위해 이슬람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게 있다. 나는 이곳에서 분명히 신의 존재를 느꼈다. 그건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의 입에서 발현되는 그 모든 종교적이고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설명으로부터가 아닌 그들이 전혀 의도치 않은 것으로부터였다. 매일 밥만 축내던 나를 넓은 가슴으로 받아준 그들의 호의에서, 모르는 것 투성이며 이슬람의 가르침에 반하는 사소한 실수를 남발하던 내게 보여준 그들의 관용에서, 나를 형제라 부르며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준 그들의 친절과 포용력에서 나는 신의 존재를 느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그건 즉, 우리 안에도 신이 존재함을 뜻한다. 사랑으로 가득 찬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씨 말고 그 무엇이 우리 안에도 신의 거룩한 손길이 머물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나는 마드라사를 나오면서 모두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서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웃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들에게 전한 작별 인사말에서 나는 내가 그들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그럼 다들 건강하고 잘 지내. 인샬라(Inch'Alla, 신의 뜻대로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