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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망 Oct 17. 2021

입 속의 지퍼

에세이

몇 주 전 왼쪽 볼에 입병이 났다. 지긋지긋한 입병… 어쩌면 과일을 좋아하지 않으니 입병이 이렇게 자주 나는 것은 당연할 건지도 몰라, 이번 입병도 며칠 있으면 낫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나는 한동안 방치되어 있던 비타민 C를 다시 열심히 챙겨 먹었다. 하지만 이번 입병은 일주일이 지나도 낫지 않았다. 게다가 그 기간 동안 점점 커져서 거슬리다 못해 아팠다.


입병이 난지 한 일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저녁, 나는 결국 핸드폰 후레시를 켜고 거울을 보며 열심히 입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입병은 안 쪽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입 벽면으로 하얀색 가로 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조커의 흉터가 입 안에라도 난 것처럼 생긴 그 줄은, 입 벽면 양 쪽 모두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몇 년 전 요리를 하다 손을 깊게 베여 꿰맸던 흉터 비슷하게 생기기도 했다. 혀로 더듬어 보니 진짜 흉터처럼 살짝 튀어나와있기도 했다.



문득 어렸을 때 하던 상상이 떠올랐다. 쌍둥이 동생과 함께 목욕을 할 때면 나는 동생의 몸을 구석구석 유심히 살펴보며 ‘지퍼' 혹은 ‘꼬맨(꿰맨) 자국'을 찾곤 했다. 7살의 나는 동생이 사실은 괴물일지도 몰라, 괴물이 동생의 탈 안에 들어간 거고 모두가 잠든 밤에 지퍼를 열고 나올지도 몰라, 이런 상상을 했었다. 그런 상상을 했지만 무서워하진 않았다. 나는 동생을 사랑했고, 동생도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상상력은 동생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선명했기 때문에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목욕할 때마다 동생의 몸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나는 동시에 내 몸도 살폈다. 내가 볼 수 있는 몸의 부위는 가슴, 배, 팔, 다리에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거울에 비춰보며 얼굴을 열심히 보고, 짧은 고개를 꺾어가며 등 구석구석을 살펴보려 애썼다.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이 괴물인 걸 모르는 괴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피부 껍데기를 뒤집어쓴 괴물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깨어있을 때는 모르지만, 잠이 들면 안에 있는 괴물이 깨어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 나는 목욕을 할 때마다 동생의 몸과, 내 몸을 유심히 살폈다.



입 안을 볼 생각은 못했네, 오랜만에 떠올린 기억에 웃음이 비져나왔다. 어렸을 때 이 줄을 봤다면 내가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더 커졌을 것이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유년시절의 상상을 떠올려서 그런지 갑자기 얼굴이 낯설어 보였다. 살면서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세상을 보는 방식이 1인칭 시점이라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고, 거울이나 반사적인 표면이 없었다면 나는 평생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지, 그럼 내가 거울을 볼 때마다 사실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여주는 프로그램 같은 것이 있다면? 나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내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얼굴뿐만 아니라 손, 발, 다리, 가슴 같은 몸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져서 신체의 움직임을 즉시 멈추고 손가락 끝만 미세하게 움직여보고, 이 정도로 정교한 신경 전달 과정과 움직임을 프로그래밍하는 건 불가능할 거야, 하며 다시 안심하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7살의 내가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 매번 몸에서 지퍼를 찾았던 것처럼, 어른이 된 나 역시 말도 안 되는 상상임을 알면서도 입 안에 있는 하얀 줄이 진짜 꿰맨 자국이고, 내가 원래 이 육체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이 육체에 이식된 존재일 가능성을 생각하며 그것의 정체를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허무하게도, ‘입 안 하얀 줄'을 검색하니 스크롤 몇 번만에 찾던 정보가 나왔다. 그것은 ‘백선'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인터넷 기사는 그것이 입을 꽉 물거나 이를 가는 습관에 의해 생기는 흔한 증상이라고 했다.


나는 살짝 실망한 채, 요즘 내가 이를 꽉 깨무나, 이거 습관적인 거면 이에 엄청 안 좋을 텐데, 등의 생각을 하며 약통에서 알보칠을 찾았다. 그리고 그 새빨간 약으로 입병을 지진 후, 양치를 하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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