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치리치 Oct 19. 2021

멀리서 보는 결혼이야기

   내 친구는 결혼을 했다. 추석에 친구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시어머니와 음식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한다.

 

   친구의 결혼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맏며느리가 된 막내딸'이다. 친구의 결혼은 친구의 삶을 크게 변하게 하지 않았다. 아이를 둘이나 낳았지만 친구는 결혼하기 전과 비슷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친구가 결혼했다는 걸 잊는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음식 준비’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 얘 결혼했지?’ 라는 생각이 아차하고 들었다. 근데 내 친구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요즘은 결혼을 해도 사람들의 일상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친구를 보면서 '저런 거면 꼭 결혼이 필요한 건가?' 라는 생각을 평소에 했었다.


   기혼 여성이 된 친구에게서 듣는 시어머니라는 단어 역시 ‘결혼이 필요한 건가?’ 라는 생각을 더욱 증폭시켰다. 결혼에 딸려오는 인간관계에 대한 혼란과 더불어 시어머니라는 명칭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무척이나 밝고 명쾌한 아이다. 그런 내 친구가 결혼을 하고 시댁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 미안해 통화 괜찮아?"          

 

 "응, 괜찮아 어머니가 애들 보면서 쉬라고 하셨어."     

 

   시어머니의 괴롭힘이랑은 전혀 관계가 없는 목소리로 밝게 대답하는 친구의 목소리에 나는 내가 막장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친구는 시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 어른의 말씀은 나의 편견을 뒤흔들었다.


   옛날 어른들은 자식이 많아서 며느리 귀한 줄을 모르고 시집살이를 시켰던 거다. 난 아들 하나에 며느리도 하나인데 하나뿐인 며느리 시집살이 시키면 안 된다. 그리고 친구는 허허실실 웃으며 정말로 시어머니는 본인에게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는다며 시댁이 꼭 어렵고 부담스러운 건 아니라고 말을 붙인다.      

 

   친구의 말을 들은 나는 ‘얘는 고부갈등 걱정은 할 필요가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시어머니는 20대 초반에 결혼을 했고 그 어린나이에 뭘 알았겠느냐. 하루에 세 번꼬박 10인분 이상의 식사를 준비하고 시댁식구들 사이에서 아웅다웅 그렇게 사셨다고 한다. 그랬던 시어머니는 아내 엄마 며느리 아주머니 새언니 동서와 같은 또 다른 이름으로 30년을 넘게 살았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시어머니가 되었다.           

 

   친구의 시어머니에게 시간의 흐름은 야속할까? 개운할까? 근데 이건 또 다른 생각이긴 한데 전형적인 막내딸인 내 친구 같은 캐릭터가 본인의 며느리로 들어올 거란 생각을 한번이라도 해보신 적은 있으실까? 시집살이를 안 시키시는 걸까 못 시키는 걸까? 요즘은 시집살이 문제보다 며느리 눈치를 더 본다고 하던데 불현듯 친구의 시어머니 마음이 궁금해진다.          

 

   결혼을 안 해본 나는 결혼을 격어보지도 않고 시댁에 부정적인 생각부터 하고 있었는데 막상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는 내 친구는 너무도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본인의 삶을 타인과 함께 살고 조율해가는 삶을 선택한 용감한 친구에게 잠시 부러움이 스친다.               


   친구는 말한다. 남들이랑 비교할 필요 없다고 남들이 하는 거 다하고 사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고 그냥 내가 사는 방식으로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주변은 변해간다. 무덤덤하고 재미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아등바등거리는 거 보단 그게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친구의 이야기는 명절날 듣는 교훈 느낌이었다. 사람이 어떤 상황이든 직면하게 되면 뭐든 다 하게 된다고 하던데 맑기만 하던 내 친구는 정말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 나보다 너는 많이 어른이 되었다.

        

   친구는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가 둘 다 미혼일 때 비슷한 시각으로 결혼을 바라보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와는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 친구다. 친구는 스스로 본인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 방법을 알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얼마나 많은 담금질을 했을까? 내 친구는 누군가는 한도 끝도 없이 예민해지는 타인의 말과 행동을 본인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바꾸며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친구도 많지 않은 나에게 이런 친구가 있다니 어쩌면 나는 인복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