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개명과 함께 왔다
나는 그냥 전화를 걸었는데 친구의 푸념이 통화의 주제가 될 때가 있다.
특히 친구의 시댁 행사가 끝나고 나서는 푸념이 정점을 맞이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기억이 나는 내용은 시아버님의 환갑 이후의 푸념이었다.
"내가 살다 살다 이런 행사의 리더가 될지는 몰랐어. 그리고 너 그거 알아? 사방 천지에서 나를 부르는데 무슨 명칭이 그렇게 다양하냐? 야. 나 진짜 정신없었어. 너 '질부'라고 들어 봤어? 아니 작은어머님이 부르시는데 나는 난 줄 몰랐잖아. 그래서? 그래서는 뭐긴 뭐야 젊은 애가 귀먹었냐고 그러시던데?"
이건 울어야 하는 이야기 인지 웃어야 하는 이야기인지, 나의 맑은 영혼 나의 친구여 왜 그리도 일찍(?)시집을 가였느냐. 내가 너에게 해줄 말이 없단다. 왜냐면 나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친구의 푸념을 듣는 나는 어느 부분의 초점을 두고 맞장구를 처주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이래저래 듣기평가와 같은 느낌에 통화를 마치고 나서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전에 한 번은 친구가 술을 한잔 했는지 조금 슬픈 목소리로 전화해서 본인의 이름 좀 불러 주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결혼을 했더니 왜 아무도 본인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느냐며 본인도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한탄을 한 적이 있다.
친구는 시댁에서는 본인의 이름을 일 년에 열번도 못 듣는 것 같다고 말한다. 친구가 일 년 정도 시댁에서 산적이 있는데 그때 친구에게 온 소포를 잃어버리는 일이 허다했다고 한다. 어른들이시니 이름은 안 부르시고 '누구 엄마야.' '얘야.' 이런 식이니 누구 하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해 주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이런 일이 있을까 싶을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에 듣고는 ‘에이 설마.’ 했다. 근데 친구한테 그렇게 말하면 된통 혼난다. 알지도 못하면서 의심만 한다면서 버럭 한다. 그래서 친구는 종종 나에게 버럭버럭 한다. 결혼을 한 친구의 삶은 변하기도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그리고 본인을 찾은 것 같기도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행복을 말하고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그 행복의 반대편에는 갈등도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과는 다른 방향의 행복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성 결론을 지어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름이 있는데 결혼을 하면 여자든 남자든 관계에 따라서 왜 호칭이 바뀌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궁금하기는 한데 딱히 뭘 찾아봐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인생 좀 살았다는 선생님이랑 이야기를 해봤는데 들은 이야기는 “족보로 내려오는 가족 관계이고 이름보다는 호칭을 부르는 게 익숙한 사회라서 그런 거다” 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데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냥 결혼을 하고 얻어진 이름이 내 친구의 이름을 기억 속에서 지운다는 게 문제지. 굴러온 호칭이 30년도 넘게 박혀 있던 내 친구의 이름을 밀어낸다.
우리 삶이라는 건 어쩌면 불러 주는 이름에 따라서 그 삶이 더 뚜렷해지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 불러주는 대로 그 자리에서 이름이 그 역할을 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결혼을 하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고 그 이름에 딸려오는 책임과 일들이 처음에는 버겁고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친구가 겪어야 하는 일들을 나는 너무 모른다. 그냥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잘 모른다. 내가 어찌 그것을 다 알겠느냐 하지만 내 친구 이야기이니까 친구의 마음은 내가 들어줄 수 있다. 근데 결혼과 함께 생긴 내 친구의 이름들이 친구를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이름이 형태가 있다면 발로 꾹꾹 밟아서 친구를 못 따라가게 해주고 싶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친구의 남편은 아직 친구의 이름을 불러 준다고 한다. 다정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