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식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예약한 식당 자리에 앉자마자 바닥의 냉기가 채 가기도 전에 정중함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형식적인 소개와 인사를 마쳤다.
“네. 아이고. 사진은 많이 봤는데, 실물 인상이 훨씬 더 좋네요. 딸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처음 뵙자마자 여자친구의 어머님은 어색함을 풀어주기 위한 배려를 베풀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그분의 품성이 느껴졌다. 옆에 앉아있던 언니분도 내게 어떤 감점사항이 있는지 살피는 눈치였지만, 식당 음식들이 하나 둘 나오면서 거기에 시선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이 모녀께서는 사전에 어떤 작전들을 계획하고 오셨을까. 아니다. 여기의 눈치싸움에 내가 껴서는 안 되고 이 자리에서만큼은 그 작전들에 계속 당해주는 게 예의겠지.
“어서 들어요. 뭐 이렇게 고급 한식당을 예약했어요?”
“처음 인사드리는 자리니까요. 어머님과 언니분께서도 많이 드세요. 그리고 어머님, 말씀 편히 해주세요.”
“에이... 그래도 처음 보는데, 그러면 쓰나. 다음번에 만나면 그때부터 편히 할게요.”
식당에 들어오면서부터 짧은 소개를 할 때까지는 목소리까지 떨며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그 이후 5분 정도 지났을 때는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더 어렸을 때였다면 주책맞게 어설픈 농담을 건네기도 했겠지만, 이제는 가만히 흘러가는 말만 하는 게 훨씬 괜찮은 답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최대한 얌전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수시로 떠올렸다.
“어머님. 이것도 드셔 보세요.” 새 젓가락으로 떡갈비를 어머님 앞접시에 올려드렸다. 그리고 언니분과 여자친구 순으로 차례대로 전해주었다. 순간 여자친구를 먼저 줘야 하나, 언니에게 먼저 줘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날 특별 면접관이 우선이었다. 언니분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는데, 이때 난 그 행동만 보고 걱정과는 달리 순하디 순한 분이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전에 여자친구에게 전해 듣기도 했지만.
‘강압적인 압박면접이 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긴장 풀지 말자’
“신문사에서 일한다고...?”
“네. 어머님. 일한 지는 1년 정도 됐어요.”
“응? 요리사 아니셨어?” 이날 처음으로 언니분의 음성을 들었다.
“무슨 소리야” 가만히 듣고 있던 여자친구가 화들짝 놀랬다.
“가끔 반찬 갖다 주시길래...”
“그건 그냥 해서 갖다 준 거고.” 여자친구와 언니가 같이 살고 있어서 가끔 반찬이나 음식들을 전해줬는데, 그 이유로 언니는 내가 요리하는 사람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얘기대로 보기 좋은 엉뚱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글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참 대단하네. 원래 그쪽이 꿈이었어요?” 자매의 티격태격이 끝나자 다시 어머님이 말을 건넸다.
“네. 어머님. 글 쓰는 거에 원래 관심 있어서 대학 신문사에서부터 일하곤 했었어요.” 그래야 하는 것처럼 대답마다 ‘어머님, 어머님’을 덧붙이니 식사 중간부터는 자연스럽게 입에 붙기 시작했다. 특히 이날 어머님은 내 소득이나 내 부모님에 관한 여부를 여쭙지 않았는데, 그 매너만으로도 속으론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감탄까지 하고 있었다. 문화가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마 나조차도 나중에 내 딸이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남자를 데리고 왔을 때 가장 먼저 묻고 싶은 질문은 ‘자네, 얼마 버나?’ 일 테니 말이다. 사실 어머님께서 여쭙는 것을 대비해 굉장히 믿음직한 답변을 준비해두기도 했다. 실상은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고, 집 장만을 위해 또 어떤 대출을 받아야 하는지 고민 중이지만.
식사가 전부 나오고, 슬슬 대화의 소재가 바닥날 기미가 보이자 나는 이날 스토리의 절정 부분을 펼치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머님과 언니가 놀라게 될 리액션을 기대하면서.
“어머님, 사실 예식장 예약했어요.” 내 두 눈으로 조심스럽게 어머님과 언니의 분위기를 살폈다.
“응. 얘기 들었어요. 우리 애 아빠도 한 번 봐야겠지만, 아마 좋아할 거예요.”
‘잉?’ 나는 놀란 마음에 옆 사람을 쳐다보았지만, 여자친구는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입모양으로 ‘뭐?’라고 답하곤 다시 음식에 집중했다.
“좀 이른 감이 있어서 걱정은 되지만...?” 어머님도 넌지시 26살 막내딸의 눈치를 살폈지만, 여자친구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입술은 쭈욱 내밀고 눈은 위로 치켜뜨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주었다. 평소에 나를 놀릴 때마다 짓는 표정이다. 덕분에 분위기는 더 부드러워졌다. 어머님의 눈빛은 천연덕스러운 장난꾸러기를 보는 눈빛이셨지만.
그 이후에는 대학에서 처음 만난 계기, 업무에 대한 어려움, 타향살이에 대한 외로움 등 어머님이 여쭤보는 간단한 면접 질문에 하나씩 답했다.
취업을 위해 수십 번의 면접을 볼 때마다 괜히 나라에 대한 비장한 복수심을 가지곤 했었는데, 이날 처음으로 그것도 내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느껴졌다. 취준생의 일상을 해탈하는 어느 순간부터 면접을 하고 나오면 ‘나 좀 무난하게 잘한 것 같은데?’의 느낌이 있고, ‘아, 개폭망이다. 어디 유명한 웅변학원 없나?’. 이 두 가지의 생각 중 하나의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날은 다행히 스스로가 만족한 면접(?)이었다.
어느새 식사의 말미를 의미하는 식혜가 나오기 시작했고, 자리의 마무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그때 되어서야 청심환의 효력이 발휘했는지 조금의 긴장상태에서도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조만간 우리 애 아빠랑도 또 한 번 보고, 얘기 나눠요. 뭐 크게 달라질 건 없겠지만.”
“네. 어머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아버님과의 자리는 조만간 또 마련하겠습니다. 언니분도 봬서 반가웠어요.”
“네.” 이날 언니가 내뱉은 문장은 3 문장 정도였던 것 같다.
식사 후 식당을 나오고 나서는 집에까지 직접 모셔다 드리려 했지만, 어머님은 거리가 멀지 않다며 그렇게 이날의 자리는 식당 앞에서 끝인사를 맺었다. 여자친구는 나와 같이 가려했지만, 내가 일단 어머님과 같이 가라고 귓속말로 재촉했고, 다행히 이번엔 여자친구가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모든 긴장을 쏟아부은 탓인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머리가 어지러웠고, 정신까지 헤롱헤롱 했다. 그러고선 다시 내 모습으로 돌아와 편의점에 들러 수입맥주를 신나게 골랐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 안에 바퀴벌레가 있는 사람처럼 입고 있던 정장을 10초 안에 벗어버렸다.
원룸 안에서 혼자 꼬북칩과 맥주를 음미하고 있을 무렵, 예상대로 10시쯤 여자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이야?”
“응. 아까 바로 들어왔어. 나 오늘 실수 많이 했지?” 생각나는 큰 실수는 없었지만, 괜히 어리광을 부렸다.
“실수? 실수는 무슨. 이제 결혼 못 물리겠는데? 엄마가 엄청 좋아해”
“진짜로? 휴.... 다행이다.... 내 생애 가장 떨렸던 날인 듯?”
“그래 보이더라. 오늘 고생했으니 일찍 자. 내일 또 만나서 얘기하고”
여자친구의 한 마디에 나는 신의 직장에라도 취업한 듯 지난 아픔들이 지워졌고, 통화를 마치고 나서는 막을 수 없는 잠이 쏟아져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날 하루를 다시 회상했다.
‘그래도 큰 산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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