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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사과 Jul 22. 2024

나를 버티게 해 줄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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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축하의 인사를 전하면서 꼭 한 번씩 해주는 이야기가 있었다. 출산하고 나면 둘째라 유난히 더 예쁘고 사랑스러울 거라고. 키우다 보면 항상 첫째 아이 때문에 둘째 아이에게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 더 소중할 거라고. 그래서 둘째 아이는 울고 자지러지고 나자빠져도, 무엇을 해도 다 예쁘게만 보인다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그러나 그것과 전혀 다르게 예쁘기는커녕 둘째를 고통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얼까. 내가 가지는 이 쇳덩이 같은 무거운 마음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죄책감과 미안함, 이런 감정들이 뒤섞여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 감정들은 낚아채려고 아무리 손을 뻗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뿌연 한 줌의 재가 계속해서 바람결을 따라 떠다니는 것만 같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기저귀와 온갖 장난감이 뒤섞여 엉망이 된 자그마한 방바닥에 주저앉아서, 그렇게 스스로를 원망하며 오열하던 날. 아이를 품에 안은채 그저 눈만 껌뻑껌뻑 서성거리며 무표정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날. 나에겐 그런 날들이 정말 많았다.



 내다본 창 밖엔 그저 앙상하게 남아있는 짙은 갈색의 가지들만 가진 나무가 뻣뻣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매일 창문을 통해 보이던 그 나무도 벌써 6년. 바라보겠다는 뚜렷한 마음 없이 그냥 눈에 스쳐 지나갔던 오랜 날을 뒤로하고, 어느 날 문득 눈에 들어온 나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나무가 엄마라면, 나무도 자식이 있지 않을까. 저 나무는 어떻게 한결같이 저렇게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 있을까. 지금은 잎이 다 떨어져 볼품없다지만, 다음을 위해 나무는 지금 또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눈보라를 버텨내는 것이 제일 우선인 겨울. 가만히 버티기만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분명 그게 아닐 텐데. 겉으로 드러나진 않아도 나무가 다음 계절을 맞기 위한 준비를 부단히 하고 있을게 분명하리란 생각들을 했다.

과연 이 세상에 희망 없이 버틸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지금이 지나가면 따뜻한 봄이 오리란 희망, 다시 찬란한 연둣빛 잎사귀들을 햇빛에 반짝이게 될 거란 희망, 또다시 향기로운 꽃을 피울 수 있을 거란 희망. 결국 나무도 희망이 있으니까 버텨지는 게 아닐까. 그렇게 오랜 버티기를 반복해 저 뿌리가 단단해지고 깊어진 거였다면, 겨울을 버티고 나면 봄은 오게 되어있다는 자연의 이치를 그저 따라보자고. 나도 지금 저 겨울나무처럼 버티기를 하고 있는 거니까 그저 이렇게 오늘을 또 잘 버텨내자며.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고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다시금 더욱 힘 있게 안아주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나를 버티게 해 줄 희망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쉽게 얻을 수가 없었다. 그냥 첫째 키웠을 때처럼 적어도 1년, 아니면 2년을 나의 희생이 당연히 필요한 일이라고 여기며 꾹꾹 눌러 담아 버티기만 해야 할 것인가. 나의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육아라는 최소 20년이 넘는 긴 장거리 여정에서 '엄마'가 가져야 할 희망은 무엇일까. 남편과의 관계에서 '아내'로서 가질 수 있는 희망은 어떤 것이 있을까. 가족이란 틀 안에서 내가 엄마도 아내도 아닌 본래 '나'로서 가질 수 있는 희망은. 내가 어떤 희망을 가져야 하고 어떤 희망들을 가질 수 있을지 그때도 명확히 알지 못했고, 글을 쓰는 지금도 사실 잘 모르겠다. 희망에 대해서는 일단 제쳐두고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자며 저 멀리 미뤄뒀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겨우 하루를 버티고 있으니 이 시간들이나 묵묵히 수행하듯 버텨내자고. 그런데 분명한 건 나 혼자서는 오래 버틸 수는 없겠다는 것이었다. 아이 한 명이야 어찌어찌 잘 몰라서 그냥 닥치는 대로 해왔다고 해도, 아이 둘은 정말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봐야 할 일이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 어디에선가 주워들은 이후에 첫째 아이를 낳기 전부터 마음속에서 항상 맴돌던 말인데, 왜 나는 마을은커녕 혼자서 이렇게 아등바등하고 있을까. 아무리 사회가 예전과 다르고 많이 달라졌다 한들, 말은 말일 뿐이고 현실은 그저 현실인 건가. 고작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아이 둘을 키우려면 나는 이 외딴섬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버텨질까. 분명 나처럼 이방인으로 제주에 내려와 살면서 어떠한 지원이나 도움 받을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나처럼 육아가 고되고 힘들고 외로운 엄마들이 존재할 텐데.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면 조금은 버티기가 수월해지지 않을까. 그러면 좀 더 버티기를 오래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나만의 마을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 나를 위한 마을이 곧 함께 하는 누군가를 위한 마을이 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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