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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어리 Nov 01. 2022

냉장고에서 자유롭고 싶다

냉장고에서 자유롭고 싶다      

 토요일 오후 3시. 창을 타고 들어오는 가을볕이 참 좋은 날이다. 빨래도 널고, 점심 설거지도 마쳤다. 일주일 전부터 사 두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읽지 못했던 소설책을 들고 침대에 기댔다. 세상 편한 시간이다. 하루 종일 귀찮게 하는 막내도 주말이면 주어지는 특권인 휴대폰에 빠져 있으니 잠깐 동안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책장을 몇 장 넘기지도 않았는데 꺄무륵 잠이 들었던 듯하다. 주방에서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포도어 4번의 문이 모두 열고 닫히기를 반복한다. 그러더니 결국 방문이 열린다. 

 “엄마. 먹을 거 없어?”

 잠에서 막 깬 딸아이다.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 단잠을 깨웠다는 억울함과 다시 또 뭔가를 차려줘야 한다는 불편함이 공존하는 짜증이었다. 오전 내내 잠만 자던 딸은 분명히 2시간 전에 점심 먹으라고 깨우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먹지 않으면 저녁때까지 아무것도 없다고 반 협박조로 말했고, 잠결에 알았다는 소리를 듣고 더 이상 깨우지 않았다. 그런데 이 시간에 배가 고프다며 적반하장으로 짜증을 내고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인지? 아니면 사춘기 딸과 틀어져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밀려오는 짜증을 꾸역꾸역 눌러 삼키며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가 없는 집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항상 가족들의 먹거리를 상비해두지 않으면 불안하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냉장고 문을 열고 닫는다. 양문형 냉장고 일 때는 냉장실과 냉동실을 번갈아 가면 열더니, 포도어 냉장고로 바꾸고 나니 정확히 4번을 열어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분명히 본인이 먹고 싶은 음식이 어느 위치에 들어 있는지 알 법도 한데 습관처럼 냉장고 문을 모두 열고 닫는 것이다. 

 다섯 식구의 먹거리를 채우는 일은 그리 녹녹하지가 않다. 일주일이면 몇 번이고 장을 보고 시시때때로 채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들은 항상 냉장고에 먹을 게 없다고 투정이다. 다섯 사람의 입맛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 없으면 냉장고가 비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집에 들어오는 시간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먼저 들어온 사람이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먹어버리면 나중에 들어온 사람은 어제 분명히 자신이 봐 뒀던 음식이 없다며 이곳저곳을 찾으며 짜증을 부린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떡볶이와 과일을 내놓으며 많이 먹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분명히 두 시간 후면 배가 고프다고 할 두 아들을 위해 나는 저녁을 준비해야 할 것이고, 지금 늦은 점심을 먹은 딸아이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저녁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또 늦은 저녁에 야식을 찾을게 뻔하다. 이런 일이 날마다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패턴이 한번 꼬이게 되는 주말이면 나는 아이들처럼 하루 종일 냉장고 문만 여닫고 있다. 

 내 시간을 조금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따끈한 저녁을 준비하는 일이 불행하다거나 싫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고, 내가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안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빠른 시일 안에 냉장고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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