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억과, 그 상실이 남긴 공백에 대하여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문화유산의 소실은 반복되어 온 비극이었다.
전쟁, 방화, 사고 등 다양한 이유로 우리는 수많은 유산과 기록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그 상실은 단순한 물질의 소멸이 아니라, 집단 기억의 붕괴를 의미했다.
2018년 9월, 대학생이었던 나는 브라질 국립박물관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 소식을 접하고 깊은 충격에 빠졌다. 브라질 국립박물관은 라틴 아메리카 최대 규모의 역사·과학 박물관으로, 1818년 설립 이후 약 200년에 걸쳐 수집된 유물 2천만여 점을 보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소중한 유산은 하룻밤 사이에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건물과 시설의 노후화, 만성적인 예산 부족, 그리고 화재에 대한 낮은 경각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예고된 인재였다. 당시 박물관에는 방화문이나 스프링클러 같은 기본적인 화재 대비 시설조차 없었고, 설치되어 있던 연기 감지 장치마저 화재 발생 당시 작동하지 않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소방 인프라였다. 화재 당시 인근 소화전이 마른 상태였고, 소방대원들은 결국 근처 호수에서 물을 끌어와 진화 작업에 나서야 했다. 이미 초기 대응이 늦어진 상황에서, 불길은 너무도 빠르게 번졌다.
그 결과, 수천 년의 시간과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아메리카 대륙 초기 인류의 흔적인 루지아(Luzia) 화석, 이집트 미라와 남미 최대의 고대 유물 컬렉션, 공룡 화석과 멸종 부족들의 유일한 기록물들까지... 그날, 인류의 기억이 문자 그대로 불에 타 사라졌다.
박물관은 최근 7월 일부 공간을 복구해 임시 전시를 시작했지만, 영원히 사라진 유산과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참사는 단 한 번의 방심이 얼마나 회복 불가능한 손실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경고이자 교훈이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하게 된다. 만약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지 않았다면? 혹은 2018년, 브라질 국립박물관이 더 안전한 환경에 있었다면? 과거에 대한 지식은 지금보다 얼마나 더 풍요로웠을까?
우리 역사에도 그런 상실의 순간이 있었다.
1954년 12월, 부산 용두산 일대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불은 북서풍을 타고 피란민촌 298채를 잿더미로 만들며 순식간에 번졌다. 발화 원인은 22세 식모가 2층 마룻바닥에 촛불을 켜둔 채 잠든 것이었고, 촛불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 화재로 1명이 사망하고 1,422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피해액은 397만 4천 환에 달했다.
그러나 이 화재가 더욱 비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 불길이 향한 곳이 ‘부산국악원 창고’였기 때문이다. 이 창고에는 조선 왕들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궁중 유물 약 4천여 점이 보관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국보급 유산으로, 6·25 전쟁 직후 서울로 이송될 예정이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끝내 부산에 남겨져 있었다. 공무원들은 창고의 열쇠가 어디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유물들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4천여 점 중 546점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소실된 유물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유물 목록과 기록은 6년 뒤인 1960년 6월 6일, 창덕궁 청사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는 어떤 유산을 잃었는지조차 모르는 채, 그 흔적마저 역사 속에 묻혔다.
이 화재는 조선 왕들의 어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어진 48축 중 30축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살아남은 18축 가운데 대부분은 얼굴 부분이 훼손되었다. 조선 500년 역사 동안 27명의 임금이 있었지만, 오늘날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어진은 태조, 세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에 단 6축에 불과하다. 남은 왕들의 실제 모습을 우리는 영영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정조의 어진 원본은 단원 김홍도가 제작에 참여한 것이기에 더더욱 안타깝다. 1954년 화재로 사라졌고, 심지어 화재 전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철종 어진은 그날의 참극을 가장 생생하게 증언하는 유물이다. 그림 왼쪽과 얼굴 입 주변이 불에 탔지만, 복원이 가능한 정도로 일부가 남았다. 특히 군복을 입은 조선 임금의 유일한 초상화로, 화려한 채색과 섬세한 붓질은 그 시대 화가들의 수준을 보여준다.
왕의 어진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려낸 왕권의 상징이자, 시대의 가치와 국가의 기억을 시각적으로 담아낸 역사적 기록이며 동시에 예술 작품이었다. 어진이 불에 타 사라졌다는 것은 곧, 한 국가의 정체성과 문화적 기억을 이루는 핵심 퍼즐 조각들이 영영 소실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왕들의 실제 모습을 상상으로만 채워 넣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글보다 그림은 더 즉각적이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특히 이미지가 감정과 기억을 구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한 장의 그림, 한 점의 유물은 단순한 과거의 잔재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의 공기와 정서를 고스란히 품은, 살아 있는 기록이다. 우리가 눈앞에서 마주하는 그 형상은 단절된 역사를 잇는 끈이자, 시공간을 뛰어넘어 감동을 전하는 귀중한 매개체다.
그러므로 불에 타 사라진 것은 단지 종이와 비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기억이며, 수많은 이야기들이 켜켜이 스며든 유산이었고, 한 시대의 정체성을 이루는 본질이었다. 그러한 상실은 단순한 아쉬움이나 후회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곧 역사의 단절이며, 결코 복원될 수 없는 깊은 상흔이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는 조선을 연 태조의 어진이 걸려 있다.
실제로 마주하면 압도될 만큼 거대하고 장엄하다. 청룡포의 섬세한 문양 하나하나에 눈을 빼앗기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조선의 초대 임금이자 고려의 마지막 장수였던 이성계의 강단과 기개가 깃든 얼굴, 그리고 그 정면의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발걸음을 옮기며 조선 왕조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전시실의 끝자락에 다다라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의 어진과 마주하게 된다. 황룡포를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고종의 초상은 그 앞에 걸린 왕들의 어진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유독 나는 그의 얼굴에 오래 시선이 머문 것은, 어쩌면 그 직전에 구한말 유물들의 설명을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태조의 표정이 나라를 세운 이의 확신을 담고 있다면, 고종의 얼굴에는 무언가 눌린 감정, 말 못 할 무게가 어린 듯 보였다.
그건 나만의 인상이 아니었다. 내 옆에 서 있던 아이가 부모에게 속삭였다.
“이 왕은 표정이 좀 씁쓸해 보여.”
아이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고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너머로는 몰락해 가는 왕국의 그림자와, 자신이 지켜야 했던 삶과 유산의 무게가 겹쳐 보였다. 문득, 세종과 정조의 어진이 남아 있다면 그들의 표정은 과연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어떤 눈빛으로 오늘의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문화유산은 단지 과거의 흔적이 아니다. 우리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명확하게 증언하는 살아 있는 기록이다. 그러니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곧, 우리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일이다.
영원히 사라진 것을 후회하는 마음보다 더 깊은 것은, 남아 있는 것을 지켜내고 복원하겠다는 조용한 다짐일지 모른다.
태조의 눈빛 속에서 시작을 보고, 고종의 눈빛 속에서 조선의 끝을 마주한 오늘, 그 긴 역사의 틈을 묵묵히 메우고 있는 학예연구자들의 조용한 손끝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