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가 우리 집을 방문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큰 애가 포함된 놀이그룹에 데니스가 들어갈 수 있도록 부탁을 하기 위해 온 것이다.
독일 학교는 1,2 교시 수업을 연달아한 후에 비로소 쉰다. 한꺼번에 30분간 휴식시간으로 주어진다. 이 시간 동안 애들은 간식을 먹거나 건물 외부 놀이터, 운동장에서 놀거나 축구, 탁구 등을 한다. 이때 생기는 놀이그룹이라는 게 회비나 가입절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유롭게 놀며 생긴 또래 무리이다.
쉬는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 함께 놀면 될 것을 일부러 찾아와서 부탁할 정도 일인지.. 이것이 과연 왕따 해결책이 될는지,, 왕따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다소 심심한 결말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해서 10대 친구관계가 돈독해 질까 의아한 마음조차 들었다. 그리고 왜 하필 큰 애를 찾아온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 이유는 한참 후에 밝혀졌다).
집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한 채 현관문 앞에 서서 대화하는 내내 긴장한 데니스였다. 우리 집까지 찾아오기까지 데니스와 가족이 겪었을 마음고생을 생각했다. 우리의 반응과 대답을 기다리는 모자 앞에서 내 의구심과 궁금함을 내색할 수는 없는노릇이었다.
이전에 겪은 다른 사건이 떠올라 데니스의 사정이 남다르게 다가왔다.큰 아들은 놀이그룹에서 데니스와 놀겠다며 선선히 약속을 했다. 그제야 손을 흔들며 홀가분한 얼굴로 그들은 돌아갔다. 큰 아들은 그 아이를 괴롭히거나 따돌리는데 앞장서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놀이그룹에서 함께 잘 지내겠노라 했다. 데니스와 엄마는 그날 이후에도 몇몇 아이들 집을 더 찾아갔고, 학교에서 대책회의를 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올바스 프로그램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에널리 사용되는 왕따 예방 프로그램이다. 1982년 스웨덴 10대청소년 3명이 잇달아 자살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스웨덴 심리학자 댄 올바스(Dan Olweus) 연구팀이 만들었다. 스웨덴이 이 프로그램 시행 후 왕따 발생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 프로그램은 학생들에게 상호 존중과 책임감을 심어주는 데 목적이 있다. 연령은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다. 학교폭력 특히 왕따 발생이 빈번한 연령에 맞게 세부내용이 짜여 있다. 주요 내용은 학생들에게 왕따 문제의 심각성과 해결 방법을 교육한다.
이 프로그램 특징은, 모든 학생을 포함한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올바스 프로그램은 왕따 가해자와 피해자뿐만 아니라, 방관자 역할을 하는 학생들 모두를 포함한다. 나는 특히,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학교폭력 사건이 일어난 후 '가해자처벌'을 중심으로 시선이 모아지기 때문이다. 자칫 피해자 VS가해자 모드로만 작동할 수 있는 것이 학교폭력 사건이다.
하지만, 학교폭력사건의 해결책은 강력한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다. '열 사람이 한 도둑을 못 잡는다'는 속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지금은 피해자인 아이가 후일 가해자가 되고, 현재의 가해자는 피해자인 과거를 지닌 경우가 많다. 방관자 아이 또한 '순수한 방관'의 경우는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피해자와 가해자 역할을 교대로 하고 있다. 그것이 범죄로까지 연결되지 않도록 미리미리 예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실은, 모든 학생이 왕따 예방과 해결에 있어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각자의 역할을 하도록 예방교육이 진행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왕따 예방을 위한 수업 시간 내 활동(비디오 시청, 역할극, 토론 등)을 통해 왕따 문제를 이해한다.교실에서 학생들은 왕따 예방과 관련된 4가지 기본 규칙을 학습한다.
4대 왕따 예방 규칙
1.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는다. 2.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가 있으면 돕는다. 3. 괴롭힘이 발생하면 교사에게 알린다. 4. 왕따로 인해 상처를 입은 친구를 배려한다.
특히 또래 중재 및 지원 프로그램이 있어서, 방관자 역할을 하는 학생들이 왕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권장한다. 학생들이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멘토링 프로그램이나 소규모 모임을 구성한다. 학생들이 자신의 경험을 익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설문 조사를 주기적으로 해서 학교폭력 실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한다.
올바스 프로그램은 학생은 물론 교사, 학부모가 함께 참여하고 예방 교육이 진행된다. 실질적인 대응 전략으로 왕따 문제에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효과적인 방안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스웨덴 등에서 이 프로그램의 효과성은 높고 안정적이라 평가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우리나라 교육청 누리집에 올바스 프로그램이 등장한 것은 2010년 즈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올바스 프로그램은 정착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연구(김철, 2022)에서는 그 원인으로 한국의 교육환경과 문화적 특수성을 들었다. 한국의 위계적인 구조와 경쟁중심의 학습환경이 장벽으로 분석되었다. 한국교육의 성과중심 문화와 학교폭력 문제를 개별적 사례로 치부하는 경향이 올바스 프로그램의 효과적 실행을 가로막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올바스 프로그램의 일부 내용이 한국의 학교폭력 예방교육에 흡수되어 적용되었다.
몇몇 사람과 이야기하던 중, 외국에서 효과성이 입증된 올바스 프로그램이 한국에서 정착하지 못하는 데 이야기가 모아졌다. 그중 인상적인 대목은 이것이다.
"그래, 아무래도 한국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학교폭력사건의 중간자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어.", "쓸데없이 남일에 신경 쓰지 말고 그 시간에 학교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할지도 몰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