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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구 Oct 18. 2021

회식 간다

시와 시인의 말




배추 겉잎 같은 어른들 회식 간다

두엇 서넛 어울려 회식 간다

혼자서도 간다

썩을 

것만 같은 누런 어른들

줄줄줄 회식 간다

비실비실 허깨비들 

줄줄줄 숨죽으러 간다 

찌들러 간다

울컥울컥 회식 간다

쉬어빠진 속을 까뒤집으러 간다

이 봄날에도 동지섣달 같은 어른들

꽁꽁 언 동태들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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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 첫날 일기를 이틀이 지난 3일에야 쓴다. 전날은 야근을 했다. 삼사 년 정도만 다니다가 그만뒀어야 할 개 같은 직장을 15년째 다니고 있다. 이것은 상당히 잘못된 일이다.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계속 다녀버린 것은 한번뿐인 생을 한참 좀먹어버린 것이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짓인가.    


   과유불급을 자주 떠올리면서도 생각과는 달리 지나치게 많이 다녀버렸다. 훗날 나는 내 스스로 좀먹어버린 세월들을 참담하게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 후회가 더 막심해지지 않게 나는 이쯤에서 이 개 같은 직장을 서둘러 그만둬야 한다. 황천길도 못 찾아갈 정도로 더 늦기 전에 그만 두자.  이제 그만 나를 자유롭게 풀어주자. 

    

    아무리 내 몸이지만 나를 너무 심하게 굴리지는 말아야지.  일기가 다짐이 되고 반성문이 되어버리는 상황에 치달아서야 이 개같은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다니, 퇴직은 나쁜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너무 오래 몸을 맡겼다. 이따위 생각이라면 생각을 뭉개버리고 몸이 생각을 이끌게 하자. 

   

   시도 아닌 일기를 쓰면서 자꾸만 고뇌하고 있다. 일기가 작문인가?  이틀이 지난 뒤에야 쓰는 일기는 일기가 아니고 전기다. 내가 나의 전기를 쓰고 있는 이 상황은 썩은 몸의 말로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결말은 혹독할 것이다. 더 썩기 전에 나가자.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빨리 빠져나가 더러운 오물을 씻어내자. 

 

   퇴직을 결심하고 하루가 지났다. 2일의 일기도 하루가 지난 3일에야 쓴다.  이 개같은 나락에서 빨리 빠져나가자는 생각으로 하루를 다 보냈다. 잔생각은 금물이다. 잔소리 보다 더 심한 잔생각은 마음은 물론 몸까지 다치게 한다. 잔생각 말고 이 개 같은 직장을 서둘러 그만두자고 다시 한번 더 결론을 짓는다. 


   이제 나의 출근은 그만 둘 작업을 하기 위한 출근이다. 이 다짐은 절대 허물지 않기로 한다. 결심을 했으니 직장을 반은 그만 둔 것이다. 반을 그만 뒀으니 다 그만 둔 것이다. 마음을 접었으니 마음을 따라 몸도 움직일 것이고 몸이 따르기로 했으니 마음은 더욱 더 분발하여 몸이 부끄럽지 않게 전진할 것이다. 


   일기를 쓰다가 잠깐 졸고 나서 출근을 했고 결국 하루가 더 지난 4일에야 이틀 전의 일기를 다시 잇는다. 여전히 나의 생각은 이 개 같은 직장을 그만두는 일에 있다. 오래 있을수록 정신건강에 해롭다. 새해가 밝자마자 마음이 바빠졌다. 직장을 그만 둘 것이니 꿈꾸던 곳으로 이사 준비도 해야 하고, 빡빡하다. 

 

   결국 오늘 일기도 어제나 그제처럼 이틀이 지난 후에야 쓸 수 있을 것 같다. 왜 이렇게 일기가 자꾸만 밀리는 것인가. 하루가 너무 짧아서 그런가. 시계는 분침 시침 다 필요 없고 초침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시계는 분침과 시침이 없다. 초침만 열심히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밀린 일기를 쓰다가 생각이 삼천포로 빠졌다.  계획들이 몽땅 다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삼천포까지 갔으니 놔두면 사량도까지도 가겠다. 당장 사표부터 써야 할 마당에 일기 나부랭이나 끄적이고 있으니까 이런 사달이 나는 거 아닌가. 도대체 나의 밀린 일기는 언제 끝날 것인가? 일단 오늘은, 회식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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