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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Aug 04. 2022

시카고는 밝은 태양 아래에서

밤의 어둠이 가리지 않도록

시카고에서의 둘째 날이다. 무덥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바람이 선선해 다니기가 한결 수월하다.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시카고에서 가장 유명한 아니쉬 카푸어의 클라우드 게이트를 보기 위해 어슬렁어슬렁 밀레니엄 파크를 향해 걸었다. 십여분을 걸어 도착한 밀레니엄 파크는 뉴욕의 센트럴파크처럼 삭막한 도시의 분위기를 단숨에 바꾸어 준다. 드높은 빌딩 사이에 자리한 광활한 공원은 나무들과 각종 예술품들로 가득해 들어서기만 해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그러나 이 한산함과 여유는 클라우드 게이트 앞에 도착하는 순간 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시카고의 명물을 보기 위해 너도나도 몰려드는 바람에 화보에서 본 것처럼 동그란 작품에 비친 시카고 풍경을 보는 것은 고사하고 기념사진 한 장 찍기가 어렵다. 어느 통찰력 있는 예술가가 나타나 나중에 몰려들 인파까지 고려해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도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을, 미래지향적이고 관광객 친화적인 작품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개미떼 같이 몰려든 사람들도 작품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디자인한다면, 관광객 바글거리는 작품 앞에서도 조금 덜 실망할 텐데.


§ 시카고의 명물 클라우드 게이트. 저 휘어진 조형물에 반사된 구부러진 빌딩 숲을 보아야 하는데, 관광객이 하도 많아서 짱딸막하게 비친 사람들만 실컷 보고 와야 했다.


나는 클라우드 게이트의 사람들을 피해 시카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시카고 미술관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보스턴 미술관과 함께 미국의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만큼 미술에 문외한이더라도 꼭 관람해야 하는 곳이다. 나는 일단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 미술 쪽은 제쳐두고, 그나마 미술 교과서에서 자주 접해 익숙한 근대 미술 위주로 감상하기로 했다. 이곳 역시 소장품이 화려해서 '이 작품이 여기 있었어?' 하는 감탄사가 끊임없이 나온다. 한참 관람을 하다가 한 작품 앞에서 나도 모르게 엇! 하고 소리를 질렀다. 놀랍게도 오래전 미술을 전공하던 지인의 사진 과제를 위해 모델을 할 때 참고했던 그림이 눈앞에 걸려 있었다. 그때는 누구 작품인지도 모른 채 그림만 보고 비슷한 포즈로 앉아 있었는데 이제야 화가의 이름과 작품 제목을 알게 되다니. 20년이 넘게 지나 실제로 마주하게 된 작품과 나의 운명이 신기하고 반가워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머물렀다.


§ 시카고 미술관의 상징은 뉴욕 공공도서관과 같은 사자이다. 미술관에는 회화 작품 외에도 중세 기사의 갑옷과 무기 같은 남심을 홀리는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다. 오른쪽 상단이 20여 년 만의 해후의 주인공인 피사로 카미유의 작품 <Young peasant having a coffee>.


미술관 관람을 마치니 다리가 묵직하니 뻐근하다. 미술관, 박물관 관람은 언제나 엄청난 체력을 요구한다. 우리는 다시 밀레니엄 공원으로 돌아와 또 다른 명물인 크라운 분수 앞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크라운 분수는 시간에 따라 사람 얼굴이 나타나고 입으로 물줄기를 쏘는 상당히 기괴한 분수인데 어째서인지 유명하다. 분수 앞은 바닥에 고인 물에서 뛰어노는 아이들로 가득하다. 대단한 수영장도 아닌데 그저 간간이 쏟아지는 물에도 마냥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보며 소박한 기준이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종아리의 통증이 어느 정도 가시자 자리에서 일어나 버킹엄 분수로 향했다. 버킹엄 분수는 1927년에 지어진 분수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영감을 받아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특히 분수 중앙에서 힘차게 쏟아 올려지는 물줄기가 매우 높아 장엄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그저 분수인데도 물 근처에 있어 그런지 시원하게 느껴진다.


§ 내 눈에는 좀 기괴해 보이지만 시카고의 또 하나의 명물인 크라운 분수(왼쪽)와 세상에서 가장 큰 분수 중 하나로 꼽히는 버킹엄 분수(오른쪽). 크라운 분수는 시간에 맞춰 웃고 있는 저 입으로 물줄기도 쏟아낸다. 다시 말하지만 기괴하다.


버킹엄 분수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호텔에 들러 낮에 먹다 남긴 시카고 피자를 데워 저녁식사를 마친 후 야경을 보기 위해 시간에 맞춰 다시 거리로 나왔다. 시카고 전망대는 윌리스 타워와 핸콕 타워가 가장 유명한데, 윌리스 타워는 바닥이 투명한 발코니로, 핸콕 타워는 앞으로 기울어지는 창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핸콕 타워가 좀 더 스릴 있어서 인기가 많다는데 우리가 원하는 시간은 이미 매진이라 하는 수 없이 윌리스 타워로 갔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무척 근사기는 한데, 밤에는 호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시카고는 호수가 가장 아름다운데 기껏 전망대에 올라 호수를 보지 못하다니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게다가 입장료가 어마 무시한데 투명한 발코니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1분 동안 잽싸게 기념촬영만 하고 나오라는 뜻인데 밤에 가서 그런지 내부 조명이 반사돼서 사진 찍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결국 사진은 몇 장 찍지도 못하고 시간에 쫓겨 나와야 했다. 뉴욕과 달리 시카고의 전망대는 낮에 올라야 한다는 교훈을 얻고 아쉬운 마음으로 전망대를 내려왔다.


§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윌리스 타워에서 바라본 시카고 야경. 빌딩 너머 짙은 푸른색이 미시간 호수이다. 시카고는 야경도 근사하지만 역시 푸른 호수가 잘 보이는 낮의 풍경이 더 아름다운 것 같다. 뉴욕은 밤에, 시카고는 낮에 볼 것.




호텔로 돌아오며 낮에 크라운 분수 앞에서 뛰놀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빗물 고인 물웅덩이나 다를 것 없는 분수 앞에서도 한없이 즐거워하던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그토록 재미난 것들로 가득했던 세상이 고작 20년 만에 따분해졌을 리가 없다. 변한 것은 나의 기준일 뿐. 문득 시야를 넓힌답시고 다니는 여행이 공연한 허영이 되어 쓸데없이 눈만 높아진 게 아닐까 조심스러워졌다. 화려한 시카고의 야경을 본 후에도 조용한 시골 마을 밤하늘의 잔잔한 매력을 볼 수 있는 마음은 잃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다음 여행지가 어디가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곳이 어떻든 간에 최선을 다해 즐겁기로 다짐했다. 동네 놀이터에서도 최선을 다해 노는 아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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