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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Aug 17. 2022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선상에서

바하마 브리즈

조지아는 미국에서도 남쪽 동네라 중미나 남미에 위치한 다른 나라들과도 제법 가까운 편이다. 때문에 미국에 머무는 동안 남쪽 나라에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미국을 돌아보기만도 벅찬 데다 코로나 상황에 눈치를 살피느라 미국 밖으로 나가는 것은 뒤로 미뤄왔었다. 그런데 나의 바람을 들은 이웃들이 크루즈 여행을 추천했다. 한국에서 크루즈는 호화스러운 여행으로 생각되지만, 미국은 크루즈 여행이 활발해서 그런지 잘만 구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저렴한 가격에 크루즈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통상 크루즈 여행은 반년에서 일 년 정도 미리 예약을 하지만, 출항 직전에 알아보면 이른바 "땡처리" 상품들이 많아서 가성비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루즈 회사 입장에서도 어차피 띄워야 하는 배를 비워서 가느니 어떻게든 채워서 가는 것이 손해가 적을 테니 윈-윈이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나는 여러 상품들을 둘러보다가 바하마 2일, 멕시코 2일(코스타 마야, 코수멜 각 1일), 선상 2일(이동)의 일주일 상품을 선택했다. 예전부터 마야 유적지를 한번 보고 싶었기에 멕시코도 들르는 상품을 고르다 보니 이탈리아 선박회사인 MSC의 크루즈를 이용하게 되었다.   


§ MSC의 바하마-멕시코 크루즈는 올랜도 근처의 포트 캐내버럴이라는 항구에서 출발한다. 포트 캐내버럴은 집에서 차로 8시간 거리인데 '별로 멀지 않은데? 운전해서 갈만 하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거리 개념만은 완벽히 현지인화 되었나 보다. 왼쪽은 출항 전 배에서 찍은 포트 캐내버럴의 사진. 오른쪽은 다음날 아침 바하마의 오션 케이에 정박한 크루즈 사진.


크루즈 여행은 처음이라 아는 것도 없는 데다 미국에서 처음 해외로 나가는 여행이니 사전에 준비할 것이 많다. 출항 48시간 전에 코로나 음성 테스트 결과를 받아야 하기에 열심히 마우스품을 팔아 무료 검사소를 찾아 검사를 받고, 동네 도서관에 들러 여행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출력해 여행에 나섰다. 출항은 저녁 6시이지만 체크인은 낮 12시에 오픈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배에 타야 하니 일찌감치 체크인을 시작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출국심사는 의외로 간단해서 혹시나 싶어 바리바리 준비해 간 각종 서류들은 다 보지도 않고 여권과 백신 접종 확인서, 코로나 음성 확인서 등만 확인하고 쉽게 통과되었다. 체크인이 마감되자 안전 관련 비디오를 의무 시청하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코로나 이전에는 승객들을 전부 모아 교육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많은 인원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각자의 선실에서 비디오를 시청한 후, 사고 발생 시 정해진 집합 장소에 모이는 모의 훈련(?)을 하는 것으로 대체된 모양이다. 안전 교육을 마친 후 일찌감치 오픈한 뷔페에서 이것저것 음식 맛을 본 후 - 첫날이라 폭풍 흡입을 했지만 매일 같은 음식에 질려서 배를 내릴 때쯤엔 쳐다도 안 보게 되었다 - 출항 파티가 열리는 14층으로 향했다.


§ 메인 풀장과 핫텁이 있는 이곳에서 출항 파티가 열린다. 매일 낮 이 풀장 앞 무대에서는 댄스 클래스도 열렸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라틴댄스를 배우며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췄다. 이를테면 크루즈는 승객도 승무원도 극강의 인싸들이 모인 집합체인 셈.


거대한 배가 서서히 항구에서 멀어지며 속도를 내자 바닷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어루만졌다.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데도 온기를 가득 품어 그런지 쌀쌀하기는커녕 기분 좋게 열이 오르며 취한 듯 나른해진다. 신나는 음악 때문에 들떠서 그런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낮에 먹은 멀미약 때문인 것 같다. 덜 졸리는 약으로 골라서 샀건만 미국 약이 한국인 체질에는 지나치게 독한지 졸음이 몰려와 정신을 차리리가 어렵다.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악몽이 떠오른다. 크루즈에서의 첫날밤을 그냥 보내야 하는 것이 아쉽지만 졸음 이기는 장사가 어디 있겠나. 나는 선실에 들어가자마자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배가 살랑살랑 흔들릴 때마다 요람이 흔들리는 것 같아 마치 아기로 돌아간 것처럼 기분 좋고 달콤한 잠에 빠져 들었다.


§ 이곳이 크루즈에서 가장 화려한 곳으로 좌우의 계단이 크리스털로 되어 있어 눈부시게 빛난다. MSC 크루즈는 하루 중 갈라 나잇(Gala Night)이 있어 대부분의 승객들이 턱시도와 드레스를 근사하게 차려입고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식사를 즐긴다. 물론 나는 드레스가 없어 옆에서 그냥 구경만 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니 배는 어느새 바하마에 도착해 있었다. 이 크루즈는 MSC의 사유지인 바하마의 오션 케이(Ocean Cay)에서 이틀간 정박한다. 푸른 바다를 보니 금세 기분이 좋아져 아침식사를 마치고 온몸에 선크림을 꼼꼼히 바른 후 바닷가로 향했다. 바다는 끝도 없이 투명하고 물도 차갑지 않아 물놀이를 즐기기에 딱 좋다. 이 지역은 8월이 우기라고 해서 약간 걱정했는데 날씨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우리는 파도에 둥실둥실 떠다니며 물놀이를 즐기다, 몸이 식으면 비치 베드에 누워 달콤한 칵테일을 마시며 따듯한 햇살 아래서 휴식을 취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은 미국에서는 비루한 몸일지라도 굳이 가려야 할 필요가 없기에 나도 래시가드 따위는 집어던지고 수영복 차림으로 실컷 놀았는데, 사실은 가렸어야 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선크림을 잘 바른다고 발랐는데도 햇빛 알레르기 때문에 등에 두드러기가 잔뜩 일어서 며칠간을 고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날은 아직 두드러기가 일어나기 전이라 뒤에 다가올 일들을 까맣게 알지 못한 채 그저 놀이에만 집중했다.


§ 항구에 정박한 크루즈에서 내려다본 오션 케이의 모습. 에메랄드 빛 바다가 아름답게 섬을 둘러싸고 있다. 사진의 등대가 있는 비치가 배에서 가깝기도 하고 다이내믹한 파도를 즐기기 좋아 가장 인기가 많다.


물놀이를 즐기다 출출해지면 근처 푸드 코트에서 간식을 사 와 먹거나 맥주를 마셨다. 크루즈는 음식이 포함이라 먹는 게 남는 거라는 생각에 어디 가서 든 열심히 먹었고, 밤마다 잠자리에 들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크루즈 여행을 가기 전 이웃들과 네일을 받으러 갔던 일이 생각났다. 스몰 토크를 좋아하는 우리의 미국 이웃들께서 또 열심히 샵 안의 손님들에게 내가 한국에서 왔으며 곧 크루즈 여행을 갈 예정이라고 TMI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 같으면 어색한 표정으로 '아, 그러세요.. ㅎㅎ' 하고 넘어갈 대화이지만 듣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스몰 토크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이라,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도 마치 십년지기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때 다들 입을 모아 하는 말이 크루즈에 간다면 12파운드(5.4킬로그램)는 쪄서 돌아올 거라는 거였는데, 막상 와서 보니 12파운드만 찌면 감사할 정도이다. 하는 일이라곤 먹고 바닷가에서 뒹구는 것뿐이니 살이 안 찌고 배기겠는가.


§ 선셋 비치 방향에서 바라본 등대. 저 등대는 밤에 조명을 밝혀 일종의 레이저 쇼를 하기도 한다. 첫날은 승선 마감이 11시라 젊은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해변에서 파티를 즐기기도 한다. 나는 체력과 인싸력 부족으로 배 위에서 레이저 쇼를 감상했다.


그러나 풍경은 천국처럼 아름답고, 바람은 실크처럼 부드럽고, 햇살은 봄날처럼 따듯한 이곳에서 고작 해야 하는 것이 늘어난 뱃살에 대한 걱정이라면 그건 너무 슬플 것 같다. 아니, 뱃살이 아니라 그 무엇에 대한 걱정이어도 비극일 일이다. 바하마에서는 일단 이 바다를 즐겨야 하기에.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다시 바다에 뛰어들어 걱정도 불안도 바닷물에 녹여낼 듯한 기세로 요란하게 물장구를 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오후가 되어 배로 돌아와 소금물을 씻어낸 후, 해변에서 저녁 산책을 즐기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낮에 갔었던 선셋 비치에서 노을을 보려 했으나 서쪽 하늘에 구름이 가득해 결국 노을은 보지 못하고 산책만 즐기다 저녁식사 시간에 맞춰 배로 돌아왔다. 식사를 마친 후 다시 갑판에 올라와 어둠이 내려앉은 해변을 바라보며 바닷바람을 즐겼다. 여전히 사람들은 흥에 겨웠지만 밤의 바하마에 취한 나는 귀도 눈도 멀어버린 것처럼 바람 속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어느새 음악소리가 저 멀리 아득해지고 귓가에는 파도소리만이 언제까지고 메아리쳤다.


§ 해질 무렵의 바닷가에는 드문드문 산책을 나선 사람들이 눈에 띈다. 낮동안 왁자지껄하던 해변에는 파도소리만 가득하다. 철썩철썩 쏴아아. 시원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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