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스크 Aug 20. 2022

한없이 낭만적이어도 좋은 바하마

파도도 내 마음도 살랑살랑

바하마에서의 둘째 날이다. 첫날은 모르고 비치파라솔을 빌렸는데 가만 보니 그냥 야자수 그늘에 비치 베드 끌어다 놓고 쉬는 사람들도 많았다. 오늘은 우리도 비용 절약을 위해 파라솔을 빌리지 않을 생각이라 좋은 자리를 맡기 위해 조금 서둘러 배를 나섰다. 어제는 등대 근처 비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오늘은 좀 더 멀리 떨어진 - 그래 봐야 섬 자체가 워낙 작아서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 사우스 비치에 가보기로 했다. 사우스 비치 역시 무척 아름다운데 약간 섬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 지형이라 파도가 거의 치지 않는다. 게다가 수심도 굉장히 낮아서 마치 욕조에 앉듯이 바닷물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의 대부분이 노인이나 어린아이들인 이유를 알겠다. 한마디로 안전하지만 지루한 곳. 뭐랄까 인생에 대한 비유 같은 해변이다.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물에 들어가 가끔씩은 짠 물도 먹고 코와 눈이 매워 눈물도 찔끔 흘려봐야 파도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 어제의 등대에서 조금 떨어진 사우스 비치. 여기도 물은 맑고 깨끗하지만 파도가 적어 노인이나 어린아이들이 주로 놀고 있었다.


오늘 사우스 비치에 가기로 한 건 어제와 다른 곳에 가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카약 빌리는 곳과 가까워서 이기도 하다. 카약은 탬파에서도 해봤지만  크리스털 리버 하류 쪽이라 강의 느낌이 더 컸기에 이번에는 바다에서 한번 해보고 싶어 어제 예약을 해두었다. 그런데 바다로 나오니 오늘은 바람이 세서 카약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사우스 비치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다 바람이 조금 잦아든 후에 렌털 샵으로 갔다. 다행히 렌털 샵이 문을 열어 배를 잘 빌리기는 했는데 바람이 너무 세서 노를 아무리 저어도 쉽사리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균형을 잡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게다가 강풍에 날려 모자가 바닷물에 빠지는 바람에 그걸 찾겠다고 한참을 뱅뱅 맴돌았으니 멀리서 보면 허둥대는 우리가 적잖이 우스꽝스럽게 보였을게다. 그래도 물이 너무 예뻐 카약을 하며 섬을 돌아보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물론 노를 젓느라 고생을 배로 했을 남편의 생각은 나와 많이 다르겠지만.


§ 해변에 놓인 카약. 확실히 카약은 튜브에 둥둥 떠다니는 것에 비하면 놀이라기보다 노동의 너낌(?)이 있다.


한편 크루즈는 뷔페식당과 주로 저녁 식사용인 메인 식당, 해변의 푸드코트 음식들이 모두 포함이라 돈 걱정 없이 마음껏 먹을 수 있는데, 메인 식당의 메뉴는 날마다 바뀌고 퀄리티도 상당해서 매일 먹으며 이 값으로 이문이 남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뷔페는 한 두 가지 오늘의 스페셜 음식을 제외하면 거의 똑같아서 약간 질리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크루즈에는 돈을 따로 내고 갈 수 있는 다양한 식당들이 있는데, 알뜰 여행자인 우리는 유료 식당에 한 번도 가지 않고, 신라면 국물이 간절한 순간에도 허벅지를 포크로 찌르며 견뎌냈다(참고로 크루즈는 음식물, 음료, 휴대용 전기포트까지 모두 반입금지라 승선시 모두 압수된다. 게다가 뷔페에는 아시안 음식이 전혀 없어서 일주일 동안 먹은 매운 음식이라고는 피자에 뿌리는 핫 페퍼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토종 입맛이라면 하루 만에 나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런 우리가 실수로 음식값을 지불한 곳이 있으니 바로 이 사우스 해변이다. 메뉴에 가격이 적혀있는 걸 봤을 때 바로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멋모르고 주문한 내 실수이기도 하고, 유료임을 안내하지 않은 종업원 실수이기도 하다. 가만 살펴보니 무료로 먹을 수 있는 식당에는 메뉴에 가격이 적혀있지 않고, 요금을 내야 하는 경우에는 값이 적혀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맛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기도 하고 첫 크루즈의 실수 치고는 이 정도는 귀여운 편이라 웃어 넘기기로 했다.


§ 무료인 줄 알고 주문한 랍스터 롤. 어쩐지 지나치게(?) 맛있더라니. 칵테일 중에서는 상큼한 모히토나 달콤한 코스모폴리탄이, 프로즌 칵테일 중에서는 피냐 콜라다와 딸기 스무디가 반반 섞인 마이애미 바이브가 가장 맛있었다.


한편 더운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니 음료를 많이 먹을 거라는 생각에 9달러 이하의 음료를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는 음료 패키지도 구매했다. 처음에는 신이 나서 칵테일도 와인도 종류대로 먹어 보며 좋아했는데, 사실 남편도 나도 술이 센 편이 아니어서 하루 이틀이 지나자 결국 한두 잔 이상은 마시기가 어려웠다. 음료 패키지는 술이나 음료수를 많이 마시는 사람만 구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쨌든 오늘은 바하마를 떠나 멕시코로 이동하기에 물놀이를 조금 일찍 마치고 배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바하마에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남기고 승선해 휴식을 취했다. 거대한 크루즈는 출항시간에 맞추어 다시 바다를 향해 서서히 나아갔다. 늘 파티장 같은 갑판과 달리 로비에서는 끊임없이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고 있다.  배가 살랑살랑 흔들릴 때마다 손에 든 유리잔 안의 칵테일에도 잔잔한 파도가 일렁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칵테일처럼 달콤하고 파도처럼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바하마의 여운에 한동안 빠져있기로 했다. 한없이 낭만적이어도 좋은 크루즈이기에.


§ 굿 바이 바하마. 다시 보자는 말을 할 수 없는 지구 반대편의 나라 바하마에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멕시코로 이동하는, 또 멕시코에서 돌아오는 이틀은 정박을 하지 않고 배 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인터넷은 말도 못 하게 느린 데다 툭하면 끊어지고 TV도 나오지 않는다. 깜빡 잊고 책도 가져오지 않아 뒤늦게 크루즈 내의 도서관에 가봤으나 이미 누군가 다 빌려가고 남은 책이 거의 없다. 크루즈 여행에 갈 때는 드라마라도 잔뜩 다운로드받아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이 실수는 비록 돈이 들지는 않았으나 랍스터 롤보다 백배는 치명적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람이 여럿 있는지 밤마다 다음날 일정을 프린트해서 방에 가져다주는데, 나름 아침부터 저녁까지 선상 프로그램이 꽉 차있어서 화려한 쇼도 보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핫텁을 즐기기도 하면서 시간을 잘 보냈다. 이런 날 갈라 나잇이나 화이트 나잇(드레스 코드가 흰옷인 날로 다들 하얀 옷을 입고 다닌다)이 열려서 근사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크루즈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와 우아함을 맛볼 수 있는, 따분할 수도 있으나 마음먹기에 따라 즐거울 수 있는 선상에서의 시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선상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