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시대 - 동물화와 공론장의 상실

-아즈마 히로키와 위르겐 하버마스를 중심으로-

by 굉굉E

1. 서론


필자는 오랫동안 새로운 정보환경이 가져오고 있는 소통 불가능성에 대하여 고민해 왔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같은 거대 이념으로 조율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갈등들을 마주하고 있다. 정보기술이 비대해짐과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사회는 소통 단절의 문제를 겪고 있다. 산업화를 겪으며 개인주의 사회로 발전함과 더불어 보급된 새로운 정보환경은 가치관의 다양성을 보장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가치관을 공유하는 집단 속에서만 소통하는 ‘섬우주화’(1) 현상을 낳았다. ‘일베’는 광우병 사건을 겪으며 사회를 ‘감성에 물든 대한민국’ 또는 ‘감성 팔이 사회’로 재단하며, ‘팩트 주의’를 위시하며 타자와 이견을 ‘좌좀, 전라도, 여성’으로 치부하여 비하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일베’의 패악질의 후폭풍으로 인해 14년 세월호 사건 이후로 민감한 사안에 대한 이견은 ‘일베 낙인’이 찍혀야 할 비도덕적 의견으로 치부되어, 논의의 가능성을 말살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15년 이후로 PC주의(정치적 올바름)가 들어오면서 ‘불편’이라는 단어가 ‘밈’으로 소비될 정도로 시민 스스로가 자기 검열을 하고 타인을 검열하는 ‘시놉티콘’이 도래했다. 불편함을 호소하며 출연자를 하차시킨 여초 커뮤니티가 ‘미러링’ 전략을 내세우며 ‘남성혐오’적 발언을 쏟아낸 메갈리아로 변질되었으며, 16년도의 강남역 살인사건과 함께 페미니즘 진영의 ‘잠재적 가해자론’으로 인해 남녀갈등이 대중화되었고 전면화되었다. 이제 25년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사회는 여성과 남성, 장애인과 일반인, 좌파와 우파 등 무분별한 이분법적 구조 아래에서 ‘상대방의 가치관을 논리적으로 타파하겠다’는 정치적 목적에서 변질되어 자신의 집단을 피해자로 정체성을 규정하며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 내리고자 하는 맹목적 증오를 향해가고 있다. 여기에는 대화도 없으며 대화의 대상이 되는 타자 또한 없다. 우리의 사회는 스스로 패배주의를 내면화하여 고통만을 호소하는 ‘정체성 정치’를 학습하고 있다. 말싸움을 이기기 위한 수사로 사용된 ‘팩트’는 어느덧 무한히 생산되는 혐오 표현들로 대체되었다. 이분법적 대립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채, ‘사유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25년의 인공지능과 같은 ‘대단한’ 과학적 진보는 사유를 점검하고 스스로를 반추할 기회를 박탈했으며, 이견과 타자를 노이즈로 전락시켰다. 알고리즘, 필터버블로 점철된 편의 기술은 물리적 혹은 기술적 의미에서 타자의 존재 가능성을 원천 차단함으로써 에코 챔버 현상을 강화시킬 뿐이다.


이 글은 새로운 정보환경이 변질시킨 혐오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 사회에서 인간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며, 인간과 사회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여야 하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주목할 철학자인 ‘아즈마 히로키’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통해 ‘서브컬처’를 경유함으로써 포스트모던적 시대상을 지적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의 저서에 대한 피상적 해석으로는 그의 문제의식이 납득되기 어려운 측면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큰 이야기의 조락’이라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서브컬처’의 공간에서 탐색해야 할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실질적인 문제의식은 “‘오타쿠’(2)라는 세대 집단이나 공동체의 고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서 발견되는 포스트 모던한 삶 전반에 대한 고찰에 있다.” 즉, “’ 동물적’이라 묘사한 포스트모던의 소비자가 그럼에도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세계와 접하는 것이 좋은가”라는 복잡하고 실존적인 문제이다.(3)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의 이론을 통하여 당파 논리, 이분법적 논리라는 타자와의 끊임없는 분리 작업으로부터 탈피하는, ‘대화’가 존재하는 ‘소통 가능성’의 공간을 탐색하고자 한다. 즉, 이분법적 논리로 점철된 공간을 어떻게 소통의 영역으로 복원시킬 것인가에 대한 추적이다.


2. 이상의 시대 ~ 허구의 시대


아즈마 히로키는 70년대 이후의 시대 구분을 계승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기에, 그가 참고하고 있는 학자들의 시대 구분에 대한 개념이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데, 그의 ‘동물화’ 개념은 단순히 젊은 세대, 그것도 ‘오타쿠’라는 특정 문화의 관찰을 통해 도출된 사회학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개념은 사회학 개념이 아닌, 철학적 개념이다. 즉, 그의 개념은 단순히 특정 사회에 대한 분석이 아닌, 현대 사회의 전체적인 스케치를 형상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그가 언급하고 있는 일부 학자들의 이론을 간략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미타 무네스케에 따르면 패전부터 미일안전보장조약 체결로 전후 민주주의의 이상이 배신당했을 때까지인 1945년부터 1960년까지가 공산주의(소련)/민주주의(미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이상’이 사회를 규정하고 있던 ‘이상의 시대’이다.(4) 세계적인 학생운동의 계절이었던, 급진적인 사회개혁의 ‘꿈’이 사회를 규정하는 기능을 한 ‘꿈의 시대’는 1961년부터 1975년이며, 1970년대 후반 이후의 소비사회(5)는 상품으로써 유통되기 시작한 ‘귀여운’ ‘멋진’ ‘예쁜’ 의미를 휘감은 기호들로 대표되는 허구가 사회를 규정한 ‘허구의 시대’라고 정의한다.’(6)


그의 제자 오사와 미사치는 미타 무네스케의 구분을 보완한다. 오사와는 1945년부터 1970년까지를 ‘이상의 시대’로, 1970년부터 1995년을 ‘허구의 시대’로 양분한다. 오사와의 저작 <허구시대의 끝>, <전후의 사상공간>에서 오사와는 ‘이상의 시대’(7)란 커다란 이야기(8)가 그대로 기능하고 있던 시대, 허구의 시대란 커다란 이야기가 가짜로서밖에 기능하지 않는 시대로 정의한다.(9) 즉, 그들의 해석에 따르면 70년대 이후로 민주주의라는 국민국가적 이데올로기와 같은 역사적 가치체계가 개인의 인생의 근거가 되는 ‘커다란 이야기’가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70년대는 연합적군사건, 석유파동을 겪으며 커다란 이야기가 작동하지 않기(10) 시작하면서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이 가속화되며 허구의 시대로 돌입하기 시작했다.(11) 허구의 시대를 대표하는 소비자로 주목받은 ‘오타쿠’의 허구 중시 태도를 나카지마 아즈사는 ‘아버지나 국가의 권위가 실추했지만, 오타쿠들 스스로 귀속해야 할 집단을 찾기 위해 자신의 영역을 등에 짊어지고 다닌다.’ 고 지적한다.(12) 즉, 사회적 현실이 부여하는 가치규범보다 허구가 부여하는 회로를 통해 개인이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 더 유효하다는 판단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항정신성 약품으로의 긴급처방을 버티지 못하고 오컬트라는 서브컬처의 세계 = 허구로 작동하는 회로에 만족하지 못한 채, 현실에서의 자기 승인을 원한 옴진리교에 의하여 허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이 확인되었다.(13) 즉, 옴진리교의 지하철 가스 테러는 허구를 현실화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변혁 시도는 1980년대 버블경기의 ‘허구에 붕 뜬’ 부유감을 제거하는, 현실로의 각성 압력으로 작용했다.(14)


3. 데이터베이스적 동물


아즈마 히로키는 옴진리교 이후의 사회를 ‘동물의 시대’로 명명하며 논의를 이어간다. 그의 저서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은 오타쿠적 문화를 분석함으로써 현대 사회와 포스트모던 그리고 오타쿠의 관계를 분석한 철학 서적이다. 아즈마의 이론은 ‘데이터베이스’와 ‘동물’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해야 한다.

아즈마는 일차적으로 오타쿠계 문화의 포스트모던적 특징들을 지적한다. 첫 번 째로, 동인지, 동인게임으로 대표되는 2차 창작물에 대한 높은 평가가 장 보드리야르가 예견한 문화산업의 미래에 매우 가깝다.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작품이나 상품의 오리지널과 복제의 구별이 약해져 그 어느 쪽도 아닌 ‘시뮬라크르’(15)라는 중간 형태가 지배적이 된다고 예측했다. 두 번 째로, 오타쿠들의 ‘허구 중시 태도’(16)가 커다란 사회적 규범이 유효성을 잃고, 무수히 작은 규범의 밀림으로 교체되는 과정으로, 리오타르의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17)과 대응된다.(18)


아즈마는 이어서 오쓰카 에이지의 <이야기 소비론>을 검토한다. 오쓰카 에이지는 실제로 소비되는 것은 하나하나의 드라마나 물건이 아니라 그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시스템=세계관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에이지적 표현으로 커다란 이야기로 불리는 시스템=세계관 자체를 상품화하여 팔 순 없으므로, 한 편의 드라마나 단편적인 물건으로 겉보기를 소비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은 이야기들을 소비함으로써 심층의 세계관을 최종적으로 습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에이지는 이를 ‘이야기 소비’라 명명한다. 아즈마는 이러한 이야기 소비의 위상에서는 작은 이야기의 소비를 계속한 끝에 시스템 전체를 획득하게 되면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불가능한 케이스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즉, 기존의 세계관과 정합성을 가지면서도 세계관에 포함되지 않는 새로운 캐릭터를 생산하여 판매한다면 이것은 오리지널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면서도 진짜도 가짜도 아닌 케이스가 된다는 것이다(19). 아즈마는 이야기 소비 하에서는 2차 창작이라는 시뮬라크르의 범람은 예견된 수순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허구의 시대를 지나 커다란 이야기가 조락했기에 그는 포스트모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트리모델이 아닌 데이터베이스적 모델을 도입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한다.


오쓰카 에이지의 이야기 소비론은 근대적 모델에 대응되고, 아즈마 히로키의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은 포스트모던적 모델에 대응된다. 즉, 아즈마에 따르면, 심층에 존재하는 커다란 이야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층에는 부호화된 정보의 집합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유저의 읽는 행위에 의해 만들어지는 별개의 웹페이지가 있는 2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즉, 표층에 나타난 작은 이야기는 심층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닌 유저에 의해 정해진다. 이러한 모델에서는 오타쿠계 문화에서의 작품의 우열은 데이터베이스의 조합 정도의 우열로 측정되며, 설정에 손만 대면 소비자는 2차 창작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원작이 무질서하게 시뮬라크르의 바다에 삼켜지는 것이 아닌, 데이터베이스=설정이 있고 읽어내는 방식에 따라서 원작과 2차 창작 모두 가능해지다는 것이다. 심지어 오타쿠 소비자들은 시뮬라크르가 깃든 표층과 데이터베이스의 심층을 명확히 구별하여 소비한다.(20)


아즈마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오사와 미사치의 ‘허구의 시대’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오쓰카 에이지의 ‘이야기 소비’에서의 심층에 존재하는 커다란 이야기=세계관은 근대적 모델이다. ‘허구의 시대’에 유행한 건담의 가공 연대기로 대표되는 서브컬처의 설정이나 세계관들은 분명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의 일종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허구의 시대는 커다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세대의 날조를 통해서 유지된다. 아즈마는 근대에서 포스트모던으로 진행됨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세대는 처음부터 세계를 데이터베이스로 인식하기에 허구를 통해서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을 메우는 날조의 필요성이나 욕구는 없어진다고 지적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90년대의 오타쿠들은 80년대에 비해 작품 세계의 데이터 자체를 고집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나 의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일러스트나 설정만이 단독으로 소비되고, 소비자가 마음대로 감정 이입을 강화해 가는 기존과는 다른 유형의 소비행동을 보인다. 새롭게 등장한 오타쿠들은 배후에 존재하는 정보만을 담담하게 소비한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러한 작은 이야기=시뮬라크르의 배후에 있으면서도 이야기성을 갖지 않는 영역을 커다란 비이야기=데이터베이스라고 명명한다(21).


아즈마는 오타쿠계 문화에서 유력한 요소를 샘플링하고 조합하는 방식으로 캐릭터가 생성되며, 이 요소들은 소비자의 관심을 촉발하기 위해 발전된 장르적 존재임을 지적한다. 시장 원리 속에서 떠오른 기호들이며, 이러한 기호들은 소비자의 ‘모에’(22)를 효율적으로 자극하기 위해 발달되었다. 그는 이러한 기호들을 ‘모에 요소’로 명명한다. 따라서, 오타쿠계 시장이 발전할수록 등장인물의 설정의 전략이 요구되며, 이에 응답하여 모에 요소의 기술도 축적된다. 다시 말해 모에 요소가 데이터베이스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2층 구조 하에서 오타쿠는 ‘캐릭터=시뮬라크르’(23)와 ‘모에 요소=데이터베이스’를 왕복하며 소비한다.(24) 따라서 그들은 모에의 대상을 계속해서 바꾸어 소비할 수 있게 된다.


아즈마는 포스트모던에서 커다란 이야기가 조락한다면, 인간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라는 새로운 질문에 착수한다. 80년대의 일본에는 ‘뉴 아카데미즘’이라는 이름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입되었다. 아즈마에 따르면 당시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프랑스의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를 즐겨 참조했는데, 이는 80년대의 내셔널리즘과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한다.(25) 아즈마의 해석에 의하면 헤겔 철학에서의 ‘인간’은 자기의식(26)을 갖는 존재이며, 자기의식을 갖는 ‘타자’와의 투쟁에 의해 절대지나 자유나 시민사회를 향해가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투쟁의 과정을 ‘역사’라고 한다. 코제브의 저서 <헤겔 독해 입문>에서 코제브는 헤겔적인 역사가 끝난 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생존양식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미국적인 생활양식인 ‘동물로의 회귀’이며, 또 하나는 일본적 스노비즘이다. 코제브가 해석하는 헤겔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고자 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즉, 코제브에 의하면 인간이기 위해서는 자연과의 투쟁이 존재해야만 한다. 또한, 그는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바로 욕망과 욕구의 차이이다. 인간은 욕망을 가지는 반면, 동물은 욕구뿐이다. 욕구란, 특정한 대상을 가지고 소유함으로써 단순하게 충족되는 단순한 형태의 갈망이다. 하지만, 욕망은 결핍이 충족되어도 만족되지 않는다. 아즈마가 인간적 욕망의 예시로 들고 있는 것은 성적인 욕망이다. 자신이 상대방을 욕망하는 만큼 타자 또한 자신을 욕망하기 바라는 복잡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간주체적 욕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소비자의 필요를 그대로 충족시키는 상품에 둘러싸여, 또 미디어가 요구하는 대로 모드가 바뀌어 가는 전후 미국의 소비사회는 인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물적이다. 이에 반해 코제브가 말하는 일본적 스노비즘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 그것을 부정하는 행동 양식이다. 스놉은 환경을 부정하고 형식적인 대립을 만들어내어 그 대립을 즐기고 애호한다. 코제브가 그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은 할복자살이다.(27) 아즈마는 1995년 이전의 ‘허구의 시대’는 일본적 스노비즘의 시대라고 주장한다. 역사적 의미와 거대서사가 사라진 자리를 서브컬처를 통해 메우고자 허구의 거대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오타쿠와 스놉의 공통점(28)이라는 것이다.(29)


아즈마는 1995년 이후의 시대를 ‘동물(30)의 시대’로 명명한다. 앞서 말했듯, 허구의 시대의 스노비즘 정신은 유효성을 잃었고 허구의 시대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존의 시대정신인 이야기 소비에서 다른 종류의 시대정신인 데이터베이스 소비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형 소비사회에서는 소비자의 요구가 타자의 개입 없이 기계적으로 충족되도록 개량되어가고 있다. 또한 오타쿠들은 그들 스스로의 감정적인 만족을 달성해 주는 모에 요소의 조합들로 손쉽게 동물적 욕구를 해소한다.(31) 아즈마에 따르면, 오타쿠들은 사교성 측면에서도 근대적 인간과는 상이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새로운 사교성’을 보이는데, 새로운 사교성이란 유익한 정보가 공유된다는 조건 하에 작은 공동체 속에서 발휘되며, 오타쿠 개인의 자발성으로 사교성이 발휘될 수도, 커뮤니케이션을 유보할 수도 있다. 정보의 집적인 데이터베이스를 향한 인간적 욕망과 시뮬라크르를 향한 동물적 욕구가 해리적으로 공존한다. 따라서, 형해화되고 형식화된 사교성은 데이터베이스의 심층에서만 요구되며, 시뮬라크르=드라마, 작은 이야기의 표층에서 개인의 욕구는 비사회적이고 동물적인 방식으로 처리된다. 즉, 사교성이 형식화되고 형해화됨으로 인해 작은 이야기=모에, 감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게 되며, 커다란 이야기=‘커다란 공감’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즉, 시뮬라크르의 수준에서의 작은 이야기에 대한 욕구와 데이터베이스 수준에서의 커다란 비이야기에 대한 욕망에 의해 구동되는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32) 동물화 한 인간은 동물적인 욕구를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끝없이 욕망하는 과시적 소비 형태를 추구한다.(33)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의미에 대한 갈망을 사교성을 통해 충족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동물적인 욕구로 환원함으로써 고독하게 채운다. 세계 전체는 단지 즉물적으로 누구의 삶에서 의미를 주지 않는 채 표류한다.(34)


4. 결론


정보사회로 돌입함과 동시에, 사물과 사물, 사람과 사물이 시공간의 제약 없이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해 현실을 정보화 함으로써, 허구=애니메이션에 대한 욕구가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적은 비용으로 훨씬 양질의 재미를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정보사회로의 진입은 쌍방향적 매체로서의 인터넷 환경을 만들어냈다. 개인과 세계를 연결해 주던 ‘허구’를 경유하는 회로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인터넷이라는 더욱더 손쉽고 빠른 액세스 회로가 등장한 것이다. 인터넷 환경에 흩뿌려진 정보에 대한 선택의 폭은 무한히 늘어났고, 이러한 정보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는 대신, 철저히 파편화되었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으며, 관심 없는 혹은 불호하는 정보는 무의미(35)한 정보로 치환하여 차단하고 배제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선호하는 것 들로만 이루어진 정보의 ‘유토피아’가 도래했다. 여기선 자신의 가치관과 코드에 맞지 않는 타자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타자의 ‘존재 가능성’ 조차도 없다. 자신이 선택한 가치관과 상충하는 타자는 그저 기술적 노이즈로 취급=전락되어 물리적 차원에서 배제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 스스로에게 이성이 존재하고 이러한 이성을 이용한다면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협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정보 환경에서는 그러한 환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더 나아가 절망적 이게도 현재의 인터넷 공간에서는 자신 스스로의 가치를 절하시켜 대화에 참가할 의지조차 내비치지 않는 풍토가 잠식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하게 한심한 행태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시대에 대한 불신과 정치적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는 현실에 기인한 자기파괴적 태도로 읽을 수 있다. ‘아무리 말하여도 귀담아듣지 않는 사회, 불평등함을 느끼고 있는 자신에게 오히려 차별하는 사회’에 대한 불신과 패배감이 내면화되어, 스스로를 희화화하고 약자가 약자를 조롱하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오랫동안 사회를 좀먹고 있던 ‘대화’의 기능불능으로 인해 기인되었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고 규탄함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허영심이 관습처럼 지속되어 온 우리 사회가 낳고 있는 하나의 병폐인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포스트모던적 인간상에 대한 개념의 실재를 따지는 것은 개개인의 의견에 맡긴다. 누군가는 현대 사회를 ‘큰 이야기’가 범람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의 이론의 실재성을 부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개념을 통해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일정 부분 타당하고, 편리한 도구로써 작용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이미 초연결사회라는, 근대와는 다른 환경에 처해있으며 근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며 소비한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인간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필요할 것이다. 그의 ‘동물’이라는 언어적 비유는 코제브로부터 기인되었음이 분명하지만, 이것은 어느 정도의 부정적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음 또한 분명하다. 파편화된 사회는 이미 사회 전체를 조망할 수 없게 되었고, 인간은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는 미디어 매체와 시장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며 즉물적으로 반응한다. 편협한 시선을 강제받고 있으며 그러한 협소한 시야와 한정적인 이해관계로 행동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큰 이야기의 조락’으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은 사회 공동체 모두가 공유하는 담론이나 가치규범의 상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담론들과 가치 규범의 존재 당위성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다. 자유주의로부터 파생된 ‘개인 가치관에 대한 비호’는 유지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가치관에 있어서 타인의 영역과 자신의 영역의 범위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부닥치고 있다. 이 말은 단순히 타인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위의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타자와 나가 만날 수 있는 공론장조차도 소멸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분석은 의미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시뮬라크르에 대한 동물적 반응처럼 보이는 현상들을 마주하고 있다. 타자를 ‘빨갱이’나 ‘적폐’로 전락시켜 버리는 선전문구에 동물적으로 반응하는 유권자들이나, ‘여성부 폐지’, ‘여성정책 확대’에 실질적인 검토 없이 즉물적으로 반응하는 집단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그의 이론은 일정 부분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데이터베이스’와 같은 기술적 용어를 사용하여 근대적 정신과 멀어지려 하는 듯한 서술을 반복한다. 즉,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과 같은 낙관주의적인 태도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으로 읽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동물화 한 사회에서 인간은 커뮤니케이션 없이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를 해석하면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혹은 커뮤니케이션의 합리성만으로는 윤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즉, 새롭게 등장한 ‘동물화’한 사회에서의 대화는 반드시 이성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의미가 있다. 실제로 정치적 의사표현이 공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매개체인 의회는 덕이 상실된 공간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민적 공공성 또한 변질되었음은 분명하다. 발화자가 누구인지가 가장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되는 토론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저 단순한 선악의 대립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는 당파성과 진영논리 혹은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어 민주주의적 토론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데이터베이스 이론은 인간 이성의 부족한 면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대화의 부재 상황에서 개개인의 동물적 욕구를 추구하는 것만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인가? 그의 ‘데이터베이스’라는 단어는 ‘집단 지성’과 대응되는 언어적으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기술적 비유인 것인가? 또한 그의 관점에서 평등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페미니즘이 될 수도 있고, 이대남으로 대표되는 남성약자론이 될 수도 있다.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해당하는 큰 이야기는 결국 읽는 사람의 해석에 의한 작은 이야기로 전락하고, 이렇게 읽힌 작은 이야기는 그저 데이터베이스로 회수되는 회로에서 작동된다. 그렇다면, 그의 이론에서 ‘열린 대화의 장’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개개인이 각자의 가치관 속에서 동물적으로 욕구하며 즉물적으로 만족하는 사회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인가?


필자의 해석을 덧붙이자면 아즈마 히로키 스스로도 자신의 이론이 담론 가능성, 사회의 전체상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부족한 견해로, 이러한 일련의 비판들을 방어하기 위해 그는 데이터베이스를 향한 인간의 욕망과 시뮬라크르를 향한 동물적 욕구가 해리적으로 존재하기에, 커뮤니케이션이 없더라도 현대 사회는 유지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 즉, 타자의 가치관 혹은 동물적 욕구 또한 데이터베이스로 회수되고, 이를 향한 인간적 욕망은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성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정보 기술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할 뿐이다. 그의 저서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은 2001년에 일본에서 간행되었다. 1995년, window95가 보급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기술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인터넷이라는 쌍방향 매체가 가지고 있던 본래의 가능성은 익명성을 갖춘 불투명한 타자와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즉, 상대방의 위치와 사회적 맥락, 발화자의 가치관을 가치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닌, 순수한 내용을 기준으로 가치 판단을 이루는, 자신과 낯선 자와의 교류를 담보해 주는 기술이었을 것이다. 즉, 그에게 개인의 동물적 욕구 =사적인 메시지를 대화의 장으로 연결시키는 매체인 SNS의 등장은 정보 기술의 비호를 받은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로 등장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 기술은 변질되어 오히려 피아식별을 강화시키고,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하며, 자신을 둘러싼 정보의 유토피아 속에서 일말의 탈출 욕구조차 상실되었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라는 기술이 오히려 정보 기술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좌절시킨 것이다.


그의 ‘데이터베이스’ 이론이 정확히 무엇을 지시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후속 저서를 찾아보자. 그는 <일반 의지 2.0>에서 자신의 책은 <사회 계약론>의 독해가 아닌 루소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2차 창작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고백한다.(36) 그의 주장에 따르면, 루소의 일반의지는 실제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사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일반의지는 수학적으로 실체화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빅데이터가 바로 일반의지 2.0이라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인식 외부의 구조나 공론장의 현 실태를 받아들이고, 이에 맞는 정치의 변혁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적/공적, 비타자/타자를 분할하는 추상적인 틀을 버리고 보다 구체적인 형태로 논의를 끌어가야 한다. 그리고 이런 방향으로 발상을 전환했을 때, 일반의지 2.0이라는 사상이 정치와 공공성에 반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37)

그는 그의 저서 <정정 가능한 철학>에서 위르겐 하버마스를 비판하며 자신의 데이터베이스 이론을 전개한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그는 빅데이터를 루소의 일반 의지의 위상에 놓음으로써 ‘데이터베이스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즉, 트위터와 같은 SNS 상의 사적 욕구들을 총망라한 집단적 무의식의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민주주의가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데이터베이스 정치의 폭주를 견제하기 위한 ‘숙의 민주주의’ 또한 존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38) 또한, 다른 저서 <철학의 태도>에서는 자신의 과거 저서 <일반의지 2.0>에서 주장한 데이터베이스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야기한다. 그가 제시한 데이터베이스적 민주주의란 일반 시민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공론장을 만들고,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정치에 대한 견제를 위한 도구임을 고백한다.(39) 그는 ‘소통’을 새롭게 해석하는데, 소통은 오히려 다양한 의견을 몇 개의 대립축으로 환원하기에, 소통 없는 의견이 모아질 수 있다면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일반의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파편화된 사회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수용 가능한 정도의 복잡성을 넘어섰고, 따라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정정 가능한 철학>에서와 같이 일반의지 2.0의 전체주의화를 보완하기 위한 전제로 ‘충분히 민주화된 사회’와 ‘충분한 인권 의식’, ‘충분히 다양성이 확보된 사회’라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40) 즉, 그의 ‘데이터베이스적 민주주의’는 인식 외부의 ‘동물화 한 사회’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근대적인 공론장의 가능성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공론장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인 것이다.


필자의 부족한 견해로는 그의 ‘데이터베이스’ 개념과 ‘동물화’ 개념은 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실제로 하버마스적 공공권의 전제가 되는 ‘이성적 인간’, ‘절차적 토론’, ‘진지한 논의와 진지한 참가자’는 현대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비평과 정치가 미디어화되고 스포츠화 되어 단순히 자신이 응원하는 당이 이기고 자신의 가치관을 긍정해 주는 대상의 승리만을 바란다. 또한, 범람하는 음모론, 가짜뉴스들은 결국 개개인의 동물적인 행위로 탄생한 진짜와 구별되지 않는 시뮬라크르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 ‘큐아논’으로 대표되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음모론 추종 집단이 좋은 예시이다. 그들의 음모론적 세계관은 인터넷의 개별적 음모론을 모두 연결한 데이터베이스적 세계관이다.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그들은 ‘체리피킹’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별 음모론을 적재적소로 사용한다. 또한, 그가 제시한 2층 구조처럼, 이제 미디어의 옳고 그름은 읽는 사람에 의해 판단된다. 즉 심층의 ‘커다란 이야기’에 의해서 표층이 정해지는 근대적 구조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문제의식=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이 유용한 이유는 분명 현대 사회의 의식 외부에 존재하는 구조가 근대적 모델로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데이터베이스 민주주의’는 결국 민의로 작동하는 대중정치나 극단주의의 집단사고나 정체성 정치의 형태로 귀결될 뿐이다. 그의 저서가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무의미하다. 적어도 당시의 정보사회의 등장은 긍정적인 형태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의 정보 기술이 가져온 대화의 공간은 아즈마 히로키가 지적한 ‘오타쿠적 사교성’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보 교환이라는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형식화되고 형해화된 사교성은 적어도 타자의 가치관에 대한 가치 판단의 과정이 전제된다. 세월호 사건 이후로 정치적 공간에서 중립적 태도는 ‘악’으로 규정되었고, 실질적으로 중립에 설 수 없는 현실적 상황을 마주하였다. 당시에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와 같은 말이 유행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현상은 비극적 사건을 공론의 장으로 대두시킨 SNS 기술이 한몫했다. 이때의 사회는 극단주의적 형태와 이분법적 대립이 존재하긴 했지만, 적어도 정치 참여적이며, 이성과 논리를 갖춘 토론의 가능성이 존재했으며, 심지어 촛불집회를 통한 정치적 효능감 또한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사회는 단순히 이분법적 대립의 시대를 지나 무기력증의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여성단체들도 사회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정치적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이대남으로 대표되는 남성들 또한 세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정치적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극단주의뿐만 아니라, 패배주의와 적대심 또한 에코 챔버 효과를 일으킨다. 이러한 SNS 기술은 결국 사회 전반에 무기력증과 절망감을 흩뿌리고 있다. 20년도부터 시작된 ‘자살하면 그만이야’, ‘알빠노’, ‘슬픈 개구리 페페’(41),‘나거한’ 따위의 반사회적이고 자조적인 밈이 유행한 것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거 ‘김치녀’, ‘한남’과 같이 적대 집단을 직접적으로 비하하는 용어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집단 내에서 사회적 방언처럼 구사되는 은밀한 심벌들만 생겨나는 것 또한 연장선상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필자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현 사회의 문제점은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 내리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기인된 극단주의 또한 문제지만, 현재의 사회상은 ‘혐오의 시대’를 지나와 혐오할 상대조차 없어진, ‘그저 패배주의를 무한히 내면화하는 기이한 사회로 병폐화 되고 있지 않은가’라는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사회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즈마 히로키적 데이터베이스로는 불가능하다. 그의 저서가 예견하지 못한 기술적 디스토피아가 이미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물화 한 사회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아즈마 히로키는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동물적인 행동의 집적을 데이터베이스 민주주의라는 공적 영역으로 소환했다. 하지만, 그 또한 ‘숙의’에 기대고 있듯, 우리는 결국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고,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아즈마 히로키가 숙의에 기대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가 모순을 주장하고 있음을 폭로하게 된다. 그가 하버마스를 비판하기 위해 주장한 데이터베이스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 이성에 대한 총체적 비판’은 수행적 모순을 함축하여 수행적 일관성을 지킬 수 없게 된다. 하버마스는 수행적 일관성은 합리적 담론의 필수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지적한다. 담론의 필수적 조건이란 화자가 자신의 의도를 진실하게 밝히는 것, 타자를 이성적 주체로 인정하는 것, 스스로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일이 필요할 경우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42) 따라서 아즈마 히로키적 모델은 자신과 타자를 모두 ‘동물화 되었지만 숙의를 거칠 수 있는 이성적 존재’로 상정하였기에 수행적 일관성을 부정하며 수행적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인간을 코제브적 동물로 비유하는 급진적인 비판은 인간 주체의 비판적이고 능동적인 자율성이 사라지게 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급진적 비판은 ‘현대적 위기의 근원이 주체가 포착하거나 개입할 수 없는 영역으로 이전되게 한다’고 지적한다. 즉,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사유와 실천의 능력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즈마 히로키가 ‘일반의지’와 같은 규제적 이념을 소환하여 사물화 가능한 기술적 무의식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현대적 위기의 해결책을 주체의 능동적 실천이 아닌 동물적 반응으로부터 추출되는 무의식과 기술적 환원주의에 기대는 모순적이면서도 무책임한 실천적 태도로 귀결된다.(43)

왜 필자가 모순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분명 아즈마 히로키는 근대적 이성 모델을 비판하는 학자=포스트모더니스트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데이터베이스 모델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델의 그것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자크 데리다 해설서 <존재론적, 우편적>으로 주목을 받은 바가 있다. 근대적 이성의 해체를 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주의와 같은 과학 기술적 환원주의와 대립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프로이트적 무의식과 같은 ‘탈이성’을 말하면서도 데이터베이스나 빅 데이터와 같이 모든 정보를 과학적으로 환원하는 ‘과학주의’로의 도피를 보이며 양면적인 태도를 보인다.

또한, 아즈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델을 차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해리적인 오타쿠의 소비형태를 보편화시킴으로써 인간을 간주체적인 욕망이 아닌 동물적인 욕구로 고독을 해소하는 존재로 전락시켰다. 따라서, 그의 모델은 근대적인 객체-주체의 틀도 아니며 하버마스적인 주체-주체의 틀 또한 아니다. 하버마스는 조지 허버트 미드의 사회 심리학적 이론을 참조하는데, 미드에 따르면 생각하는 나(주격 I)와 생각되는 나(목적격 Me)가 존재한다. 하버마스는 이를 인용하여 ‘이러한 나의 자기 관계라는 것은 너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즉, 1인칭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2인칭이 ‘나에게 대해서’ 가지는 관점을 수용하는 것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목적격으로서의 나는 상대방이 나에 대해 가지는 관점들을 통해서 구성된다. 이러한 목적격으로서의 ‘나’는 주격 ‘나’를 전제로 존재할 수 있다. 이 양자는 서로를 전제하고 있으며, 자아의 성립 조건에 타자관계가 매개되고 있다.(44) 이를 이론적 자기 관계라고 명명한다.

하버마스는 이론적 자기 관계를 실천적 자기 관계의 전제로 삼으며 실천적 자기 관계 즉, 도덕적 주체로서 성립하기 위한 방식 또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즉, “사회적인 ‘우리’의 상호주관적 관점으로부터 저항적 ‘나’의 충동성과 창조성에 제한을 가하는 ‘목적격 나’를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45) 이러한 저항적 나는 사회적으로 관습화된 규범에 합리적으로 비판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율성과 능동성이 부여된다.

아즈마 히로키는 하버마스를 비판하면서도 근대적 모델인 주체-객체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오타쿠의 해리적 사교성을 이야기하며 시뮬라크르의 표층에서는 ‘주격 나’로서의 주체만이 존재하는 동물적인 주체를 제시하면서도, 데이터베이스의 심층에서는 간주체적인 인간의 욕망을 보이는 사교적인 ‘주격 나’와 ‘목적격 나’를 해리적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가 <일반의지 2.0>에서 제시하였듯, 대의제 민주주의를 대체할 ‘데이터베이스적 민주주의’란 표층에서 진행되는 시뮬라크르를 향한 동물적 욕구들=집단적 무의식의 집적이므로 하버마스적 관점에서 ‘주격 나’만이 존재하는 의사소통이 소멸된 표층에서는 그 어떤 도덕적 주장도, 합리적인 비판도, 자신에 대한 반성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데이터베이스 민주주의는 오히려 아노미 상태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실천적 태도는 무엇일까?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의 저서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공론장의 역사적 발생을 탐색한다. 요약하자면, 최초의 공론장인 상인들 간의 서신교환체제는 인쇄술의 발달이라는 정보전달 기술의 변화와 함께 저널리즘으로 발전했다. 이는 곧 부르주아 공론장이라는 집합체로 발전했고, 후에는 문예적 공론장, 최종으로는 정치적 형태로의 공론장으로 변화한다. 그가 제시하는 문예적 공론장의 특징은 지위의 개념 배격, 성역화의 거부, 그리고 새로운 관점에 대한 개방성이다. 이는 이상적 형태의 공론장의 조건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이내 제국주의가 대두하였고, 이는 공론장의 재봉건화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공론장의 대두로 약화된 공적 영역의 영향력이 다시 부활함과 동시에 정보 기술이 발달함으로써 공론장의 역할이 위축되었다는 것이다.(46) 변질된 공론장은 타블로이드 언론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여론관리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최초의 공론장이 정보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발생하였듯, 그는 ‘전 세계적 컴퓨터 네트워킹’이 정치적 공론장의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47) 그는 최근 저서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을 통해 디지털 정보 시대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을 흐릿하게 하고 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인터넷 속 공론장이 정체성 정치를 위한 파편화의 위험성과 수많은 섬우주들이 확산되면서도 서로를 차단하려 하는 배타적인 형태를 띠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현실적 문제에 대하여 그는 기존의 매체와 달리 뉴미디어에서는 제작 과정에서의 합의와 토론의 과정이 생략되므로, 플랫폼과 정부가 뉴미디어를 규제하고 일정 부분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는 쇼사나 주보프 교수를 인용하여 디지털 기업의 감시자본주의 아래에서 미디어 매체에 대한 책임이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그의 지적은 사실 24년의 우리들에게 새로울 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실천은 비판적 사고 능력 또는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혹은, 의도적인 타자와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예를 들어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검색어가 아닌, 내가 평소에 싫어했던 진영 혹은 반대하는 의견에 대해 검색을 해보는 것이다. 실제로 캐스 선스타인은 서로 다른 성향의 사이트의 링크를 의무화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쌍방향 매체인 인터넷의 시대에선 누구나가 저자의 위상에 존재할 수 있다. 개개인이 미디어 매체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윤리적 고민과 책임, 그리고 제작 과정의 합의와 토론의 추구 또한 좋은 방향의 실천일 것이다. 이러한 해결책들은 무언가 아쉬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고리타분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결국은 인간 이성과 합리성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개개인의 실천적 태도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추하게 된다. 심지어 인간 스스로가 자신들의 의지를 의심하여 ‘링크 의무화’ 따위가 제시되고 있는 사회 현실은 슬프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아즈마 히로키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아예 망가뜨리는 극단적인 또는 낙관적인 ‘데이터베이스 민주주의’를 제시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러한 사회 이해에는 ‘사회 기반 구조 자체가 동물적으로 타락했다’는 인식 하에 하버마스적인 태도로는 건전한 공론장이 성립될 수 없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사적 영역인 동물적 행위의 집합체=데이터베이스가 공적 영역으로 이양되는 전환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구글이 “하버마스”라는 중재 AI를 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온다. 구글의 연구에 따르면 실험의 참가자 56%가 인간의 중재안보다 AI의 중재안을 선호했다. 외부 심사위원들 또한 AI의 명확성과 공정성을 높게 평가했고, 그룹 내의 분열을 감소시켰다고 전해진다. 또한, 공론화 과정의 참가자들의 감정 교류가 반영되지 않는 점과 이로 인해 공감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비판점이 제시되었다.(48) 이러한 기술적 동향을 보았을 때, 아즈마 히로키가 루소의 ‘일반의지’를 2차 창작의 수준으로 재해석하여 그의 ‘데이터베이스’와 일반의지를 동치 시킨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아즈마는 ‘감정적인 마음의 움직임은 비사회적으로, 고독하게 동물적으로 처리되는 것으로 크게 변하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는 더 이상 커다란 공감 따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49)고 지적한다. 즉, 그들의 지적은 오히려 포스트모던에서는 필요 없는 것에 대한 요청과 다름없다. 개개인의 동물적 행위가 ‘소통을 거치지 않고’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집단적 무의식의 데이터베이스로서의 일반의지를 제시한 것은 기술에 대한 낙관주의와 동물화 한 사회에 대한 응답임과 동시에 심지어 인간의 이성에 대한 처절한 수준의 비관으로 읽힌다. 즉, 이상적인 공론장의 재현이란 불가능하다는 종언과 같이 들려온다. 그런 의미에서 아즈마 히로키적 모델이 실현되고 있는 현실은 절망적이다. 인공지능이라는 데이터베이스의 집적이 “하버마스”라는 이름으로, 중재 AI로써 등장한 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진 사회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파편화된 우리의 사회는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서고 있다. 적어도 이견을 이견으로써, 타자를 타자로써 대하던 기존의 극단주의는 패배주의를 학습하며 닫힌 공공성 속에서 대상이 불투명한 혐오만을 반복하고 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우리도 알게 모르게 이미 인간 이성의 작동 불능을 인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기술이 등장한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에서는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인간 이성, 국가의 정책 따위로도 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아즈마가 ‘숙의 민주주의’에 미련을 가지듯, 인간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공공성, 대화에 대한 믿음을 버릴 순 없다. 나 자신부터 타자와의 만남에 열려있어야 한다. 정보 사회의 필연성으로부터 의도적으로 거리감을 두고, 우연성에 노출되는 환경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1) 칸트의 우주론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로, 태양계는 섬우주=은하의 일부이고, 이러한 섬우주는 우주에 흩뿌려져 있다는 추측에서 등장하였다. 이후, 사회학자 미야다이 신지 교수가 동일한 가치체계를 중심으로 결집한 집단 내에서만 소통하는 인터넷 현상을 ‘섬우주화’되었다고 표현하였다.
2)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오타쿠란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PC, SF, 특수촬영, 피겨, 그 밖에 서로 깊이 연관된 일군의 서브컬처에 탐닉하는 사람들의 총칭이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7쪽
실질적으로 ‘오타쿠’라는 말이 처음으로 지면에 게재된 것은 로리콘 만화잡지 <만화 브릭코> 1983년 6월호에 게재된, 나카모리 아키오의 기사 <'오타쿠 연구>에서 유래되었다. 마에지마 사토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2014, 39쪽
3) 아즈마 히로키, 2007,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13쪽
4) 1960년대를 흔히들 ‘정치의 시대’라고 부른다. 1960년 1월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미일 안보조약 개정안에 조인하자, 학생들과 시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일으켜 일본이 세계 냉전 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했다. 이는 다시 말하면 1960년데에는 아직 ‘전쟁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 전쟁의 그림자가 일본에 드리워지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진보와 보수가 치열하게 대립했던 시기여서 ‘정치의 시대’라 불린다. 홍윤표, <우주전함 야마토>와 ‘아버지가 없는 시대’ , 2019, 279쪽
5) ‘패배’의 사상과 대중의 발견-60년 안보투쟁과 요시모토 다카아키, 2024, 238~240쪽: 요시모토는 기존의 정치 체제=국가와 민족을 체제화하려는 태도를 해체하는 것으로서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의 힘’을 크게 상찬 한다. 그에 따르면 생산의 고도화가 촉진시킨 대중사회의 힘이야말로 스탈린주의 해체를 추동시켰다. 요시모토가 말하는 대중이란 이념이나 거대 서사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사실의 세계에 사는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사회나 국가를 바꾸기 위한 변혁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각자의 삶에 스스로를 기투할 뿐이다. 그러한 생활 세계는 어떠한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에도 훼손되지 않는 새로운 심층이 되어 현실을 지탱하고 있다.
6)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95쪽
7) 박해남, 현대 일본 사회와 꿈의 사회사, 2018, 9쪽: ‘미국과 소련이라는 체제를 이상의 대상으로 하고, 이를 추구한 보수와 진보 세력의 대립으로 특징지어진다. ‘미타는 일본 사회가 지닌 ‘이상’의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보았다. 먼저는 패전을 맞이한 일본이라는 국가가 어떤 체제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미타는 이를 ‘대문자적 이상’이라고 불렀고, 미국적 민주주의와 소비에트 공산주의라는 두 체제가 그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담지하는 이들은 이상에 맞춰 현실을 바꿔 나가려는 진보파와 현실의 무게를 중시하는 보수파라는 정치 및 사회 세력이었다. 이와 달리 ‘소문자적 이상’은 물질적인 풍요라는 목표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언젠가 미래에 부유해질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다양한 체험들을 통해 직감할 수 있는 가까운 미래상이었다.’
8) 여기서 사용된 ‘커다란 이야기’란 리오타르의 고유 개념이 아닌, 확대 해석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단순하게 ‘큰 이야기’란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를 뜻한다. 예를 들면 1970년대까지의 근대의 사회질서는 규범의식이나 전통의 공유로 확보되었다. 큰 이야기의 조락이란 개인의 자기 결정, 가치관의 다양성이 긍정되며, 큰 이야기의 공유를 억압으로 느끼는 시대 인식을 뜻한다.
9)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29~130쪽
10) 정치의 계절이 저물면서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학생 운동이 끝나고, 정치 혁명에 관한 이상은 저물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고도성장’을 향한 이상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이상 또한 80년대 이후로 현실화되면서 허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1) 중심적인 이념에 대해서 좌우가 갈라져 치열한 정치적 대립을 이어가던 ‘정치의 계절’이 68년 전공투 투쟁의 실패, 72년 아사마 산장 사건 등으로 종언을 맞았다. 오쓰카 에이지의 경우, 중심 이념이 되는 마르크스주의가 여러 혁명들이 실패로 귀결됨에 따라 부재하게 되어, 역사에 상상력을 부여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고 분석한다.
12)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58쪽
13) 박해남, 현대 일본 사회와 꿈의 사회사: 이상의 시대부터 불가능성의 시대까지, 문화와 사회 2018 26권 3호, 324쪽: ‘오사와 마사치(大澤 真幸)는 1995년에 있었던 옴 진리교도들의 사린가스 살포 사건이 허구의 시대마저 종언을 고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해석했다’
14) 장진호, ‘오타쿠 현상’과 전후 일본 사회의 변화, 2022, 315쪽
15)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시뮬라크르란, 데이터베이스에는 위배되지 않으면서 표층에서 읽어내는 유저에 의해서 정합적으로 만들어지는 2차 창작물들이다.
16) 오타쿠들이 항상 ‘자아의 껍데기’를, 즉 귀속집단의 환상 그 자체를 들고 다니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오타쿠들이 사회적 현실보다도 허구를 택하는 것은 양자를 구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현실이 부여하는 가치규범과 허구가 부여하는 가치규범 중 어느 쪽이 그들의 인간관계에 유효한가 하는, 예를 들어 아사히 신문을 읽고 선거에 가는 것과 애니메이션 잡지를 한 손에 들고 판매전에 줄을 서는 것 중 어느 쪽이 친구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보다 원활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유효성을 저울질한 결과이다. (중략) 취미의 공동체에 갇히는 것은 그들이 사회성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인 가치규범이 잘 기능하지 않아 다른 가치규범을 만들 필요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58쪽
17) 그가 말하고자 하는 ‘큰 이야기의 쇠퇴’란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의 상실을 뜻한다. 정체성 정치와 같은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필자의 견해와 상충하는 듯하지만,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민족주의나 전통의 부활을 바라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중략) 그렇다면 거시적인 수준에서든 미시적인 수준에서든 현재의 상황은 큰 이야기의 쇠퇴라기보다 이야기의 과잉이나 범람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큰 이야기의 쇠퇴’라는 표현을 상식적으로 이해한다면 이와 같은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반론은 실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포스트모던론에서 제기한 ‘큰 이야기의 쇠퇴’는 이야기 그 자체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한 특정 이야기의 공유화 압력의 저하, 다시 말해 ‘그 내용이 무엇이든 일단은 특정한 이야기를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는 메타 이야기적 합의의 소멸을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2007, 9~10쪽
18)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56~60쪽
19) 오쓰카 에이지의 작은 이야기란 특정한 작품 속의 특정한 이야기, 커다란 이야기란 이야기를 지탱하는 심층에 존재하는 세계관 및 설정이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64~66쪽
20)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67~71쪽
21)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72~80쪽, 이러한 분석은 미디어믹스의 상황에서 더욱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심층에 존재하는 데이터베이스를 각각의 아티스트가 개개의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즉, 데이터베이스(심층)와 개개의 작품(표층)의 양자 구별뿐이다.
22) ‘모에’는 ‘식물 따위가 싹트다’라는 뜻을 가진 ‘모에루’로부터 기원되었다는 말이 있으나, 어원이 불명확하다.
23) 시뮬라크르는 결코 무질서하게 증식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 수준에서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유효하게 기능하고 있다. 데이터베이스가 있어서 2차 창작물의 우열이 정해질 수 있다. 또한, 2차 창작 작가에게는 공격적인 의식이나 공격적 태도가 존재하지 않아서 원작자의 클레임을 받으면 창작을 그만두는 보수성을 가지고 있음. 이러한 태도 또한 2층 구조를 감안하면 이해가 된다. 2차 창작이 아무리 작품으로서의 원작을 침해해도 그것은 시뮬라크르의 수준의 침해이고, 정보로서의 원작 즉 데이터베이스의 수준에서의 오리지널리티는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07쪽
24)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95쪽
25) 코제브는 일본에 대해 묘하게 호의적이며 미래 사회의 모습이 일본적인 스노비즘으로 이행되리라고 예측하였다. 당시 일본의 번영은 확실히 이러한 기대의 실현을 향해 가는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또한 <비평과 포스트모던>에서 내셔널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를 지적하였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38~41쪽
26) 위의 책에선 간략하게 언급되는 정도로 사용되었다. 광의의 개념으로서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의식’으로 사용되었다.
27)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16~119쪽
28)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오타쿠계 문화가 스노비즘을 세련화 하고 있다. 그는 오카다 도시오의 <오타쿠학 입문>을 참조하는데, <오타쿠학 입문>에 따르면 ‘오타쿠적 감성의 기둥을 이루는 것은 ‘속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정으로 감동하는’ 거리감이다.
29)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26~127쪽
30)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48~151쪽 코제브의 <헤겔 독해 입문>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욕망 와 욕구의 차이로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은 욕망을 갖는 반면, 동물은 욕구만이 존재할 뿐이다. ‘욕구’란 특정한 대상을 가지고 그것과의 관계에서 충족되는 단순한 갈망을 뜻한다. 이에 비해 욕망은 욕구와는 달리 바라는 대상이 주어져 결핍이 충족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종류의 욕망의 대표적 예시로 성적인 욕망이 있다. 성적인 욕망은 생리적 절정감으로만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구조를 내부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자기의식을 가지고 사회관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간주체적인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31) 사이토 타마키,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2006, 59~61쪽 ‘오타쿠의 역사에서 그들의 기호와 행동의 괴리가 나타나고 있다. (중략) 나는 오타쿠에게서 결정적인 것은 상상적인 도착 경향과 일상에서의 ‘건강한’ 섹슈얼리티의 괴리가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중략) 예컨대 아니메 히로인을 우상화하면서 일상적으로는 그의 대체물로서 현실의 여성으로 참아 낸다는 것이 아니다.’
32)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44~148쪽 아즈마 히로키는 이러한 오타쿠의 소비 양상을 ‘해리적’이라고 표현한다.
33) ‘과시적’이란 아즈마 히로키가 만든 조어로 보이지 않는 데이터베이스를 가시적 형태로 드러내기 위한 욕망을 뜻한다. 즉, 최종심급에 해당하는 ‘커다란 이야기’에는 도달할 수 없고, 근대적 모델에서 작은 이야기로부터 커다란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탐구적 행위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시뮬라크르를 부분적으로 읽어내어도 결국은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34)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59~165쪽 심층에 커다란 이야기가 없으므로,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은 표층의 작은 이야기뿐이다. 90년대 이후의 오타쿠들은 작품을 해체하고 분석함으로써 데이터베이스 수준에서의 시스템에 대한 욕망과 표층에 존재하는 시뮬라크르의 수준에서 생기는 드라마에 대한 욕구가 공존한다. 전자에서는 오타쿠에게도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사교성이 요구된다. 이에 반해, 드라마=이야기에 대한 욕구는 동물적이므로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며 타자 없는 고독으로 채워져 있다.
35) 이는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무의미이다. 즉, 기술적 차원에서 배제된다는 것이다.
36) 아즈마 히로키, 일반의지 2.0, 2012년, 259쪽
37) 아즈마 히로키, 일반의지 2.0, 2012년, 110쪽
38) 아즈마 히로키, 정정 가능성의 철학, 305~306쪽


39) 아즈마 히로키, 철학의 태도, 35쪽
40) 아즈마 히로키, 철학의 태도, 15쪽
41) 자세한 내용은 박인성, 밈과 신조어로 읽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부족주의 -남초 커뮤니티의 정서적 평등주의와 위임된 성장서사를 참고하면 좋다.
42) 김원식 하버마스 읽기 , 2015, 136~137
43) 김원식 하버마스 읽기 , 2015, 096~097
44 ) 김원식 하버마스 읽기, 80~85
45) 김원식 하버마스 읽기, 93
46)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의 관해서는 조맹기, 2007년, 하버마스의 공론장 형성과 그 변동: 공중의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를 참조하였다.
47)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새로운 구조변동, 2024, 48쪽
48) 조선일보, 곽수근 기자, 2024년, “AI가 인간보다 중재 잘한다”... 구글 딥마인드, 중재 AI ‘하버마스’ 개발
49)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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