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의 디스토피아’ 읽기

by 굉굉E

1. ‘오타쿠’계 문화란 무엇인가?


일단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일본적 서브컬처로 대표되는 ‘오타쿠계 문화’란 무엇인가?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PC, SF, 특수촬영, 피규어, 그 밖에 서로 깊이 연관된 일군의 서브컬처에 탐닉하는 사람들의 총칭이다.’(1) 실질적으로 ‘오타쿠’라는 말이 처음으로 지면에 게재된 것은 로리콘 만화잡지 <만화 브릭코> 1983년 6월호에 게재된, 나카모리 아키오의 기사 <'오타쿠' 연구>에서 유래되었다.(2) 본래 ‘오타쿠’는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서툴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해설한 단어였다. 그런데, 미야자키 츠토무의 유아 연쇄 납치 살해사건 이후, ‘오타쿠’는 사회 부적응자, 예비 범죄자와 동일시되는 멸칭으로써 사용되게 된다. 하지만, 1995년작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킴으로써, 비평가 오카다 도시오가 ‘오타쿠’라는 단어의 차별성을 다시금 재고한다. 오카다는 ‘오타쿠’를 고도소비사회의 문화상황에 적응한 ‘뉴타입’이라고 재정의한다.(3) ‘오타쿠’라는 단어의 역사성이 보여주듯, 오타쿠계 문화에도 50년 정도의 역사가 존재한다. 이러한 오타쿠계 문화의 흐름은 역사의 변천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오타쿠계 문화의 변천과 사회적 변화의 관계를 파악하고, 서브컬처를 소비하게 된 현대 사회가 어떤 양상을 보이고 있는지 분석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가 될 것이다.(4) 또한, 이후의 논의에서부터 의 ‘서브컬처’는 오타쿠계 문화로서의 ‘협의의 서브컬처’로서 논의할 것이다.


다케쿠마 겐타로에 의하면 오타쿠계 문화의 기원 중 하나는 60년대의 오모토 쇼지의 괴수 붐으로 파악된다. 아즈마 히로키는 오타쿠계 문화의 주역을 총 세 세대로 나눈다.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60년대 전후 출생을 중심으로 <우주전함 야마토>를 십 대에 본 제1세대, 70년대 전후 출생을 중심으로 오타쿠계 문화를 십 대에 누린 제2세대, 80년대 전후 출생을 중심으로 <에반게리온> 붐 때 중고생이었던 제3세대로 나눌 수 있다.(5) 하지만, 오타쿠계 문화를 세대로 구분하는 것에는 ‘전후 정신사 시대 구분’(6)을 도입하는 것이 요구된다. 오타쿠계 문화가 사회적 변화에 응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전후민주주의의 역설


우노 츠네히로는 오타쿠계 문화는 전후 일본 사회의 모순을 체현한 문화이며, 1970년대 이후 소비사회의 본질이 깃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전후 일본은 정신적으로는 미성숙한 그대로이지만, 신체만은 성숙해졌다. (중략) 그것은 전후 일본의 표면의 문화가 어딘지 ‘12세 소년’인 것을 잊고 있는, 잊은 척하며 어른을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게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은 전후 일본의 유형성숙성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7) 그가 말하는 ‘모순’과 ‘유형성숙형 일본’ 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노는 현대 일본 사회를 전후로부터 생겨난 ‘다테마에’와 ‘혼네’가 잠식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헌법 9조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이다.


‘미국 핵우산의 보호 아래에서 평화를 노래하는 ‘기만’을 배제하고 성숙한 보통국가가 되어야 한다. 미국의 폭력을 긍정하는 것이 되더라도, 미국의 죄와 아픔을 대등한 입장에서 나누는 것이 오히려 윤리적이다.‘


‘헌법 9조는 위선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폭력을 긍정하는 세력에 참여하는 것보다, 위선을 굳이 택하는 것이 가장 큰 비판력이다. 자각적으로 위선을 택해야 할 것이다.’


우노는 (a)와 (b) 모두 전후 민주주의의 비판과 그에 대한 반(反) 비판으로서, 두 의견 모두 현시점에서는 정치적 실효성이 없는 공허한 정신론으로 분석한다. 그와 동시에 현실과 단절된 이야기가 반 세기 넘도록 지속되어 왔다는 것에 주목한다. 우노는 표면적으로는 대립하는 두 이야기가 ‘전후라는 긴 거짓의 시대를 국가로서의 올바른 성숙을 통해 끝내야 한다’라는 전제를 공유하는 성숙론에 기반한 공범관계로 파악한다. 즉, ‘위악과 위선’을 끌어안는 것, 거짓된 것을 ‘굳이, 감히’ 떠안는 것이 성숙이자, 전후 체제의 해제로 이어진다는 논리이다.(8) 이러한 일종의 ‘병리학적 세계’ 로서의 일본은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논해져 왔다. 가토 노리히로는 ‘인격분열’이라는 표현으로 전후의 본질을 표현한다. 가토에 의하면 아시아의 피해자들을 향한 사죄로 형식화된 다테마에(겉마음)와, 역사수정주의적 실언으로 나타나는 혼네(속마음)로 인격분열한 것이다. 즉, 보수와 진보가 대치하는 것이 아닌, 사실 하나의 인격에서 분열되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9) 다시 우노의 논의를 따라가면, 그는 (a)를 대표하는 문예 평론가 에토 준을 제시한다. 에토는 대미 종속에 의한 경제적 번영과 호헌에 의한 일국평화주의 모두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해야만 이루어지는 시늉에 불가하다는 이유로 비판한다. 그의 주장은 대미 독립과 자주 방위를 표방했지만, 1970년대의 냉전 체제 하에서는 현실성이 없는 이상주의에 불가했다. 우노는 에토의 주장은 현실과 단절된 허구적 이상이 진정한 이상임을 주장하는, 기만으로 가득 찬 역설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이 역설은 (b)로 대표되는 전후 민주주의 정신까지 구현하고 있다고, 즉 ‘철저하게 사적인 것이 역설적으로 공적이다’라는 전후 민주주의의 정신의 변주로 파악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10] 에토는 현실적인 대답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오히려 더욱더 철저한 시늉을 제시하였다. 에토의 전후적 성숙이란, ‘시늉’(기만)에 불과한 것을 자각하고 보다 철저하게 흉내 냄으로써 완수된다. 우노는 기만이 작동하는 방식 (성숙의 조건)을 전후 민주주의적 입장에서도 발견한다. 우노의 해석에 의하면 1991년 걸프전쟁 당시 발표된 ‘걸프전쟁에 반대하는 문학자 성명’에서, 그들은 자국의 파병 거부와 세계 평화를 동일시하는 ‘위선적’인 주장을 택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굳이’ 눈을 돌리고, 현실로부터의 연결을 끊고 작용하지 않는 것을 성숙의 조건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우노에게 있어서 전후란 ‘전후적 모순을 내면화하는 것’ 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성숙으로 여겨지던 시대인 것이다. [11]

우노는 문화와 전후 정신사를 연결하기 위해서, 세계와 개인, 공과 사, 정치와 문학이라는 이항으로 대립시킴으로써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그는 문학자 미시마 유키오로부터 ‘정치와 유리된 문학’의 위험성을 제시한다. 미시마와 도쿄대 전공투 참여자들의 토론에서, 도쿄대 전공투 참여자들은 미시마의 ‘천황 모티프’를 비판한다. 그의 소설에서의 ‘천황 모티프’는 작품 내에서는 그의 문학을 지탱하는 회로로서 작동할 수 있지만,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작품 외에서는 전전의 국가주의와 결부되는 것으로서 밖에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정치적으로 유리된 문학의 취약함을 지적한 것이다. [12] 미시마는 1965년 희곡 <기쁨의 거문고>를 통해서 좌익과 우익의 사상적 대립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정치적인 것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어 1968년 7월 잡지 <중앙공론>에 발표한 <문화방위론>에서 ‘문화 개념으로서의 천황’을 제시했다. [13] 미시마의 논지는 문화 개념으로서의 천황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적 비약과 갖가지 모순들로 이루어져 있어 쉽게 파악할 수 없다. 문화주의자였던 미시마는 ‘인간 존재에 보편적 토대가 존재한다’는 전제하에서 문화적인 천황을 등장시킨다. [14] 미시마는 문화의 전체성이라는 특징을 통해 문화의 공동체적 이념이 확고해지면,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저항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서 무차별적으로 포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학이 삶의 원리, 무윤리의 원리, 무책임의 원리라고 규정하고, 행동을 죽음의 원리, 책임의 원리, 도덕의 원리로써 규정하고 있다. (중략) 그들이 내 행동의 모순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에게 있어서 삶의 원리와 죽음의 원리는 하나이고, 일련의 것이며, 또한 서로 표리의 것으로서 내 안에서 나의 육체와 정신에 녹아 있는 바, 그들도 이러한 모순을 자신의 내부에 포섭하는 것으로 행동 원리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15)


여기서 그들이란 도쿄대 전공투 참여자들이다. 미시마에게 이상적인 천황제란 신민과 군주라는 존재 간의 적절한 정도의 거리감이 존재하는 천황제였다. 하지만, 전후를 거치며, 천황의 ‘인간 선언’과 미디어의 범람으로 ‘천황이라는 미적 대상’으로부터 ‘신비감’과 ‘환상’ 이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관념으로써 재구성한 문화 개념으로서의 천황을 이상적인 천황으로 탈바꿈시켰다. [16] 미시마에 따르면, 전후를 거치며 일본 사회는 <국화와 칼>에서의 국화만이 유지되어 있으며 칼은 단절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문화 개념으로서의 천황’은 국가 권력과 질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에도 손을 내밀 수 있다고 주장한다. [17] 미시마 유키오는 관념으로 재구성한 문화 개념으로서의 천황이 세계와 개인을, 문학과 정치를, 공과 사를 연결시키는 회로로 작동함으로써, 전공투 세대가 비판한 정치와 유리된 문학의 취약함을 보완한 것이다. 하지만, 전공투 세대가 비판한 대로 그의 ‘문화 개념으로서의 천황’ 또한 철저하게 사(문화)적인 형태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기에, 즉, 정치와 괴리된 절대적 미와 같은 이미지로 제시되었기에 철저하게 사적인 것이 오히려 공적이라는 전후적 역설에 의해 성립되고 있다.


3. 전후민주주의의 정치담론으로서의 모성


에토 준은 그의 저서 <성숙과 상실>에서 전근대를 어머니의 요람에 싸인 유토피아로, 근대를 누구나 아버지=(통치자) 치자가 된다는 심리적 속박에 붙들린 디스토피아로 묘사한다. 에토에게 어머니는 전근대적 운명론을, 아버지는 근대적 자기 결정론을 상징한다. 전근대적 어머니는 자기 결정론이 지배하는 근대를 두려워하여 전근대로 회귀하거나, 근대에 적응하기 위해 과도하게 배우자를 부정하게 된다. 그리고 끝내는 ‘어머니’는 스스로 붕괴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어머니의 붕괴에 의한 상실을 성숙의 조건으로 제시한다.(18) 그에게 ‘어머니’란 모성적인 자연이다. 그는 모성적 자연과의 전통적 관계로부터 이탈하여 근대적 부성이 확립된다면 근대적인 성인으로 성숙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 ‘모성’의 상실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점령시대에는 그들(미국-필자 주)이 ‘부’이자 그들이 ‘천’이었다. 그러나 점령이 법적으로 종결되었을 때, 일본인에게 더 이상 ‘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거기에는 ‘천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철저히 부재했다. 만약 그 잔상이 있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패배의 기억으로 부상해 부정되었다. 그 과정은 실로 농경사회의 ‘자연’ = ‘모성’이 ‘방치되어 버린’ 자의 불안과 치욕감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것과 표리일체를 이루고 있다."(20)


에토는 미국이라는 ‘역사는 짧지만 오래된 것의 가치를 중시하는 나라’로 파악하였다. 이에 반해 일본은 ‘파괴적으로 새로운 것을 탐닉하는 나라’로 정의함으로써 미국과 일본을 대비시킨다. 그는 데이비드 리스만의 이론을 도입함으로써, 미국은 내부지향형을 중시하면서도 타인지향형을 경박하게 생각하므로 오래된 것을 중시하며 과거와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21] 이에 비해 일본은 새로운 근대화를 위해 과거와의 단절을 애써 도모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22] 근대화=경제 성장의 욕망으로 ‘모성(23)’=전통을 상실한 것이다. 에토는 1960년대 고도성장에 들어선 일본의 모습에 주목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농경문화의 붕괴에 직면하여 한 개인이 ‘통치자=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전후의 정치적 국면’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24] 미일동맹체제 하에 가능하였던 경제적 욕망을 채우는 근대화로부터 ‘모성’을 상실한 일본은 미국의 철수와 함께 주체적 권위로서의 ‘부’를 부여하던 ‘계부’ 또한 상실하게 된다. 전후 일본은 단지 ‘아버지’가 있는 것처럼 생활하는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경제적으로 비대해진 성숙 불가능한 ‘12세 아이’로 남아버리게 된 것이다.

에토의 ‘성숙’은 전후 민주주의 지식인들의 ‘개인’이라는 이념이 놓친 ‘모범 시민’이라는 형상 밑에, 여전히 불식되지 않는 전전, 전중의 기억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복잡한 감정이 침전되어 있음을 환기시키려 하는 것이다. 즉, ‘성숙’ 이란 전후 민주주의 속 일본인과 전전, 전중기의 일본인의 괴리를 직시하고, 후자에 대한 상실감과 방치에 대한 죄악감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25] 즉, 에토는 ‘미국의 그림자’를 폭로하면서도 그 그림자 밑에서 자율적인 주체의 형성을 추구한 것이다. [26]


“그렇다면 에토가 제안하는 대미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일까? (중략) ‘미국’이 하나의 현존으로 일본인들 위에서 일본인의 의식의 첨단에 부착되어 있는 한 일본인은 흉내놀이의 세계에서 이탈할 수 없다. (중략) 대신 그가 내놓고 있는 대안은 “안보조약의 발전적 해소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동맹관계의 모색”이다.” (중략) ‘새로운 미일관계’가 출현하면 “흉내놀이 = 가상의 세계” 로서의 ‘전후’는 종언을 고하고, 일본인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27)


그에게 ‘미국’이 그림자로서 작용하는 이상, 미시마 유키오의 방패회도 어떠한 형태의 시위도 ‘흉내놀이’ = ‘시늉’과 진배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주장함으로써 소극적인 형태로의 자주독립을 모색한다. 에토의 논리는 ‘친미애국’이라는 형태로 자기모순을 내포하고 있기에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의 논리는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전후의 아이러니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기라타니 고진은 ‘그의 논리는 항상 무언가 얼마간의 자기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고 지적한다. 오구마 에이지 또한 ‘에토의 비평은 그 주장과는 반대로 극히 사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다.’(28)라며 그의 사적인 감상이 섞인 성숙론을 비판한다.


4. 전후민주주의의 성적 모티프로서의 모성


근대 국가에서의 성숙이란 ‘아버지’로 되는 것으로 비유되어 왔다. 이러한 ‘부성 모티프’는 두 가지의 형태의 성숙상으로 나뉜다. 하나는 위악적 형태로 표면상으로서의 아버지를 주장함과 동시에 실질적으로는 단념하는 것, 또 하나는 위선적으로 아버지를 거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주장하는 것이다. 우노는 전자의 대표로 에토 준과 후자의 대표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제시한다. [29]

에토는 ‘근대적 개인’이라는 ‘(통치자) 치자’ = 아버지 가 되는 과정을 ‘어머니’ = 모성 = 농경사회의 자연의 붕괴를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끌어낸다. 즉, ‘근대적인 개인’이라는 이념을 ‘어머니’로 대표되는 여성으로부터 찾는 뒤틀림을 보인 것이다. 이는 에토의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어 있는데, 에토는 근대적 개인으로써 새롭게 출발하려 했던 여성들의 자아실현 실패를 일찍 사망한 본인의 어머니와 대응시킴으로써 ‘어머니의 붕괴’를 비극적 결말로 정의한 바 있다.(30) 에토는 ‘근대’라는 가능성을 열면서도 ‘집 안’에서 요절한 ‘어머니’를 통해 미완에 그친 여성들의 성장을 몽상했다. 이는 어머니의 ‘전근대’ 탈출 극이었다.(31)

에토의 에세이 <일본과 나>는 그가 미국에서부터 돌아온 후, 일본에서의 생활을 고백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에토는 자신의 아내를 향해 폭력을 휘둘렀던 기억을 담담하게 고백하는데, 에토 스스로도 그것은 아내를 향한 폭력이 아닌, 자신 안의 무언가와 싸우는 것과 다름없었다고 통절한 고백을 이어 나간다.

<일본과 나>를 요약하자면, 일본으로 돌아온 그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유로 집이 물리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과거 일본 사회에 대한 상실감과 집이 설 지반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끝끝내 아내를 구타한다는 내용이다.(32) 그의 절절한 고백이 말하듯, 그는 ‘아버지’인 것을 확인받기 위해 아내에 대한 의존적인 접근을 반복한 것이다. 우노는 에토의 고백은 표면상으로는 아버지임을 내세우며 아내에게 의존하는 일종의 전후적 성숙상으로, 아이러니한 모순적인 회로를 작동시키기 위한 대가는 가정 내의 피차별 계급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지적한다.(33)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의 전반적인 메시지는 20세 기적 이데올로기 = 근대적인 ‘거대 담론’ 으로부터의 거리감을 표시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의 메시지는 ‘아버지’가 되기를 너무 서둘렀었던 사람들의 과오가 큰 전쟁들과 연합적군 사건을 일으켰다는 판단 하에 제시된다. ‘아버지’인 척하는 것으로부터의 ‘디태치먼트 (무관심, 초연함)’ 을 시대에 대한 응답으로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옴진리교가 벌인 사린 테러를 계기로 시대를 향한 ‘커미트먼트 (현실참여, 개입)’ 상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무라카미가 새롭게 제시한 ‘커미트먼트’ 모델은 에토의 태도와 비슷한 ‘여성에게 의존하는 모델’이다. 우노는 그 예시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태엽 감는 새>를 제시한다. 태엽 감는 새의 주인공은 꿈속에서 아내의 오빠 = 고도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악을 처단한다. 그 시각, 현실에서는 그의 아내가 주인공을 대신하여 그녀의 오빠를 살해한다. 그리고는 아내는 영영 실종된 채 돌아오지 않는다. 무라카미적 모델은 ‘커미트먼트’를 여성=아내가 수행함과 동시에, 남성=주인공은 실질적 ‘커미트먼트’의 반응만 누리는 것으로 실현된다. 즉, ‘아버지’로서의 자기실현은 실질적으로 획득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아버지가 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토와 무라카미 둘 모두 전후적 아이러니 = ‘‘아버지’가 될 수 없다’라는 체념 하에 진행되는 ‘가짜임을 자각하는 것’의 대가를 피차별자= 아내에게 전가하고 있다. 우노는 그들의 모델에서 대가를 치르는 대상이 되는 ‘아내’를 ‘어머니 = 성적 모티프로서의 어머니’로 해석한다.(34) 아무런 조건 없이 ‘아버지’를 연기하는 아이러니의 대가를 받아주고, 무조건적으로 긍정해 주는 것. 즉, ‘어머니’적인 것에 대한 의존과 책임 전가가 성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노는 이러한 ‘모자상간적 상상력’을 ‘모성의 디스토피아’로 정의한다. 모성의 디스토피아가 작동하게 되면, 세계와 개인, 공과 사, 정치와 문학 안에서 전자가 후자에, 세계의 구조가 남성적인 자의식의 문제로 회수되면서, 그것이 은폐되고 의사적인 관계를 맺는 상태가 된다. 이러한 무한히 긍정해 주는 어머니와 왜소해진 아버지의 결탁 =‘모성의 디스토피아’적 구조 하에서 ‘정치’는 허구화되고, ‘문학’은 자기 안에서 완결되어 왔던 것이다. [35] 자식의 성숙을 거부하고, 품 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정치=세계와 문학=개인을 단절시키는 “모라토리엄=사고의 일시적 중지”으로서의 ‘모성적 [36]= 어머니적 승인’은 주요하게 다루어질 예정이다.


5.‘의사일본’으로서의 서브컬처


아즈마 히로키는 그의 저서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의사일본’의 개념을 제시한다. 에도 막부에 일본에 입항한 ‘쿠로후네’ (서양식 철선)에 의한 강제 개항 이후, 메이지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서구화’는 “일본 다움”이라는 ‘미국에 대한 압도적인 열세를 반전시켜서 열세 = ‘일본 다움’ 이야말로 우세하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야기했다. 그들은 서구화로 인해 동양의 패자가 되었지만, 미국산 재료로 성공했다는 것에 대한 복잡한 심리가 내재되어 있었다. 이후, 일본은 또다시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소위 말하는 ‘좋았던 시절’의 일본은 망해버렸다. 그들은 또다시 미국산 재료로 ‘의사적인 일본’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상황에 처했다.

아즈마는 ‘오타쿠계 문화의 역사란 미국 문화를 어떻게 ‘국산화’하느냐 하는 환골탈태의 역사였다’고 표현한다.(37) ‘2차 대전 이후 50년대에서부터 70년대에 걸쳐 미국에서 수입된 서브컬처와 미국 문화를 어떻게 국산화해야 하는가’가 중요 해졌던 것이다. 패전으로 인한 심적 외상과 미국이라는 계부에 의한 ‘에도적 모성’=전근대적 전통의 소멸, 근대적 주체 = ‘아버지’로 성숙할 수 없다는 자각들이 지극히 미국적인 서브컬처를 일본적인 의장에 감싸도록 하여 현대의 오타쿠계 문화의 하이브리드적인 상상력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다면, 전후적 아이러니가 어떻게 오타쿠계 문화 속에서 표현되고 있을까?


6. 전후 민주주의가 낳은 두 가지 명제


오쓰카 에이지는 데즈카 오사무의 <승리의 날까지>로부터 전후 만화의 테마로서의 ‘아톰의 명제’를 제시한다. <승리의 날까지>에서는 미국과 일본의 만화 캐릭터들이 전쟁을 무대로 공방을 벌인다는 내용이다.(38) 오쓰카는 총 세 가지의 표현방식의 수준이 혼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제1의 표현방식은 ‘전전의 만화사적’ = ‘디즈니적’ 전통 애니메이션의 기호적인 캐릭터 표현이다. 기호적 표현의 예시로 우는 캐릭터에게 굵은 눈물방울이 맺힌다든가 앞의 컷에서 다친 캐릭터가 다음 컷에서는 멀쩡해지는 기계적인 방식으로의 표현이다. 제2의 표현방식은 자연주의적 표현방식이다. 원근법이 사용되거나, 다친 사람은 피를 흘리는 사실적 묘사를 뜻한다. 에이지가 주목하는 것은 제3의 표현방식으로, 양자가 혼합된 표현 방식으로서, 데즈카가 도달한 기호적인=디즈니적 ‘죽지 않는 신체’를 이용해서 자연주의 적인 신체가 지닌 성장과 죽음을 그리게 되는 모순적인 상황에서 발생한 표현방식이다. [39]

오쓰카는 소년 만화로써 짊어지고 있는 ‘성숙/성장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테마에 대응하여, “‘성장하지 못하는 신체’를 통해서 어떻게 성장을 그려낼 것인가’라는 모순적 상황을 창작가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가 전후 만화가 해결해야 할 ‘아톰의 명제’라고 지적한다.(40) 우노는 이러한 ‘아톰의 명제’를 국가로서의 성숙을 거치지 못하고, 국가로서 독립하지 못한 채 경제적 번영만을 손에 넣은 ‘12세 소년'(41) 일본이 어떻게 시민 사회로 거듭날 수 있을까 라는 전후적 성숙론 혹은 전후적 아이러니한 명제의 변주로 연결한다. 우노는 전후 애니메이션의 중심적 모티프였던 로봇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예시로 제시한다. 그는 일본이 독자적으로 ‘탈것으로서의 로봇’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아톰의 명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본래 인공지능의 꿈의 결정체였던 로봇에 ‘탈것으로서의 로봇’이라는 완전히 별개의 문맥을 부여하고, 기형적인 진화를 거친 것이 일본의 로봇 애니메이션이다.’(42) <철완 아톰>은 기계라는 성장하지 못하는 신체를 가진 아톰이 인간적인 내면과 희생, 죽음을 그리게 된다. 이는 과학 기술과 근대적 정신의 양의성을 주제로 삼은 최초의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철인 28호>에서는 2차 대전 말기에 일본군에 의해 개발된 병기인 ‘철인’이 설정으로 부여되는데, 이 철인은 누가 탑승하는가에 따라서 정의로운 사자가 되기도 하며, 살인병기로 돌변하기도 한다. <철인 28호>의 주인공은 자신의 부친으로부터 받은 강철 기계 신체에 탑승하여 정의를 집행한다. 우노는 <철인 28호>의 기계 신체는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세된 인간 (=일본) 이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 아버지가 되기 위해 쓰여야만 했다.’ 고 해석한다. [43]

우노 츠네히로는 ‘아톰의 명제’의 경우, 세계와 개인, 공과 사, 정치와 문학 양자의 연결을 후자의 측면에서 파악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일종의 남성적 나르시시즘 문제와 결부되어 개인적 측면에서의 성숙에 깊게 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노는 오쓰카 에이지의 ‘아톰의 명제’에서 그치지 않고, 전후적 아이러니가 전자의 측면에서 어떤 방식으로 만화/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우노에 따르면, 정치 레벨에서의 전후적 아이러니를 표현하기 위해 애니메이션에 요구된 것은 전쟁 모티프의 승화였다. 패전의 심적 외상과 평화 헌법에 의해서 직시할 수 없게 된 전쟁에 대한 승화인 것이다. 그는 특촬물에 사용된 미니어처 = 허구를 촬영하는 것으로 현실을 폭로하는 힘에 주목하는데, 괴수 영화/드라마에서의 괴수는 전후 사회의 허구성 = 거짓된 평화의 그림자를 폭로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44]

‘방사능 괴수는 부흥기의 도쿄를 불바다로 만들고, 지난 전쟁의 기억을, 그리고 냉전하의 일본도 그저 전선의 후방에 지나지 않음을 사람들에게 들이댔다. 동시에 그것은 전후라는 가짜 시대에 대한 꺼림칙함과 이러한 기만적 평화는 죄다 불에 타 사라져야 한다는 저주를 대변하는 기능을 했다. (중략) 전쟁이 내포하고 있는 대량 파괴에 대한 두려움과 동경이 섞인 것 = 현실을, 괴수라는 허구를 통해 표현했던 것이다.'(45)

이러한 허구를 경유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현실을 그려내는 것이 ‘고질라의 명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토 노리히로는 ‘아톰’과 ‘고질라’를 ‘인격분열’의 연장선으로 해석한다. 아톰의 ‘원자력의 평화 이용’과 고지라의 ‘핵전쟁 거부’는 전후의 아이러니로부터 생겨난 인격분열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아톰의 명제’는 근대적 성숙이라는 현실에서 성립할 수 없는 것을 허구 속에서 실현하는 기능을 애니메이션에 부여했다면, ‘고지라의 명제’는 허구만이 그릴 수 있는 현실을 파악하는 기능을 부여했다. [46]


7. 정치사적 오타쿠론


미타 무네스케는 현실과 짝을 이루는 ‘반(反) 현실’을 통해 사회의 성질을 규정할 수 있다 [47]고 주장한다. 미타는 ‘반현실’의 변천으로 전후사를 정리한다. 패전부터 미일안전보장조약 체결로 전후 민주주의의 이상이 배신당했을 때까지인 1945년부터 1960년까지가 공산주의(소련)/민주주의(미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이상’이 사회를 규정하는 반현실로 기능한 ‘이상의 시대’이다. [48] 세계적인 학생반란의 계절이었던 급진적인 사회개혁의 ‘꿈’이 반현실로서 기능한 ‘꿈의 시대’는 1961년부터 1975년. 그리고, 1970년대 후반 이후 소비사회는 상품으로써 유통되기 시작한 ‘귀여운’ ‘멋진’ ‘예쁜’ 의미를 휘감은 기호들로 대표되는 허구가 반현실로서 기능한 ‘허구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49]’

그의 제자 오사와 미사치는 미타 무네스케의 구분을 보완한다. 오사와는 1945년부터 1970년까지를 ‘이상의 시대’로, 1970년부터 1995년을 ‘허구의 시대’로 양분한다. 우노에 따르면,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의 오컬트 붐, <건담>과 같은 가공 연대기 스타일의 판타지는 ‘허구의 시대’의 증례로 볼 수 있다. 기존의 오타쿠계 작품에서는 하나의 세계관이나 역사를 찾아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건담 시리즈의 경우, 건담 팬들에 의한 허구적 연대기에 대한 욕망에 의한 소비가 주된 것이었다. 즉, 정치의 계절에서 서브컬처의 계절로, 이상의 시대에서 허구의 시대로의 이행은 현실 역사에서 서브컬처상의 가공 연대기로의 이행이기도 했던 것이다. (50) 오사와의 저작 <허구 시대의 끝>, <전후의 사상공간>에서 오사와는 ‘이상의 시대’란 커다란 이야기(51)가 그대로 기능하고 있던 시대, 허구의 시대란 커다란 이야기가 가짜로서밖에 기능하지 않는 시대로 정의한다. [52] 우노 츠네히로의 또 다른 저작 <제로 년대의 상상력>에서는 70년대 이후로 전후 민주주의라는 국민국가적 이데올로기와 같은 역사적 가치체계가 개인의 인생의 근거가 되는 ‘커다란 이야기’가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70년대는 연합적군사건, 석유파동을 겪으며 커다란 이야기가 작동하지 않기 시작하면서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이 가속화되었다. 우노 츠네히로는 이러한 허구의 시대에서는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 = 허구를 통해 ‘굳이/감히’ 연기하는 아이러니를 경유하지 않고도 개인이 세계로 접근 가능한 회로가 작동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53] 이러한 오타쿠의 허구 중시 태도를 나카지마 아즈사는 ‘아버지나 국가의 권위가 실추했지만, 오타쿠들 스스로 귀속해야 할 집단을 찾기 위해 자신의 영역을 등에 짊어지고 다닌다.’ 고 지적한다. [54] 즉, 사회적 현실이 부여하는 가치규범보다 허구가 부여하는 회로를 통해 개인이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 더 유효하다는 판단인 것이다. 하지만, 허구의 시대는 95년을 최후로 끝이 난다.


8.1995년, 허구의 패배 : 옴진리교와 에반게리온


1995년은 거품 경제 이후의 헤이세이 불황의 장기화의 시기에, 한신 아와지 대지진을 통한 성장 시대의 종언으로 대표되는 사건이 발생한 년도였다. 또한, 옴진리교의 사린 테러 사건과 더불어 사회적인 돌풍을 일으킨 ‘에반게리온’까지, 1995년은 사회학자나 비평가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숫자인 것이다. 전자의 경우, 정치적 의미에서의 좌절을, 후자의 경우, 개인적 의미에서의 상실을 상징한다. 대지진은 전후 일본을 지탱해 왔던 경제성장 신화가 붕괴하도록 하였고, 옴진리교의 사회 불안은 국가나 사회가 ‘가치’나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기능이 마비된 현실을 보여준다. 옴진리교의 사린 테러사건부터 다루어 보자.

‘정치의 계절’이 끝나자 현실 세계에서 충족시키기 어려워진 ‘거대 서사’에 대한 욕망이 허구를 소비하는 쪽으로 발현한 시대’라는, 역사적 변동성도 상실된 채, 풍요롭지만 어딘가 허전하고 공허한 허구의 시대에서 끝나지 않는 일상에 대한 탈출구로 대두된 두 가지의 욕구=허구가 있다. [55] 이 두 가지 욕구를 미야다이 신지는 ‘허구의 시대’에 반현실로 기능한 허구로서의 ‘두 종말관’으로 해석한다. 바로, <우주전함 야마토>로 대표되는 남성적 전쟁 욕구와 <우루세이 야츠라>가 대표하는 여성적 ‘끝나지 않는 일상’에 대한 적응이다.(56) 우노는 이러한 양분화된 허구를 향한 욕구 또한 전후 민주주의가 탄생시킨 표면적 대립, 실질적 공범 관계의 연장선상으로 해석한다. 전자가 일본을 연합국 측으로 재편하여 2차 대전을 다시 진행한다는 허구를 통해서 국가의 긍지를 회복하고자 하는 성숙한 척하는 ‘겉마음’ 라면, 후자의 경우는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풍요를 즐기며 모든 것을 망각한 척하고 싶다는 ‘속마음’이다. 즉, <우주전함 야마토>적인 부성과 <우루세이 야츠라>적인 모성은 공범 관계로 결합한다. 하지만, 이런 80년대의 허구의 시대는 90년대로 넘어옴으로써 뒤틀리기 시작한다.

아즈마 히로키는 일본의 90년대는 80년대 버블시대의 경제 호황이 사라지고, 1990년의 독일 통일로 인한 냉전의 종결로 포스트모던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던적인 소비사회가 심화되면서 역사나 사회가 개인의 삶에 가치나 의미를 부여해 주는 커다란 이야기가 조락된 상황에서 사회의 어른이 되는 지식인들은 과거의 정치적 담론으로 회귀하였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젊은이들은 어른=기존의 지식인과의 차별화를 위해서 정치로의 회귀를 거부하면서도 이야기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성애, 죽음, 자살, 근친상간과 같은 터부시되는 요소들이 문학과 드라마에 연속적으로 배치됨으로써 의도적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끝나지 않는 세계’의 외부로의 균열을 내려고 한 것이다. 이 의사적인 탈출구로서의 기호들은 항정신성 약품처럼 처방되었고, 소비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소외감과 우울, 그리고 내외면적 가치가 사라진 세상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일종의 허구= 의사적인 기호들 를 소비함으로써 ‘커다란 이야기’를 회복시키고자 한 문학적 시도들이었다. [57]

하지만, 이러한 항정신성 약품으로의 긴급처방을 버티지 못하고 오컬트라는 서브컬처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채, 현실에서의 자아실현을 추구한 옴진리교에 의하여 허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이 확인되었다. [58] 또한 사회적으로 컬트적인 인기를 구가한 <에반게리온> 또한 90년대의 소비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될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인공은 기존의 로봇 애니메이션의 도식을 답습하고 있다. 부친으로부터 받은 거대 로봇을 통해서 성장 혹은 사회적 승인을 받는다는 기존의 도식에서, 부친과 사회에 대한 불신을 배경으로 탑승을 거부한다는 변주를 가함으로써 사회적 자아실현 혹은 성숙을 향한 동경과 망설임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섬세하게 다룬다. 이 작품은 여러 요인들이 변수로 작용하여 마지막 2화가 당시 유행하던 자기 계발 세미나의 패러디의 일종처럼 마무리가 된다. ‘내면을 토로하고, 주변인에 의해 승인받는다.’는 자기 계발 세미나의 프로세스라는 메타 픽션적인 전개를 맞이하게 된다. [59] 이는 결국 ‘자기 계발 세미나’의 형태를 갖춘 현실로부터의 의사적 구제에 그치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세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히피 문화적 태도(60)는 결국 ‘옴진리교’로 대표되는 결단주의적 괴물을 탄생시켰다. 또한, 95년은 Window95가 등장한, 인터넷이 보급된 해이다. 정보사회로 돌입함과 동시에, 사물과 사물, 사람과 사물이 시공간의 제약 없이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해 현실을 정보화 함으로써, 허구=영상에 대한 욕구가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적은 비용으로 훨씬 양질의 재미를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노는 95년대를 이후로 이러한 결단주의가 자신의 가치관=작은 이야기를 무한히 긍정하는 정보사회의 모성과 결합하여 극단화하는 모성의 디스토피아가 도래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이 주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9. 데이터베이스적 동물


아즈마 히로키는 1995년 이후의 포스트모던 사회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의 저서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은 오타쿠적 문화를 분석함으로써 현대 사회와 포스트모던 그리고 오타쿠의 관계를 분석한 철학 서적이다. 아즈마의 이론은 ‘데이터베이스’와 ‘동물’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해야 한다.

아즈마는 일차적으로 오타쿠계 문화의 포스트모던적 특징들을 지적한다. 첫 번째로, 동인지, 동인게임으로 대표되는 2차 창작물에 대한 높은 평가가 장 보드리야르가 예견한 문화산업의 미래에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작품이나 상품의 오리지널과 복제의 구별이 약해져 그 어느 쪽도 아닌 ‘시뮬라크르(61)’라는 중간 형태가 지배적이 된다고 예측했다. 두 번째로, 오타쿠들의 ‘허구 중시 태도’(62)가 커다란 사회적 규범이 유효성을 잃고, 무수히 작은 규범의 밀림으로 교체되는 과정으로, 리오타르의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과 대응되기 때문이다.(63)

아즈마는 이어서 오쓰카 에이지의 <이야기 소비론>을 참조한다. 오쓰카 에이지는 소비되는 것은 하나하나의 드라마나 물건이 아니라 그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시스템=세계관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에이지적 표현으로 커다란 이야기로 불리는 시스템=세계관 자체를 팔 순 없으므로, 한 편의 드라마나 단편적인 물건으로 겉보기를 소비하게 하는 것이다. 에이지는 이를 ‘이야기 소비’라 명명한다. 아즈마는 이러한 이야기 소비의 위상에서는 작은 이야기의 소비를 계속한 끝에 시스템 전체를 획득하게 되면 진짜와 가짜의 구별이 불가능한 케이스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즉, 기존의 세계관과 정합성을 가지면서도 세계관에 포함되지 않는 새로운 캐릭터를 생산하여 판매한다면 이것은 오리지널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면서도 진짜도 가짜도 아닌 케이스가 된다는 것이다. [64]

아즈마는 이야기 소비 하에서는 2차 창작이라는 시뮬라크르의 범람은 예견된 수순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포스트모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트리모델이 아닌 데이터베이스적 모델을 도입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한다.

오쓰카 에이지의 이야기 소비론은 근대적 모델에 대응되고, 아즈마 히로키의 데이터베이스 소비론은 포스트모던적 모델에 대응된다. 즉, 아즈마에 따르면, 심층에 존재하는 커다란 이야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층에는 부호화된 정보의 집합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유저의 읽는 행위에 의해 만들어지는 별개의 웹페이지가 있는 2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즉, 표층에 나타난 작은 이야기는 심층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닌 유저에 의해 정해진다. 이러한 모델에서는 오타쿠계 문화에서의 작품의 우열은 데이터베이스의 조합 정도의 우열로 측정되며, 설정에 손만 대면 소비자는 2차 창작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원작이 무질서하게 시뮬라크르의 바다에 삼켜지는 것이 아닌, 데이터베이스=설정이 있고 읽어내는 방식에 따라서 원작과 2차 창작 모두 가능해지다는 것이다. 심지어 오타쿠 소비자들은 시뮬라크르가 깃든 표층과 데이터베이스의 심층을 명확히 구별하여 소비한다. [65]

아즈마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오사와 미사치의 ‘허구의 시대’라는 개념을 재등장시킨다. 오쓰카 에이지의 ‘이야기 소비’에서의 심층에 존재하는 커다란 이야기=세계관은 근대적 모델임을 지적한 것이다. ‘허구의 시대’에 유행한 건담의 가공 연대기로 대표되는 서브컬처의 설정이나 세계관들은 분명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의 일종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허구의 시대는 커다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세대의 날조를 통해서 유지된다. 아즈마는 근대에서 포스트모던으로 진행됨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세대는 처음부터 세계를 데이터베이스로 인식하기에 허구를 통해서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을 메우는 ‘날조’의 필요성이나 욕구는 없어진다고 지적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90년대의 오타쿠들은 80년대에 비해 작품 세계의 데이터 자체를 고집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나 의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일러스트나 설정만이 단독으로 소비되고, 소비자가 마음대로 감정 이입을 강화해 가는 다른 유형의 소비행동을 보인다. 새롭게 등장한 오타쿠들은 배후에 존재하는 정보만을 담담하게 소비한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러한 작은 이야기=시뮬라크르의 배후에 있으면서도 이야기성을 갖지 않는 영역을 커다란 비이야기=데이터베이스라고 명명한다. [66]

아즈마는 오타쿠계 문화에서 유력한 요소를 샘플링하고 조합하는 방식으로 캐릭터가 생성되며, 이 요소들은 소비자의 관심을 촉발하기 위해 발전된 장르적 존재임을 지적한다. 시장 원리 속에서 떠오른 기호들이며, 이러한 기호들은 소비자의 ‘모에(67)’를 효율적으로 자극하기 위해 발달되었다. 그는 이러한 기호들을 ‘모에 요소’로 명명한다. 따라서, 오타쿠계 시장이 발전할수록 등장인물의 설정의 전략이 요구되며, 이에 응답하여 모에 요소의 기술도 축적된다. 다시 말해 모에 요소가 데이터베이스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2층 구조 하에서 오타쿠는 ‘캐릭터=시뮬라크르(68)’와 ‘모에 요소=데이터베이스’를 왕복하며 소비한다. [69] 따라서 그들은 모에의 대상을 계속해서 바꾸어 소비할 수 있게 된다.

아즈마는 포스트모던에서 커다란 이야기가 조락한다면, 인간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라는 새로운 질문에 착수한다. 80년대의 일본에는 ‘뉴 아카데미즘’이라는 이름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입되었다. 아즈마에 따르면 당시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프랑스의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를 즐겨 참조했는데, 이는 80년대의 내셔널리즘과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70] 아즈마의 해석에 의하면 헤겔 철학에서의 ‘인간’은 자기의식(71)을 갖는 존재이며, 자기의식을 갖는 ‘타자’와의 투쟁에 의해 절대지나 자유나 시민사회를 향해가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투쟁의 과정을 ‘역사’라고 한다. 코제브의 저서 <헤겔 독해 입문>에서 코제브는 헤겔적인 역사가 끝난 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생존양식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미국적인 생활양식인 ‘동물로의 회귀’이며, 또 하나는 일본적 스노비즘이다. 코제브가 해석하는 헤겔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고자 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즉, 코제브에 의하면 자연과의 투쟁이 존재해야만 한다. 따라서, 소비자의 필요를 그대로 충족시키는 상품에 둘러싸여, 또 미디어가 요구하는 대로 모드가 바뀌어 가는 전후 미국의 소비사회는 인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물적이다. 코제브가 말하는 일본적 스노비즘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 그것을 부정하는 행동 양식이다. 스놉은 환경을 부정하고 형식적인 대립을 만들어내어 그 대립을 즐기고 애호한다. 코제브가 그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은 할복자살이다. [72] 아즈마는 1995년 이전의 ‘허구의 시대’는 일본적 스노비즘의 시대라고 주장한다. 역사적 의미와 거대서사가 사라진 자리를 서브컬처를 통해 메우고자 허구의 거대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오타쿠와 스놉의 공통점(73)이라는 것이다. [74]

아즈마는 1995년 이후의 시대를 ‘동물(75)의 시대’로 명명한다. 앞서 말했듯, 허구의 시대의 스노비즘 정신은 유효성을 잃었고 허구의 시대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존의 시대정신인 이야기 소비에서 다른 종류의 시대정신인 데이터베이스 소비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형 소비사회에서는 소비자의 요구가 타자의 개입 없이 기계적으로 충족되도록 개량되어가고 있다. 또한 오타쿠들은 그들 스스로의 감정적인 만족을 달성해 주는 모에 요소의 조합들로 손쉽게 동물적 욕구를 해소한다. [76] 아즈마에 따르면, 오타쿠들은 사교성 측면에서도 근대적 인간과는 상이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새로운 사교성’을 보이는데, 새로운 사교성이란 유익한 정보가 공유된다는 조건 하에 작은 공동체 속에서 발휘되며, 오타쿠 개인의 자발성으로 사교성이 발휘될 수도, 커뮤니케이션을 유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사교성이 형식화되고 형해화됨으로 인해 작은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게 되며, ‘커다란 공감’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즉, 시뮬라크르의 수준에서의 작은 이야기에 대한 욕구와 데이터베이스 수준에서의 커다란 비이야기에 대한 욕망에 의해 구동되는 데이터베이스형 세계에서 [77],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의미에 대한 갈망을 사교성을 통해 충족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동물적인 욕구로 환원함으로써 고독하게 채운다. 세계 전체는 단지 즉물적으로 누구의 삶에서 의미를 주지 않는 채 표류한다. [78]


10. 모성의 디스토피아


우노 츠네히로는 아즈마 히로키가 2001년대 이후의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정보의 집적인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자신이 ‘욕구’하는 대로 정보를 읽어 ‘작은 이야기’를 스스로 생성한다. 따라서 그곳에는 ‘커뮤니케이션’이란 중시되지 않는다. 즉, 아즈마 히로키적 분석은 ‘결단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95년 이후 개봉한 <에반게리온>의 극장판 <Air/진심을, 너에게>는 95년의 시대상을 지배한 ‘끝나지 않는 일상 뒤편에 존재하는 공허함’을 받아들인 채, 모성적 승인에 무한정 기대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타자와 커뮤니케이션할 수밖에 없음을 메타픽션적 연출을 통해 지적한다. 이는 <에반게리온 TV판>의 모성적 승인에 기대는 자기 계발 세미나적 태도에 대한 훌륭한 답가였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철저한 자기애로의 퇴각으로 이어졌다. [79] 흔히들 말하는 세카이계(80)로의 퇴행인 것이다.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메타픽션적 비평성은 모성적 승인에 매몰됨으로써 다른 방향으로의 무자각적인 결단주의로 향하게 되었다. [81] 우노는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와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구조개혁’ 노선, 그리고 소득 및 지역 격차에 대한 인식의 확대에 의해 90년대 후반과 같이 틀어박혀 있다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감각이 일본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82] 이러한 사회적 위기감에 의해 사람들은 각자의 ‘작은 이야기’를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욕구한다. 국가나 역사와 같은 ‘큰 이야기’가 가치와 의미를 담보해주지 못하는 기능저하의 상황에서 자신이 욕구한 ‘작은 이야기’를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는 결단력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83] 우노는 아즈마 히로키가 ‘커뮤니케이션’ 없이 ‘작은 이야기(84)’를 공유하는 공동성 속에서 각자도생 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에 반해, 2001년 이후의 ‘웹’은 작은 이야기들이 병렬된 채로 서로를 ‘노이즈’로 취급한 채 배타성을 띄게 됨을 지적한다. 웹이라는 확장현실 속에서 ‘작은 이야기’를 가치관으로 내면화한 공동성은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해 비대해진 모성에 의해 무한정한 승인을 받는다. 정보기술의 비호 아래에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자신의 ‘작은 이야기’가 진정한 것이라는 정치적 승리를 위해 ‘모성의 디스토피아’ 속에서 사고정지를 추구하며 다른 작은 이야기들의 공동성을 부수는 ‘배틀 로얄’에 매몰된 것이다. [85]


(1)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7쪽

(2) 마에지마 사토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2014, 39쪽

(3) 오카다 도시오, 오타쿠학 입문, 2010, 49쪽

(4)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22쪽

(5)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23~24쪽

(6) 장진호, ‘오타쿠 현상’과 전후 일본 사회의 변화, 2022, 297쪽

(7) 우노 츠네히로,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2018, 60~61쪽

(8)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27~31

(9) 김태진, ‘(탈) 전후’ 일본의 신체정치와 민주주의, [아세아연구] 제61권 2호 , 2018, 146~147쪽

(10)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년, 32쪽

(11)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년, 37~38쪽

(12)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년, 40쪽

(13) 한정균, 미시마유키오의 <문화방위론> 속 일본문화의 의미도출 과정 -테리 이글턴의 문화이론과의 비교연구- , 2022년 , 110~111쪽

(14) 한정균, 미시마유키오의 <문화방위론> 속 일본문화의 의미도출 과정 -테리 이글턴의 문화이론과의 비교연구- , 2022년 , 114~115쪽

(15)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년, 38~41쪽

(16) 홍윤표,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에 나타난 미의 원리 – ‘문화천황제’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2020년, 197~198쪽

(17) 홍윤표,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에 나타난 미의 원리 – ‘문화천황제’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2020년, 199쪽

(18)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년, 45~46쪽

(19) 홍윤표, 아시아문화연구 제51집 <우주전함 야마토>와 ‘아버지가 없는 시대’ , 2019년, 281~282쪽

(20) 서동주, 전후일본의 친미내셔널리즘과 문화보수주의 -에토 준의 전후민주주의 비판론을 중심으로-, 2018년 , 319쪽

(21) 내부 지향형이란 전통지향형에 비해서는 독립성이 생기지만, 온전히 전통으로부터 단절된 상태를 뜻하지는 않는다. 외부 지향형이란 동료나 이웃 등 또래 집단의 눈치를 살피며 자신보다 타인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인간형이다.

(22) 노슬기, 친미와 애국 사이의 타자 -에토 준의 <미국과 나>를 주축으로- , 2023년, 43~46쪽

(23) 여기서의 ‘모성’이란 에토의 표현을 따르자면 전근대적 운명론으로서의 ‘어머니’로, 전통지향형 인간이 추구하는 ‘전통’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에토적 성숙이란 ‘전통’을 유지하면서 내부지향형으로 나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24) 오미정, 고도성장기 소설에 나타난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재구축 -쇼노 준조의 <해 질 녘 구름>을 중심으로, 2018, 341쪽

(25) 남상욱, 전후 일본문학 속의 ‘성숙’과 ‘폭력’ , 2024년, 187쪽

(26) 장인성, 일본 보수지식인의 전후/탈전후의식과 ‘아메리카’ : 에토 준, 니시베 스스무의 아메리카니즘 비판과 보수적 주체화 , 2019년, 265쪽

(27) 서동주, 전후일본의 친미내셔널리즘과 문화보수주의 -에토 준의 전후민주주의 비판론을 중심으로- , 2018, 322~327쪽

(28) 노슬기, 친미와 애국 사이의 타자 -에토 준의 <미국과 나>를 주축으로, 2023, 126쪽

에토 준은 그의 저서 <일본과 나>에서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를 감성적으로 서술함과 동시에 이를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에 결부시키고 있다.

(29)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년, 45쪽

(30) 오쓰카 에이지,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 2017, 127~128쪽

(31) 오쓰카 에이지, 감정화 하는 사회, 2016년, 232~233쪽

(32) 오쓰카 에이지, 감정화 하는 사회, 2016년, 234쪽

(33)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48~49쪽

(34)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50~56쪽

(35)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54~56쪽

(36) 우노 츠네히로의 ‘모성’은 에토 준의 ‘모성’ 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의 모성은 개인이 성숙하지 못하도록 하는 성적 모티프로서의 모성에 국한된다. 이는 1950-60년대의 일본 사회상을 반영한 비평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남성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와 더불어, 모성을 강조한 중산층 사회 확립의 반동으로 생겨난 ‘모성사회’에 대한 비판 담론이 비평의 속 ‘모성’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도미코 요다(Tomiko Yoda)는 전후 제기된 이른바 모성사회론에서 모성의 역할이 부정적으로 그려졌던 사실에 주목한다. 특히 모성의 ‘과잉’이 아이들을 의존적으로 키워, 이들이 독립적인 개체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비판이 크게 일었다고 지적한다. 많은 논자들이 개인주의, 가족주의 등 ‘모성적 가치’가 법, 질서, 독립 성, 객관성, 공적 가치 등의 ‘부성적 가치’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성운, 전후 일본 정신의학계의 남성 동성애 인식, 2023, 113쪽

(37)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31쪽

(38)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74쪽

(39) 오쓰카 에이지, 아톰의 명제: 데즈카 오사무와 전후 만화의 주제 , 2009.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74~75쪽

(40) 우노 츠네히로,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2018, 67쪽

(41) 더글라스 맥아더는 일본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로, 전후의 일본을 ‘12세 소년’으로 비유한다.

(42) 우노 츠네히로,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2018, 132쪽

(43)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83쪽

(44) 이희원, 1960년대 냉전기 소년 SF괴수 영화의 괴수 표상 연구, 2019, 398쪽 : 한국의 경우, <대괴수 용가리>의 괴수가 가한 무차별적인 공격에 무너지는 도시와 피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휴전 형태로 봉인되어 버린 한국 전쟁의 참담한 기억, 냉전 이데올로기가 상정하고 있는 전쟁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의 SF괴수 영화에는 사람들의 피난 행렬이 강조되지 않지만, 한국과 일본의 SF괴수영화는 피난하는 사람들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강태웅, 고지라는 왜 일본으로 돌아오는가 -일본 SF가 그려내는 공동체 이미지의 특성과 변화-, 2008, 232쪽 : ‘도쿄대학 교수 요시미 슌아도 참전하였다. 요시미는 고지라에 의해 유린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지라는 일본군 병사의 망령이라기보다는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미국에 가깝다고 말한다.’

(45)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485~487쪽

(46)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89쪽

(47) 우노 츠네히로의 표현에 따르면, 세계와 개인, 공과 사, 정치와 문학을 연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48) 1960년대를 흔히들 ‘정치의 시대’라고 부른다. 1960년 1월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미일 안보조약 개정안에 조인하자, 학생들과 시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일으켜 일본이 세계 냉전 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했다. 이는 다시 말하면 1960년데에는 아직 ‘전쟁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 전쟁의 그림자가 일본에 드리워지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진보와 보수가 치열하게 대립했던 시기여서 ‘정치의 시대’라 불린다. 홍윤표, <우주전함 야마토>와 ‘아버지가 없는 시대’ , 2019, 279쪽

(49) 미타 무네스케, 사회학 입문: 인간과 사회의 미래, 2006 ,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95쪽

(50)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94쪽

(51) 여기서 사용된 ‘커다란 이야기’란 리오타르의 고유 개념이 아닌, 확대 해석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단순하게 ‘큰 이야기’란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를 뜻한다. 예를 들면 1970년대까지의 근대의 사회질서는 규범의식이나 전통의 공유로 확보되었다. 큰 이야기의 조락이란 개인의 자기 결정, 가치관의 다양성이 긍정되며, 큰 이야기의 공유를 억압으로 느끼는 시대 인식을 뜻한다.

(52)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29~130쪽

(53)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95쪽

(54) 나카지마 아즈사 <커뮤니케이션 부전증후군> , 44,49쪽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58쪽

(55) 정치의 시대가 저물고, 버블 경제에 의한 호경기와 소비사회가 정착하면서 ‘큰 이야기’는 작동하지 않지만 풍요로운 상태에서의 ‘끝나지 않는 일상’의 탈출욕구가 존재했다. 1980년대 말 버블기의 오컬트 붐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56)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97쪽

(57) 1993년 츠루미 와타루의 <완전 자살 매뉴얼>이 당시의 시대상을 단편적으로 나타낸다. 해당 책은 제목 그대로 자살 방법에 대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우노 츠네히로,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2018, 224~225쪽 : “ 이제 ‘거대한 한 방’은 오지 않는다. 22세기는 확실하게 온다. (물론 21세기는 온다. 아마겟돈 따윈 없으니까). 세계는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 - 츠루미 와타루 <완전 자살 매뉴얼>

(58) 박해남, 현대 일본 사회와 꿈의 사회사: 이상의 시대부터 불가능성의 시대까지, 문화와 사회 2018 26권 3호, 324쪽: 오사와 마사치(大澤 真幸)는 1995년에 있었던 옴 진리교도들의 사린가스 살포 사건이 허구의 시대마저 종언을 고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해석했다(大澤, 2009). 훗날 그는 일본 사회가 불가 능성의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선언했다(大澤, 2008). 동시대의 문화학자 아즈마 히로키(東 浩紀)의 경우, 허구의 시대를 계승하는 시대의 이름은 동물의 시대라고 주장했다.

(59)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102~103쪽

(60) 장진호, ‘오타쿠 현상’과 전후 일본 사회의 변화, 2022, 304~305쪽. 전후 초기인 1947-9년에 태어난 세대 즉 ‘단카이(団塊= 덩어리) 세대’가 젊은이였던 시기인 첫 번째 시대에 그들의 의식이 ‘세계를 바꾼다’는 것이었다면, 단카이 세대의 아이들 즉 1971-4년 정도의 출생자를 지칭하는 ‘단카이 주니어 세대’가 젊은이가 되고 혁명을 믿을 수 없게 된 두 번째 시대에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을 바꿔서 세계를 보는 법을 바꾼다’는 것이 되었고, 젊은이들이 형성하는 도시문화의 중심도 정치운동에서 서브컬처로 이동하게 되었다. 단카이 주니어 세대는 또한 ‘매스 미디어 세대’로서 특히 어린 시절부 터 TV의 강력한 영향 하에 대중매체 경험을 통해 자아를 형성한 세대이기도 했다. 1980년대 젊은이들의 세대는 그 이전 ‘정치의 계절’에 대한 반동으로, ‘의미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아사다 아키라에 따르면 ‘냉소적 참여’의 정신이었다. ‘정치의 시대’가 끝난 1970 년대부터 1990년대 전반까지의 이 시기 일본에서 한편에서는 특히 <우루세이 야츠라>와 같이 ‘현재와 일상을 즐기자’라는 러브 코미디 창작물이 서브컬처 영역에서 범람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음모론이나 유사과학을 매개로 한 ‘오컬트 붐’이 일기도 했는데 이는 ‘소비사회의 끝없는 일상으로부터 도피시켜 주는 장치’이기도 했다고 지적된다. 이러한 ‘오컬트 붐’에는 ‘핵전쟁 이후’라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디스토피아 세계를 전제로 한 서브컬처 작품들이 연관되기도 하였다.

(61)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는 시뮬라크르란, 데이터베이스에는 위배되지 않으면서 표층에서 읽어내는 유저에 의해서 정합적으로 만들어지는 2차 창작물들이다.

(62) 오타쿠들이 항상 ‘자아의 껍데기’를, 즉 귀속집단의 환상 그 자체를 들고 다니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오타쿠들이 사회적 현실보다도 허구를 택하는 것은 양자를 구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현실이 부여하는 가치규범과 허구가 부여하는 가치규범 중 어느 쪽이 그들의 인간관계에 유효한가 하는, 예를 들어 아사히 신문을 읽고 선거에 가는 것과 애니메이션 잡지를 한 손에 들고 판매전에 줄을 서는 것 중 어느 쪽이 친구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보다 원활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유효성을 저울질한 결과이다. (중략) 취미의 공동체에 갇히는 것은 그들이 사회성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인 가치규범이 잘 기능하지 않아 다른 가치규범을 만들 필요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58쪽

(63)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56~60쪽

(64) 오쓰카 에이지의 작은 이야기란 특정한 작품 속의 특정한 이야기, 커다란 이야기란 이야기를 지탱하는 심층에 존재하는 세계관 및 설정이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64~66쪽

(65)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67~71쪽

(66)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72~80쪽, 이러한 분석은 미디어믹스의 상황에서 더욱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심층에 존재하는 데이터베이스를 각각의 아티스트가 개개의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즉, 데이터베이스(심층)와 개개의 작품(표층)의 양자 구별뿐이다.

(67) ‘모에’는 ‘식물 따위가 싹트다’라는 뜻을 가진 ‘모에루’로부터 기원되었다는 말이 있으나, 어원이 불명확하다.

(68) 시뮬라크르는 결코 무질서하게 증식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 수준에서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유효하게 기능하고 있다. 데이터베이스가 있어서 2차 창작물의 우열이 정해질 수 있다. 또한, 2차 창작 작가에게는 공격적인 의식이나 공격적 태도가 존재하지 않아서 원작자의 클레임을 받으면 창작을 그만두는 보수성을 가지고 있음. 이러한 태도 또한 2층 구조를 감안하면 이해가 된다. 2차 창작이 아무리 작품으로서의 원작을 침해해도 그것은 시뮬라크르의 수준의 침해이고, 정보로서의 원작 즉 데이터베이스의 수준에서의 오리지널리티는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07쪽

(69)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95쪽

(70) 코제브는 일본에 대해 묘하게 호의적이며 미래 사회의 모습이 일본적인 스노비즘으로 이행되리라고 예측하였다. 당시 일본의 번영은 확실히 이러한 기대의 실현을 향해 가는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또한 <비평과 포스트모던>에서 내셔널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를 지적하였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38~41쪽

(71) 위의 책에선 간략하게 언급되는 정도로 사용되었다. 광의의 개념으로서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의식’으로 사용되었다.

(72)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16~119쪽

(73)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오타쿠계 문화가 스노비즘을 세련화 하고 있다. 그는 오카다 도시오의 <오타쿠학 입문>을 참조하는데, <오타쿠학 입문>에 따르면 ‘오타쿠적 감성의 기둥을 이루는 것은 ‘속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정으로 감동하는’ 거리감이다.

(74)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26~127쪽

(75)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48~151쪽 코제브의 <헤겔 독해 입문>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욕망 와 욕구의 차이로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은 욕망을 갖는 반면, 동물은 욕구만이 존재할 뿐이다. ‘욕구’란 특정한 대상을 가지고 그것과의 관계에서 충족되는 단순한 갈망을 뜻한다. 이에 비해 욕망은 욕구와는 달리 바라는 대상이 주어져 결핍이 충족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종류의 욕망의 대표적 예시로 성적인 욕망이 있다. 성적인 욕망은 생리적 절정감으로만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구조를 내부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자기의식을 가지고 사회관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간주체적인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76) 사이토 타마키,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2006, 59~61쪽 ‘오타쿠의 역사에서 그들의 기호와 행동의 괴리가 나타나고 있다. (중략) 나는 오타쿠에게서 결정적인 것은 상상적인 도착 경향과 일상에서의 ‘건강한’ 섹슈얼리티의 괴리가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중략) 예컨대 아니메 히로인을 우상화하면서 일상적으로는 그의 대체물로서 현실의 여성으로 참아 낸다는 것이 아니다.’

(77) 아즈마 히로키는 이러한 오타쿠의 소비 양상을 ‘해리적’이라고 표현한다.

(78)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 2007, 159~165쪽 심층에 커다란 이야기가 없으므로,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은 표층의 작은 이야기뿐이다. 90년대 이후의 오타쿠들은 작품을 해체하고 분석함으로써 데이터베이스 수준에서의 시스템에 대한 욕망과 표층에 존재하는 시뮬라크르의 수준에서 생기는 드라마에 대한 욕구가 공존한다. 전자에서는 오타쿠에게도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사교성이 요구된다. 이에 반해, 드라마=이야기에 대한 욕구는 동물적이므로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며 타자 없는 고독으로 채워져 있다.

(79) 우노 츠네히로, 젊은 독자를 위한 서브컬처론 강의록, 2018, 243~246쪽. 세카이계는 포스트 에반게리온 증후군으로도 불린다. 세카이계는 <에반게리온>의 노악적 비평성이 사라지고, 세계의 모든 문제를 자의식 문제의 비유로 취급한다는 자세를 철저히 굳히며 주인공 소년의 치유에만 주력하게 된다. 평론가 사라시나 슈이치로는 세카이계의 작품군을 ‘결말에서 아스카에게 차이지 않는 에바’라고 표현했다.

(80) 마에지마 사토시,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2014, 31~32쪽. 세카이계에 대한 기원은 2002월 10월 31일, 웹 사이트 스레드에 올라온 ‘세카이계라는 건 결국 뭐야’라는 타이틀의 글로 파악된다. 닉네임 ‘푸루니에’가 쓴 세카이계란 ‘에반게리온 같은 혼잣말이 극심한 작품’에 대한 비아냥이었다.

(81) 손지상, 서브컬처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가이드, 2020, 373~378쪽. ‘1990년대는 성장해야만 한다는 압박에 짓눌려 성장하고 싶지 않다는 내향적인 자기 안으로 도피하는 시대였다. (중략) 1990년대의 오타쿠 무리는 성장을 기피하는 방법으로 소녀 환상을 향한 수동 공격성을 발휘했고, 간접적으로나마 지배하려 했다. 특히, 전투미소녀와 독점적이고 기형적인 관계, 거의 어머니와 자식 같은 절대적 의존 관계를 소년과 맺는다. 사라이나는 이를 ‘몰락한 마초이즘’이라고 표현한다. 오타쿠들은 몰락한 마초이즘을 통해서 미소녀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행위를 통해 이해하는 능력이 있는 나라는 우월적 자기애를 확보한다’고 지적한다.

(82) ‘신자유주의’와 동반 퇴진한 고이즈미 노선 , 2008.09.26. 규제완화와 민영화, 작은 정부를 근간으로 한 구조개혁 작업은 대규모 비정규직 양산 등, 소득 및 지역 격차를 확산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때 당시 젊은 노동자들이 히키코모리가 되거나, 자학, 가정 내 폭력을 저지르는 등 반사회적 사건이 빈발하였다. 또한, ‘자기 책임론’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와 약자를 비난하는 논리가 빈번히 사용되었다.

(83) 90년대 말에 등장한 오타쿠들의 극우 단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탄생과 반한, 반중적 내셔널리즘, 정치적 좌우 대립이 다시 활성화된 것이 결단주의의 대표적 예시가 될 것이다.

(84) 70년대 이전의 ‘큰 이야기’로의 회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글에서 ‘큰 이야기’는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로 규정된다. ‘작은 이야기’를 자신의 가치관으로 결단하는 것은 (민족주의, 정치적 좌우 등) 기존의 ‘큰 이야기’가 다양한 국면으로 부활하고 증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이 글에서의 ‘큰 이야기’의 조락은 이야기 자체의 소멸이 아닌, 특정 이야기의 공유에 대한 압박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즉, 특정한 가치관을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는 정신이 소멸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은 이야기는 자신들의 공동성 안에서만 통용되는 특정 가치관을 뜻하게 된다.

(85) 우노 츠네히로, 모성의 디스토피아, 2022, 464~465. ‘일본에서는 아이러니가 결여된 사람들의 이야기 회귀가 진행되고 있다. (중략) 헤이트스피커는 물론 문화좌익까지, 구글로 5분이면 찾을 수 있는 편리한 진실을 근거로, 낡아빠진 이데올로기를 향정신성 약물처럼 소비하며 그 정신을 안정시킬 수 있다.’

keyword
팔로워 3
작가의 이전글혐오의 시대 - 동물화와 공론장의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