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릴 적부터 ‘취미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인식이 좋지 않은 게임 대신 무난한 대답이 될 수 있는 ‘영화’를 말하곤 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영화의 취향이 고약해, 소노 시온 감독의 <차가운 열대어>를 제일 좋아한다고 소개하고 다녔다. 어쩌면, 이 선호가 나의 캐릭터 형성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답했던 이유도 기억나지 않아 확신은 서지 않는다. 그에 반해 취미가 영화라고 떠들고 다닌 것이 무색하게 컬트적인 영화만을 고집해 와 영화에 대한 폭넓은 시야는 갖추지 못했다.
2. 요즘 들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평소에 언젠간 반드시 보겠다며 미루어왔던 영화들을 보고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라든가,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 같은 영화들 말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본 날의 기억이 생생한데, 시작하기 전에 화장실을 들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시작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방광에서 신호를 보내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호가 미약하여 참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허리를 피고 앉았으나, 이내 영화가 중반부로 접어들자 신호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순간이 하필이면 꽤나 중요해 보이는 순간이자 누가 봐도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 혼자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로 괜히 옆 자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만 십 분 가량을 반복했다. 평소에는 혼자 앉을 수 있는 구석 자리 중에서도 복도 쪽 좌석을 선호하는데, 그날 따라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복도와는 거리가 먼, 중앙도 뭣도 아닌 애매한 자리라 일어서면 뒷사람의 시야를 가림은 물론이거니와 복도에 앉은 사람을 온몸으로 가리며 나가야 하는 곤란한 자리였다. 결국은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자리에서 일어나 온갖 민폐는 다 끼치며 나왔는데, 고민한 것에 비해 일어나 출구를 향할 때는 너무 급해서 부끄러움도 뭣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는데, 좌석에 적힌 알파벳을 잘 못 읽어 본래의 자리 뒷줄에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왠지 사이드 좌석의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따갑더랬다. 서론이라고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로 서두를 뗀 것과는 상관없이 넷상에서의 ‘노악 행위’에 대해서 소회를 풀어볼까 한다.
3. ‘노악’이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행위를 뜻한다. 우리는 왜 넷상에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을 자처하는 걸까? 창작의 본질이 노악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까? 철학자 미하일 바흐친의 의견을 빌려 답변하고자 한다. 즉, 그것은 인간 본질의 고독함으로부터 기인한다. 어째서 고독한 것인가? 그것은 나 자신의 내면 속에 타인에게 드러내지 못할 ‘무언가’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즉, 응어리 진 자의식 혹은 잉여 자아가 우리로 하여금 타인에게 대화를 요청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타인에게 자신의 잉여 자아를 드러내는 행위는 자신의 약점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익명성을 이용하기 위해서 넷 상으로 숨어 들어간다. 우스갯소리로 비유하자면 ‘사이버 바바리맨’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나, 자전적인 글이나 만화를 창작하는 것이 좋은 예시가 되겠다. 자학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절절한 자기 고백이나 자전적인 창작물은 간절한 방식의 대화 요청으로 읽힌다. 즉, 내면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지독한 혹은 가혹한 방식의 해소이자 프로이트적 승화라는 것이다.
4. 사실 <브런치스토리>와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이전의 두 글과 같은 딱딱한 비문학이 아닌 ‘문학적인’('문학적인'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읽히겠지만, 단순히 소설이나 만화와 같은 광의적 의미를 떠올리시면 될 것 같다.) 글을 창작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책도 별로 읽지 않았고, 글도 쓰지 않았던 것에 비해 ‘딱딱한 글을 재미있게 잘 쓴다’는 꽤나 과분한 칭찬을 자주 받아왔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어릴 적 꿈은 만화가였다. 이후, 대학교 들어와서 처음 읽게 된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잊어왔던 창작에 대한 욕구에 불을 붙였다. 수동적이고 소심한 내가 문학 동아리에 자처하여 참여할 정도로. 하지만, 자전적인 내용을 창작을 통해 승화시키는 행위는 꽤나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내가 배출해 버린 자의식 넘치는 사소설을 스스로 퇴고할 때면 거의 고문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익히 그래왔듯 ‘내가 잘하는 영역’으로 도망쳐 왔다. 이것도 이제 와서는 의문이 든다만…
5. 다시 돌아와서,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은 작가의 메시지나 자전적인 이야기를 굉장히 세련되게 포장(포장이라는 표현이 맞는 건지는 의문이 든다.)한 소설이나 영화들이 많다. 나는 계속해서 그런 식의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하며 투정을 부렸을 뿐, 정작 실천한 적은 손에 꼽는 것 같다. ‘공부를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다.’라던가, ‘이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혹은 봐야 할 것들이 아직 남아있다.’라던가 하는 변명들을 동원해 가면서…. 지금도 에세이의 틀을 빌려 나의 심상 속 체념 혹은 푸념을 쏟아내고 있다. 이것이 일기라면 훌륭한 목적 달성이겠지만 읽는 독자를 향하는 에세이라는 점에서 이미 수준 미달로 탈락이다. 어떻게 보면 에세이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 또한 창작에 대한 미련의 결과물이자, 철저히 자신을 드러내는 노악을 행하기에는 두려운 사람의 도피 행위의 결과물이지 않을까 싶다. 유저가 유동적인 <디시인사이드>와 같은 곳에 파멸적일 정도로 자전적인 글들이 성행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정말 지극히 우연성과 유동성으로 연결되어 있는, 서로 일말의 동정도 이해도 하지 않는, 그저 서로 배출할 뿐인 관계…. 이만 짧고도 지저분한 글을 마치겠다. 이제부터 이런 나의 에세이를 빙자한 마구잡이로 쓴 푸념과 자기혐오(타인을 혐오하면서도 자신을 혐오하는 자학적인 글들…)들을 가끔 써보고자 한다. (최근 아즈마 히로키의 ‘느슨하게 철학하기’라는 에세이를 다시 읽고 있는데 꽤나 술술 읽힌다. 에세이라는 장르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