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한 삶, 또는 고통으로 점철된 삶. 혹은 쾌락으로 가득한 삶. 아니면 타인을 위한 봉사로 채워가는 삶...
한 때 욜로가 유행이었다고 하지만,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듯 하고... 지금은 어쩌면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정량화된 가치 증식에 열광하는 삶이 대세인가. (정량적 가치는 후에 무엇으로 환원되는가?)
타인에 대한 봉사조차도, 그들의 삶에 그래서 지향점은 어디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러 이미 천여년 전에 구도자들이 이런저런 답을 했겠다. 삶은 고통이고 연기를 깨달아 진정한 소멸의 길인 열반으로 들어가려는 이도 있었고...
그 반대에는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의 세계로의 구원이 있었던 듯 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구원이 되는가... (우리는 정말 구원 자체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는가, 단지 죽음의 공포에 대한 역이 아닌... )
가장 처음에 씌여졌다는 마가복음. 상당 내용이 귀신 씌인 이들과 병자에 대한 치유의 이야기이다. 그들을 치유하시며 죄에 대한 용서를 이야기한다. 즉 구원.
치유는 왜 구원이었을까?
일단 그 당시 유대인들은 정결 의식과 분리적 사고가 상당했던 듯 하다. 정결 의식에는 현재의 고통이 신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래서 모든 일상을 정결하게 씻으며 살아가려는 의식이 보이는 듯 하다. 그리고 정결하지 못한 결과로 고통을 당하는 이들은 죄의 결과이므로, 분리하여 구분짓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이것은 혐오와 격리의 세계. 죄에 대하여 개인적 의식으로 정제되어가며 집단화된 형태. 그 집단의 의식은 개인에게 다시 침투해 올 터이고.
여기에 치유에 의한 구원의 세계가 있지 않을까. 치유는 단지 병을 낫게 해 주는 의미를 너머에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병리적인 죄에 대한 의식에 대한 치유.
현대는 어떠한가. 정신병리적인 접근은 어디서 와서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는가. 비정상에 대한 정의와 격리, 그리고 혐오. 치유라는 이름으로 치료를 하지만, 결코 완전한 치료는 불가능하다. 인과론적 상처에 대한 정의와 접근은 거기까지가 한계인 듯.
신에게 인간이 멀어진 것은 선악에 대한 기준을 임의로 만들어서 일 터인데, 인간은 신의 이름을 빌어 인위적 기준을 또 만들어내었다.
그에 의한 옳음과 그름, 정상과 비정상. 그렇게 정죄하며 가름을 지어놓는 것에서 고통의 세계가 시작됨은 아닌가.
고통은 가름을 당하는 소외된 사람들에게만 존재하는가. 그 인위적인 기준은 과연 선으로써의 구원을 담보할 수 있는가. 스스로에게 단지 나락으로 빠지지 않을 사슬을 강요함으로 매져키에 빠진 것은 아닌가. 기쁨 없는 조금 적은 고통과 두려움이 가득할 뿐인 세계.
치유는 아마도 그곳에 행해지는 것은 아니었을까. 소외되었던 이들의 고통이 사라짐은 물론, 격리시켰던 이들의 율법 역시 초월하는 기적. 신의 세계를 꿈꾸는 자들이 어찌 단지 현실을 유지하기 위한 제약으로만 만족한다는 말인가.
그것이 유발하는 고통의 제거, 그리고 그러한 정결 의식이 지양하는 죽음의 세계에 의한 공포로써의 고통에 대한 근원적 해방. 아마 그것이 구원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