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기스탄, 생명의 위협, 방랑자들
해외여행 욕구가 없다. ‘제일 가보고 싶은 나라’라는 흔한 대화 주제에 맥을 끊곤 했다. 해외여행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를 물을 때면 '피로도 대비 만족감'을 근거로 든다. 한국을 벗어나기 위해선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금이 넉넉지 않다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행기표를 알아봐야 한다. 교통비로 돈 나가는 게 제일 억울하니까. 익숙지 않은 동네니 그래도 생존에 직결된 의식주에 대한 정보는 필요하다. 어떻게 입어야 할지,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잠을 청할지. 또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쓰는 만큼 방문할 장소를 미리 찾아봐야 한다. 한정된 시간 안에 다시 못 올지 모르는 그 도시를 듬뿍 향유하기 위해. 이 준비 시간을 여행의 과정에 포함한다면 피로도 대비 만족감은 국내여행과 비슷할 것이라는 논리다. 배가 부른 소리지만, 사전 준비의 수고로움을 모두 처리해 준다면 기꺼이 가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마치 해외여행을 열댓 번 다녀온 방랑자처럼 말하지만, 해외라곤 고작 3번뿐이 안 가봤다.
어릴 적 단기 어학연수로 유배 갔던 마닐라, 성인이 된 기념으로 혼자 떠난 오사카, 그리고 입대 전 동네 친구들과 마지막 소회를 푼 후쿠오카.
견문을 넓히기 위해 해외여행을 가봐야 한다는 말에 크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놀러 가는데 뭔 견문이여'라고 머리로 말하며 마음속에서 얼굴을 구깃 구겨버린다. 심술이 특기다. 이런 내게 견문, 식견과 같은 키워드를 사용하지 않고도 날 어느 정도 설득한 지인들의 이유를 소개한다. 기억력 문제 혹은 유머 욕심으로 다소 의역했다는 점 양해 바란다.
직장 동료 A | 솔직히 대한민국 어디에 떨궈져도 살아 돌아올 수 있잖아요. 해외는 유럽만 가도 밤늦게 돌아다니면 진짜 위험해요. 죽을 수도 있다니까요. 이 생명의 위협이 국내 여행에선 못 느끼는 도파민이죠.
선배 B | 국내는 낯선 공간과 경험을 찾기 어렵잖아. 강릉이나 포항이나 풍경은 비슷하다 생각해.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위협이 되는 늑대를 총으로 쏴도 합법이고 포상금도 줘. 숙소도 설산에 둘러싸여 있다니까? 또 그 숙소를 가려면 말로 산을 넘어야 해. 이런 걸 국내에서 어떻게 해.
*토막상식.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늑대 한 마리당 6,000 솜(한화 10만 원)의 포상금이 지급된다.
공감은 가지만 내겐 국내 여행으로도 충분하다. 후각이 민감한 사람처럼 충분한 행복을 감지하는 감각이 뛰어난 것 같다. 일례로 내 애인은 내가 맛있어하는 음식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웬만한 음식은 충분히 맛있다고 말하고, 인생 음식을 만날 때에도 ‘음.. 맛있군’ 정도로 갈무리하기 때문. 이런 축복받은 성향 덕에 국내 여행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선천적 자세가 세팅되어 있다.
여행의 가치는 어디든 ‘떠나는 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낯선 곳이든 아니든 내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멀어지기만 한다면 여행의 행복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 서울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가 서울도 처음 가보는 동네는 가끔 여행하는 기분이 들고, 답답할 때면 출근길이 여행 같기도 하다. 지금의 거주지에서 탈출하고 싶은 건 아니다.
책 속에서 발견한 여행의 이유도 모아봤다. 2018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에서는 모든 인물이 여행한다. 완벽하게 방부 처리된 시체 표본을 옮기기 위해 근심 가득한 여행을 하는 이들도 있고, 그저 괴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파 아무 이유 없이 지하철 순환 노선에 몸을 맡기는 이들도 있다. 내가 특히 인상 깊었던 방랑자는 유람선을 운행하는 선장. 그는 매일 A섬에서 B섬으로 오고 가는 배를 운전하는데, 하루는 승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평선을 향해 핸들을 틀었다. 그는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 소설에서는 인간의 존재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이동’이라고 말한다.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내 모든 에너지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라고 말하거나, 인간은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을 유지하는 존재’라고 말하며. 인류의 역사를 50년으로 두고 보면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기 시작한 건 3개월 전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이동의 DNA가 남아있을 만 하지만, 난 아무래도 진화를 많이 했나 보다.
가장 공감이 가는 해외여행의 이유는 프랑스 철학자 장그르니에의 이유였다. 이유라기 보단 가치관에 가까운데, 여행의 종착지는 곧 정착이라는 것. 내 유년기나 청춘을 보냈던 동네가 아닌 곳에서 살고 싶다. 우리나라의 지방이 됐든, 해외가 됐든 말이다. 해외에서 살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관리에 어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돈을 주고 고용할 만큼 능력 있는 해외 거주 프리랜서가 되거나, 외국인임에도 해외에서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기술이 있거나. 그냥 돈이 많거나. 내겐 그 무엇도 아직 없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 떠나는 선조(수렵민)의 입장에서, 거주 가능성이 높은 국내를 돌아다녔던 건 아닐까?
요즘 눈여겨본 여행지는 두 곳이다. 우연찮게 해외여행을 가장 저렴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옆자리 직장 동료와 함께 업무 시간 중 소소한 일탈을 저지른 것. 부산에서 대마도로 가는 배편은 단돈 6만 원이다. 후쿠오카는 8만 원. 어릴 적 수학여행이나 수련회에 대한 안 좋은 기억만 없다면, 열댓 명과 함께 잠을 청해야 하는 이 배가 솔깃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나 또한 솔깃했기에, 해외여행을 기피한이유는 가격 때문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두 번째 여행지는 바로 전주. 함께 일탈을 한 옆자리 동료는 전주에 연고가 있다. 그래서 이따금씩 커피를 좋아하는 내게 전주 커피 맛집을 소개해주었다.
그래서 이번 연휴 난 전주로 향한다.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사소한 이유로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것.
내가 국내 여행을 선호하는 이유다.
경주 국립 박물관
어릴 적 한 번쯤은 가봤을 만한 박물관을 성인이 된 이후 다시 방문해 보았다. 박물관이지만 역사 유물을 특유의 미감으로 잘 배치해 두었기에, 마치 미술관을 관람하는 기분도 든다. 특히 불교조각실의 조명은 불상의 정교함과 고귀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사실 이 코너에서 카페나 음악 추천 같은 진부한 추천은 최대한 피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경주에 방문한다면 '커피플레이스'의 필터 커피도 꼭 마셔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