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선생, 다자이 오사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철없던 여동생이 어린이집 선생님이 되었다. 가끔 이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그간의 경험을 돌아보면 잘 해낼 것 같기도 하다. 나와 여동생은 각각 중학생, 초등학생 때부터 어린 막내 동생과 함께 자라왔다. 여동생은 학교에 다녀오면 1살 배기 막내의 기저귀를 갈아줬고, 나는 유치원 픽업을 이유로 친구들과 PC방을 가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처음 유치원에 막내를 데리러 갔을 때, 유치원 선생님이 막내를 쉽사리 내주지 않았다.
아빠도 아니고, 오빠라기엔 꽤 나이 차이가 나는 고등학생이 대뜸 6살 아이를 데리러 왔다고 하니 이해는 간다. 선생님의 의심스러운 눈초리 뒤에 막내가 ‘오빠다! 우리 오빠 맞는데!’ 라며 자랑스럽게 말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유치원 선생님은 엄마에게 전화해 추가 검문을 진행했고, 결국 난 막내와 손을 잡고 그네를 타러 갈 수 있었다. 여동생도 긴 시간 동안 막내를 돌보며, 노하우를 자연스레 채득 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동생이 담당하는 반에는 아주 순한 아이가 있다. 보통 어린이집에 처음 등원하게 되면 적응 기간을 갖는다. 1주일 간은 1,2시간 정도만 어린이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하원하는 것. 이후 아이가 부모 없이 혼자서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면, 점차 머무르는 시간을 늘린다. 그중에서도 적응이 빠른 아이는 점심 식사까지 어린이집에서 해결한다. 마치 공부를 잘하면 성적우수반에 들어가듯이, 혼자 잘 견뎌내면 점심식사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순한 아이는 누구보다 금방 울음을 그치고 점심식사 반에 입성했다. 적응 엘리트였다. 그 아이는 항상 조용했다. 보통 악을 쓰며 울거나, 안기도 버거울 만큼 몸부림치는 게 일반적이다. 그 아이는 울기는커녕 말하는 것도 거의 본 적이 없고, 기껏해야 ‘까꿍’이라며 장난칠 때만 입을 뗀다. 하루는 그 조용하고 순하던 아이가 연거푸 말을 뱉으며 울음을 그치지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아이의 점심밥이 늦게 나온 것.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나는? 나도 밥. 내 거는?’이라며 서러움을 토해냈다. 동생의 말을 빌리자면 그 친구가 말을 그렇게 잘하는지 몰랐다고 한다.
1살 인생 최대의 억울함. 그 조용하던 아이가 다급하게 말을 꺼낸 계기가 된 것.
‘언제부터 변했을까?’ 얼마 전, 대학교 동기와 함께 고심했던 질문이다. 둘은 일로 자아실현을 해보겠다는 욕심이란 게 있었다. 브랜드를 만들어 보겠다거나, 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인터뷰를 한다거나.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바람이 사라졌다. 나는 깜냥이 안된거였다며 자조적인 농담을 건넸고, 우리와 달리 그 욕망을 실천해 나가는 선배들의 현재를 나열했다. 노력 끝에 결국 자신만의 사업을 일궈나가는 선배 A, 회사를 다니면서도 사이드 프로젝트로 이름을 날리는 선배 B, 대기업에서 커리어를 차근차근 완성해 나가는 선배 C.
지금 쓰는 글의 어조와 달리 그리 비관적인 대화는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느끼게 됐다며 ‘그거면 됐지’라는 모호한 답변을 함께 내어두긴 했지만 말이다. 변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느냐 물었지만 딱히 없었다. 열심히 머릿속을 더듬었다.
일본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문장은 불쾌하면서도 통쾌하다. 인간을 누구보다 사랑하면서 누구보다 혐오한다. 나는 그의 소설 ‘인간실격’을 읽고, 그를 비관적인 인물로 안쓰럽게 바라봤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의 실화가 내 선입견에 박차를 가했다. 최근 그의 문장을 모아둔 문장집을 읽었다. 평론가 중 한 명은 그를 일본 근대 문학가 중 가장 뛰어난 유머 감각을 가진 작가로 평했다. 명랑하고 유쾌한 작품도 많았다고 한다. 그는 애인에게 꽃을 선물할 만큼 애틋했고, 의지하던 선배에게 자주 응석 부렸다고 한다. 그는 인간을 사랑했고, 마음이 여렸다. 독설가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다자이 오사무의 <고뇌의 연감>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소위 사상가들이 쓴 ‘나는 어째서 무슨 무슨 주의자가 되었는가' 같은 사상 발전의 회상록이나 선언서를 읽으면 나는 그 속이 뻔히 들여다보여 견딜 수가 없다. 그들이 무슨 무슨 주의자가 된 데에는 반드시 어떤 하나의 계기라 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계기는 대체로 드라마틱하다. 감격적이다. 나는 그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져 견딜 수가 없다. 믿고 싶다고 애를 써도 내 감각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제로 그 드라마틱한 계기는 어이가 없다. 닭살이 돋는 느낌이다. 서투른 억지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내게 사상 따위는 없습니다. 좋다, 싫다. 오직 그것뿐입니다.”
계기. 멋진 생의 발걸음을 밟아온 이들에게 자주 묻는 주제이다. 영화 같은 계기들도 많다. 마치 그 계기란 게 없었으면 지금의 행복이 없었을 것처럼 말이다. 내게 그런 계기는 없어서 다자이 오사무의 독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계기를 물을 때면 대부분 '그러게 말이에요'라고 답하게 된다. 물론 특정 집단에서 '지원 동기'라는 난제를 요구할 때면 너무 오버스럽지 않게 계기를 적어내곤 한다.
계기는 종종 진심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곤 한다.
내 인생에 그 계기라는 게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지극히 평탄한 하루하루다. 가끔은 마법 같은 계기가 있었으면 한다. 지난 주말, 철 지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감상했다. 씨네필을 화나게 만드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 바로 이 영화와 헤어질 결심을 보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 내용은 차치하고 재밌게 느꼈던 부분은 바로 ‘점프대’라는 설정이었다. 다중 차원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와 연결되기 위해선 독특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손가락 사이를 종이로 4번 베거나 바지를 벗고 엉덩이를 프린터에 스캔하는 행동이 트리거가 되어 평행세계의 내가 지닌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나도 언제든 내 손을 종이로 베어내고 엉덩이를 스캔할 수 있는데.
특별한 계기는 이 영화의 '점프대'와 같을까? 평소에 안 하던 도전을 하게 되거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거나. 멋있는 계기는 움직일 명분이자 변화의 용기가 되어줄 것만 같다. 그러나 특별한 계기 없이도 마음이 동한다면 움직일 수 있어야만 한다.
'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하고 싶은 게 아닐 수도 있어. 진짜 하고 싶은 건 어떻게든 당장 해냈을 거야'라고 말한 좋은 어른의 말을 기억하며.
Down in Brazil - Michael Franks
유독 긴 글을 적은 것 같아 오늘은 가볍게 노래 한 곡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