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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와 독서는 잠을 부른다

디발라, 삼체, 에오미르 데오다토

by 헌준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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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렸을 때부터 책 읽히려고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아?’ 가끔 어머니는 뿌듯하게 내게 자랑하시곤 한다. 만화책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독서에 익숙해지도록 한 것. <먼나라 이웃나라>, <이문열 이희재 만화 삼국지>를 정말 셀 수 없이 읽었다. 점차 독서에 재미를 붙이자, 소설책, 논픽션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여느 남자아이처럼 독서만큼이나 축구, 농구, 야구에 흠뻑 빠져 있었기에 에비사와 야스히사의 야구 소설 <나는 감독이다>는 내게 궁극의 키메라 같은 존재였다. 내용은 흐릿하지만, 지금 찾아보니 일본 문학계의 중요한 상 중 하나인 닛타 지로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니 꽤나 재밌게 읽었을만하다. 어머니의 자랑 뒤에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이시곤 한다.


‘글은 잘 못 썼는데 말이야.’


어릴 적 조기교육 탓에 성인이 된 이후에도 독서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만큼이나 부담 없이 책을 집어들 수 있게 된 것. 그 덕에 편도 1시간 15분, 2호선 지하철로만 50분을 넘게 쭉 여행해야 했던 내 통학길을 독서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동기들이 가끔 그 긴 통학 시간 동안 뭐 하냐고 물을 때면, 독서라고 답하지만 믿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다.


독서와는 거리가 먼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으려나.


한동안은 독서와 멀어진 적도 있었다. 유튜브의 등장에 허우적댔고, 숏폼의 자극적인 맛에 현혹되지 않을 만큼 독서광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의 조치는 취했기에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튜브의 메인 화면에 볼만한 영상이 나열되지 않도록 알고리즘을 꺼두었고, 아주 저렴한 핸드폰 요금제로 변경해 물리적으로 데이터가 없어 영상을 시청하지 못하도록 원천 차단하기도 했다. 다만 말도 안 되게 적은 양의 데이터였기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애인의 카톡에 답할 겨를도 없었다. 그 달에 난 결국 데이터 추가 요금 2만 원을 내야만 했다. 뼈를 깎는, 아니 데이터를 깎는 노력으로 가까스로 난 다시 책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축구 선수 중에는 재능이 매우 뛰어나지만, 특정 포메이션에 특정 포지션에서만 그 재능을 발휘하는 선수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디발라, 하메스 로드리게스. 재능을 가졌다는 점을 빼고 내 독서도 그들과 비슷하다. 특정 환경에서만 책에 몰입할 수 있는 것. 어렸을 때부터 잠에 들기 전,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된 걸 상상하며 잠들 정도로 망상에 능했다. 축구 선수, 대통령, 초능력자, 닌자. 망상 속에서 못 해본 직업이 없었다. 이런 탓에 독서하다 쉽게 머릿속에서 또 다른 책을 써 내려가곤 한다.


이 망상을 조기에 막기 위해선 적절한 BGM이 필요하다.


단수가 잘 맞는 BGM은 가끔 내려야 할 지하철을 놓칠 정도의 몰입을 선물한다. 그럴 때면 반대편으로 가는 지하철로 갈아타는 와중에 괜히 뿌듯함을 느낀다. 약속 시간에 늦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그런 탓에 독서할 때 듣는 플레이리스트에 꽤 공을 들인다.


종종 책의 분위기에 맞는 앨범을 찾아 듣곤 한다. 예를 들면, 류츠신의 SF소설 <삼체>를 읽을 때는 Aphex Twin의 <Selected Ambient Works 85-92>를 듣는 것. 그러나 이는 매우 특수한 경우이다. 독서 모드로 전환할 수 있는 만능 플레이리스트가 필요했다. 당연히 가사가 있어선 안 된다. 재즈는 싫다. 독서하면 재즈라는 그 전형성이 싫다. 뉴에이지는 싫다. 뉴에이지를 듣다가 잠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너무 신나선 안 된다. 리듬을 타다 보면 책이 아닌 음악을 읽게 된다. 너무 고루해서도 안 된다. 읽을 맛이 안 난다.



평소 8, 90년대 R&B를 즐겨 듣기에, 가끔 R&B 앨범에 Instrumental 연주곡이 내가 원하는 독서 음악과 매우 잘 어울리는 경우가 많았다. 70년대 재즈 부흥기를 맞은 재즈 연주자들은 80년대 R&B 붐에 맞춰 R&B 앨범에 세션으로 참여하거나, 유명 연주자들은 R&B맛 퓨전 재즈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 곡들은 전형적인 재즈는 아니지만, 독서 음악으로서 재즈가 지닌 장점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너무 신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지루하지도 않았다.


퓨전 재즈를 검색하면 록, 힙합, 아프리카 등 다양한 장르와 결합된 다채로운 재즈와 마주하게 된다. 독서 음악으로서 적절한 퓨전 재즈는 록, 힙합 같은 음악과 섞여선 안 됐기에, ‘퓨전 재즈’라는 키워드는 검색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애초에 퓨전 재즈라는 장르 자체가 재즈와 R&B, 재즈와 록, 재즈와 보사노바 사이 묘한 느낌이었기에 장르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하기 어려울 터. 원래 중간이 어려운 법 아닌가


가장 좋은 방법은 R&B 음악 속 세션이 맘에 들었다면, 그 연주자를 찾아내 그들의 연주 앨범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Deodato

브라질의 퓨전 재즈, 펑크 피아니스트로, 펑크 밴드 Kool and the Gang의 멤버이기도 했으며 2001: A Space Odyssey의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특히나 보사노바와 R&B를 그만의 느낌으로 잘 섞는데, 휴양지에서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들어야만 할 것 같은 유쾌한 평온함을 즐길 수 있다. 특히나 그의 앨범은 마그리트의 작품과 엇비슷한 결로 매력적이다. 토막 상식을 하나 알려주자면 Deodato의 손녀는 저스틴 비버의 와이프 헤일리 비버.



Fourplay

NBA의 11-12 시즌 마이애미 급 연주자가 모인 컨템퍼러리 재즈 밴드. 말도 안 되는 경력의 연주자들이 모인 밴드라, 단발성 프로젝트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아직까지도 건재하다. 국내 라디오의 시그널 음악으로 자주 사용됐다고 한다. EBS 스페이스 공감 무대에 선 포플레이는 언제 봐도 낯설다.



Paulinho Da Costa

영미팝 역사상 최고의 퍼커션 연주자 중 하나로 손꼽히며, Earth, Wind & Fire의 <I AM>, Michael Jackson의 <Thriller>에 참여했다. 퍼커션 연주자는 흔히 작곡을 못한다는 편견이 있지만, 파울리뉴는 본인이 직접 작곡, 편곡, 프로듀싱까지 한 개인 앨범을 발매했다. 퍼커션 연주자여서 그런지 고깃집에서 고기보다 파김치가 더 맛있을 때처럼 퍼커션이 도드라지기도 한다. 앨범커버엔 항상 활짝 웃고 있는 그의 사진이 삽입되어 있어 괜히 기분이 좋다.


Lonnie liston smith

마일스 데이비스, 마빈게이와 함께 작업한 피아니스트로 오늘 소개한 아티스트 중에 가장 펑키하다고 봐도 좋다. 아프로큐반 느낌이 짙어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난 좋다. 그의 사진을 찾아보면 니트로 짜인 터번 형태의 모자와 틴트 선글라스를 자주 쓰곤 한다.



이 아티스트들의 공통점은 일흔, 여든 살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장수하셔서 음반을 계속 내고 있다는 점. 앞으로 더 오래오래 내 독서 생활을 책임질 음악을 만들어주셨으면 한다.


내 독서가 망상이나 유튜브 따위에 지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 아무거나 추천합니다

무인양품의 저지 크루넥 긴소매 티셔츠

흔히 애정하는 제품을 소개할 때 이렇게 소개하곤 한다. ‘깔별로 다 가지고 있다’. 내게 이 티셔츠가 그러하다. 몸에 닿는 느낌이 매우 부드러워 이너웨어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고기능의 운동복만큼은 아니지만, 10km 이하의 러닝에서는 애용할 정도로 운동복으로서의 역할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가격이 착하다.


링크 : https://mujikorea.co.kr/products/view/95478?sc=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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