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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맹 액션 배우의 은밀한 취미

교토 정원, 오코치 덴지로, 앙트레프레카리아트

by 김준헌


ⓒ네이버 지도

며칠 전, 경기도 과천시의 집값 상승률이 강남 3구를 넘어 전국 1위를 기록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주관성을 배제하지 않고, 그 이유를 지레짐작해 보았다. 우선 4호선을 따라 사당까지 15분, 완공 예정인 GTX 등 ‘준서울’이라고 부를 법한 편리한 교통이 주요하게 작용했을 것. 그래도 높은 땅값의 기준이자 대명사인 강남 3구에 집값으로 으름장을 놓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주요하게 영향을 끼쳤으리라 보았다. 관악산과 청계산을 끼고 있는 배산임산(背山臨山),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대공원을 잇는 광활한 녹지 등 산책하기 좋은 자연과 인접해 있다는 것. 낭만이 차디찬 부동산 시장에 반영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세상 물정을 너무도 몰랐던 탓일까. 집값을 견인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이오 대기업이 입주를 마친 과천 지식 정보타운과 신축 아파트의 건설이었다.


호주 교외 지역을 생동감 있게 그린 그림으로 유명한 멜버른 출신의 예술가, 하워드 아클리의 ⓒArt Gallery NSW

집값에 공원의 존재가 반영되기엔 아직 멀었지만, 공인중개사가 예비 세입자에게 주변 공원을 어필하거나 월세에 허덕이는 사회 초년생도 조그마한 개천을 구태여 찾는 경우도 있다. 서울이라 하면 높은 빌딩 숲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곳곳에 숨 쉴 틈을 건네주는 도시공원이 꽤 조성되어 있다. 유독 인구 밀집도가 높은 도시에 공원이 잘 마련되어 있는데, 아파트 생활권이 주를 이루는 곳에선 도시공원 없이는 자연 속에 몸을 내어놓는 장소가 부재하기 때문. 빡빡하게 옆 사람과 숨결을 공유하는 학교와 감옥에서조차 녹지는 아니더라도 거닐 수 있는 운동장이 꼭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 반대로 땅덩어리가 남아도는 도시에서는 정원 문화가 발달해 있다. 뒷마당을 가꾸는 호주, 앞마당을 가꾸는 미국. 두 나라 모두 잘 다듬어진 정원의 잔디가 그 가정에 대한 평가 요소가 된다. 돈을 벌면서도 가족과 집에 여유를 둘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내세우는 것. 옆집이 잔디깎이를 들고나오면, 도미노처럼 옆집도 잔디깎이를 챙겨 나온다.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SNS 피드를 꾸미듯 경쟁 심리 속에 이루어지는 건 매한가지.


도시공원과 개인 정원의 역할은 사뭇 다르다. 도시공원은 주로 규모가 크고 커뮤니티성이 짙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엿볼 수 있는데, 태극권, 에어로빅을 즐기거나 강아지와 산책하는 이들까지가 도시공원의 완성이다. 개인 정원은 반대로 자연과의 독대가 가능하다. 평온함과 고요함을 느낄 수 있으며, 손으로 직접 정원을 관리한다는 점에서 공예적 성격도 띤다. 같은 서울 안에서도 서울숲을 앞에 둔 성수동의 아크로서울포레스트를 원하는 이들도, 나만의 정원을 가꿀 수 있는 평창동의 단독주택을 바라는 이들도 있으니, 호불호의 영역이다. 물론 필자에게는 그게 뭐든 허황한 꿈에 가깝지만 말이다.


교토의 오코치 산소 ⓒ김준헌

도시공원과 개인 정원 모두 그만의 매력을 지닌다. 그럼에도 근소 우위로 개인 정원을 선호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올해 11월의 교토 여행. 교토역 기준, 북서쪽에 있는 아라시야마는 이채로운 자연 공간이 두드러지는 지역이다. 가쓰라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아라시야마 공원 가메야마 지구, 한국의 밤섬처럼 다리 밑에 홀로 떨어져 있는 아라시야마 공원 나카노시마 지구부터 공놀이하기 좋은 평야의 하천 광장(河川広場), 센과 치히로가 떠오르는 산속의 기왕사까지. 그리고 과거 일본식 정원을 누릴 수 있는 텐류지를 비롯해 곳곳에서 공중에게 개방된 개인 정원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대나무가 끝없이 펼쳐지는 치쿠린이 가장 명소인데, 시기를 유념하지 않으면 대나무보다 관광객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패키지 여행사의 깃발이 울창한 대나무를 가릴 때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도시공원은 아니지만 공개된 자연 공간의 단점을 여실히 체감하게 된다. 치쿠린의 끝자락에 인파를 탈출해 상반된 고요함을 느낄 수 있는 개인 정원이 존재한다. 바로 오코치산소 정원.


오코치산소는 다른 명소에 비해 비싼 티켓 가격(1,000엔)을 내고 관람해야 한다. 사유지이기 때문. 부지는 약 6,000평에 달하며, 미로처럼 꼬인 길을 따라 시각적 유희를 만끽할 수 있는 다양한 정원과 마주하게 된다.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여름의 푸르름과 가을의 얼룩덜룩함의 경계에 선 산세는 물론, 교토 전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일본식 정자가 돋보였다. 자연 이끼를 활용해 적당한 크기의 단풍나무와 함께 조성된 정원에서는 신비함을, 탁 트인 하늘 아래 누울 수 있는 간이 목상에서는 개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햇볕 아래 낮잠을 청하기도, 생전 처음 보는 식물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하며 고요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경험을 이어나갔다. 남다른 미감과 함께 관리의 차원에서 경이로움을 자아내는 정원과 일본 전통 양식을 따른 정교한 건축물 덕에 오코치 산소는 일본의 국가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The 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 / ⓒPICRYL

오코치 산소의 아름다움 뒤에는 설립자에 관한 꽤 재밌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설립자의 이름은 오코치 덴지로. 오코치 덴지로는 ‘찬바라’로 불리는, 이른바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 칼싸움 영화 장르에서 활약한 스타 배우다. 지금으로 치면 톰 크루즈와 비슷한 이미지다. 특히 영화 <백만 냥의 항아리> 속 ‘단게 사젠’이라는 배역을 연기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단게 사젠은 전투 도중 오른쪽 눈과 오른팔을 잃었으며, 영주와 일족 등 모든 관계를 끊은 떠돌이 사무라이, 로닌의 삶을 사는 캐릭터다. 섬길 주인을 잃은 로닌은 에도 시대 잠재적 위협 요소였다. 사회적 낙오자에 가까웠지만, 무력을 지녔기에 살길이 막막했던 이들은 떼를 이뤄 마을을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게 사젠은 다른 로닌과 달리 불의에 맞서면서도, 시대극의 진지함을 벗어나 유쾌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실제로 <백만 냥의 항아리>의 스틸컷을 보면 날카로운 눈빛과 익살스러운 표정이 공존한다.


단게 사젠은 덴지로 외에도 많은 배우들이 배역을 맡았지만, 단게 사젠하면 덴지로 오코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캐릭터와 가장 동일시되는 배우이다. 워낙 옛날이야기고, 타국의 배우이기에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쪽 눈에 난 상처는 원피스의 조로를 연상케 하며, 원피스 내에서 사무라이 캐릭터 이름이 덴지로인 것을 미루어 보아 캐릭터와 배우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오코치 산소 속 덴지로 기념관 ⓒ김준헌

어린 나이, 일약 인기 반열에 오른 액션 배우 덴지로. 흙바닥 위에서 칼춤을 추던 그가 평온한 오코치 산소를 가꾸는 모습은 언뜻 괴리감이 느껴진다. 6,000평에 달하는 정원을 채우기 위해, 30년의 세월은 물론 그의 막대한 출연료 대부분을 퍼부었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그는 철거 위기에 처한 ‘지부츠도’라는 작은 불당을 부지 내에 옮겨 세우기까지 했다. 덴지로에서 배우의 인생을 빼면 오코치 산소만이 남는다. 그에게 이 넓디넓은 정원이 왜 필요했을까? 배우 덴지로 이면의 인간 덴지로를 엿볼 필요가 있다.


오구치 덴지로는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갈망했다. 그는 영화의 아름다움은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소멸한다고 보았고, 그 한계를 넘어 영원한 생명의 굴레를 만들고자 했다. 봄의 벚꽃, 여름의 진달래, 가을의 단풍나무, 겨울의 소나무를 심어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끊기지 않도록 설계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정원은 그에게 단순한 미적 공간을 넘어섰다. 정원을 가꾸는 과정에서 연예계라는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덴지로는 촬영이 없는 개인적인 시간에 정원에 들러 명상했으며, 대본을 읽으며 연기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오코치 산소의 소개 글에는 정원을 걸으며 부처를 만나기를 바란다고 적혀 있는데, 세속적인 삶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내면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덴지로의 선적인 염원이 담긴 공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정원은 점차 연기를 위한 내면 수련의 장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정원을 그의 연기 철학과 실력을 돌보는 도구로서도 활용했는데, 이는 그의 연기에 대한 집착이 겹쳐 보인다. 그는 "연기의 능숙함과 서투름은 아주 작은 차이일 뿐이다. 그 차이는 결코 기술의 차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품에서 나오는 무기술(無技術)의 차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배우가 단순히 대사를 외우고 정해진 동작을 하는 기술적인 능력만으로는 관객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는 배우 개인의 삶의 태도, 인간적인 깊이,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해가 연기에 자연스럽게 배어 나올 때 비로소 훌륭한 연기가 완성된다고 보았다. 실제로 그는 사실적인 연기를 추구했으며, 동료 배우들은 오코치가 연기에 몰입하여 실제 칼을 휘두르는 것을 무서워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정원을 돌보며 자신을 가꿨고, 자연과의 대면에서 길러낸 사색과 집중은 그의 연기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김준헌

1962년, 덴지로가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정원은 그의 아내 타에카에게 넘어갔고, 그녀는 정원을 계속 관리하다가 결국 정원을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했다. 덴지로의 개인 정원이 일반인에게 공개되면서 공원의 역할로 전환된 듯하면서도, 정원을 소유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개인 정원이 줄 수 있는 가치를 선보인다. 칼을 휘두르는 액션 배우가 원했던 영원한 아름다움과 내면의 평화. 오히려 그의 삶과 거리가 먼 공간이었기에 그에게 더욱 절실한 장소였을 것이다. 흉터를 지닌 사무라이를 더 깊이 연기하기 위해서, 세속적 목표를 단단히 붙잡기 위해서도, 그는 자기를 보전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정원은 액션 배우의 은밀한 수행이자 취미였다.


덴지로는 완결된 공간이 아니라 항상 ‘진행 중’인 공간을 원했다. 무언가를 가꾼다는 것은 유지의 행위이자 과정의 행위에 가깝다. 반대로, 현대인은 나를 가꾼다는 명분 아래 조립의 행위이자 결과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삶의 우위를 논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의 행위가 삶의 태도에 대한 주류로 편입되고 있으며, 나아가 이 태도가 퍼스널 브랜딩, 대중의 인플루언서화 등 시대의 흐름과 함께 정답처럼 꾸준히 대두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현상에 대한 애프터이펙트도 존재하는데, 결과의 행위에서 진정성을 느끼지 못한 이들에 대한 수요를 파악하고, ‘프로세스 이코노미’라는 이름 아래 과정을 결과로 치환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 또한 결국 결과의 행위임은 마찬가지. 과정을 생략한 빠른 변화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과정이 아닌 결과에 초점에 맞추는 이유는 나를 가꾸는 행위마저도 증명해야 하는 압박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왜 증명하고 팔려야 할까?


ⓒ유연성 클럽

실비오 로루소의 저서, 『앙트레프레카레이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책의 제목인 '앙트레프레카리아트'는 '기업가(entrepreneur)'와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의 합성어로, 기업가처럼 삶을 스스로 기획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만, 불안정한 노동 환경에 놓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필자(99년생)와 동년배라면 중고등학교를 넘어, 대학교에서 기업가 정신에 관해 많이들 들어봤을 것이다. 주도성과 실행력, 위험 감수라는 키워드 아래 자율성의 미덕으로 찬양되며,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등 기업가 정신의 모티브가 되는 이들의 명언과 책을 읽으며 우리는 누구나 그들과 같은 기업가 될 수 있다는 시대적 통찰과 함께 대두되었다. 그러나 저자인 실비오 로루소는 말한다. “기업가 정신이 소수의 개인적 도전으로 남아 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삶의 방식일 뿐이다. 그러나 그 정신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 기업가주의로 변모하여 모두에게 강요되는 규범이 된다. (…) 기업가주의는 미디어 담론 언어를 장악하고 우리의 돈벌이나 창업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 경제 사고와 행동을 안쪽에서부터 바꾸어 놓는 가치 체계다. 기업가주의 안에서는 주도성, 실행력, 위험 감수가 자율성의 미덕으로 찬양되지만, 정작 그 자유는 더 많은 제약으로 우리를 옭아맨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영구적 베타이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듬고 재창조하는 프로젝트가 되었다. 기업가적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는 것이며, 개인을 하나의 브랜드로서 작용하도록 한다. 한때 붐이었던 노션 포트폴리오에 자신의 취미와 사적인 영역까지도 털어놓는다거나, 『퇴사 후 나를 브랜딩합니다』, 『일상이 돈이 되는 숏폼』 등의 팔리는 책의 면면은 일이 아닌 사적 영역의 자아까지도 커리어의 결과, 비즈니스의 결과로 치부한다. 이에 대한 반사 피해로 취미나 취향이 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자조를 내비치는 이들도 종종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와 같은 삶의 태도가 소수의 개인적 도전으로 남아있다면 문제시되지 않겠지만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며 강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태도가 당연시된다면 개인은 언제나 증명하고 관리해야 하며, 길게 늘어진 앱의 업데이트 현황처럼 끊임없이 나라는 결과를 다듬어야 할 것이다. 자신을 가꾼다기보다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삶보다는 판매 고과를 위해 기업 제안서처럼 자신을 꾸미고 있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 당신을 가꾸고 있는가. 덴지로와 정원을 함께 바라보며 경계 섞인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건 어떨까? 필자부터 그래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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