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 독일문학
지하철 플랫폼에서 줄 서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누가 뒤에서 나를 치며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다. 같이 놀던 무리의 친구는 아니었던 터라 어렴풋이 얼굴만 기억이 나는 정도인 친구였다. 그런데 내가 당시 친구에게 ‘설명을 잘하니, 선생님 하면 잘할 거 같다’고 했다고, 그 말에 선생님을 꿈꾸게 되었고, 실제로 지금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지나가며 했던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키워 나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우연히 만난 친구 이야기와 뜻밖의 연결점을 친구 A에게 말했는데...
“그런 애가 우리 반에 있었나? 넌 그러고 보면 반에서 다 두루두루 친했던 거 같아. 누군가 스쳐 지나가듯이 던진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의 미래를 뒤바꾸거나 영향을 끼치는 경우를 보면 우리는 사소하게라도 모두 연결된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지. 얼마 전에 그런 소설을 읽었는데, 레오 페루츠의 <밤에 돌다리 밑에서>라는 소설이거든. 이야기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프라하를 배경이야. 당시 황제인 루돌프 2세, 케플러 등 실제 인물이 등장하고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연금술사, 악마, 기묘한 꿈 등 환상적인 요소가 섞인 매력적인 소설이야.
에필로그까지 해서 15개의 조각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이야기는 상관없어 보이던 것이 결국은 기묘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돼. 마치 퍼즐처럼 말이야. 예를 들어 후일에 황제가 될 젊은 대공은 숲속에서 맞닥뜨린 악마가 흘린 돈을 줍게 되고, 악마는 원래의 주인에게 그 돈이 들어가기 전까지 젊은 대공에게 불운이 닥칠 거라 저주해. 그 돈의 주인은 후일 막대한 부를 가진 유대인 마이슬이며, 이들은 이후에도 끈질긴 악연으로 이어져. 이들의 기묘한 인연과 관계성은 무척 흥미롭단 말이지. 앞의 이야기에 배경으로 쓰인 소재가 뒤에서 핵심 주제로 풀어나가는 방식이 천재적이야. 떡밥이 하나씩 하나씩 풀릴 때마다 회수하는 맛이 최고야. 처음엔 소설 배경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없어서 낯설었는데, 소설 읽고 나면 17세기 무렵의 프라하의 사회상을 통달하게 된 기분마저 들어. 개별 이야기마다 완결성도 좋아서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거든. 개인적으로 민담 스타일을 좋아해서 더 재미있었을지도. 누군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같아. 아무튼 지금의 인연은 언제 또 어디서 만날지 모르니 착하게 살아야 해 암 그렇고말고...”
친구 A가 그 친구를 기억 못 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친구가 중학생이던 친구 A에게 단발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해 여태껏 단발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듯했다.
<밤에 돌다리 밑에서/ 레오 페루츠(신동화 옮김)/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