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8일
“패션은 실패에서 배우는 거란다”
헌 옷을 쌓고 있는 나를 보면서 어머니가 말했다. 옷장 속에는 더 이상 입지 않는 옷이 가득했다. 몇 년 전 사진 속의 나는 이걸 걸치고 우스꽝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껏 멋을 부린 듯한 표정은 덤이었다. 당시에 생긴 반짝 유행을 따라가느라 생긴 촌스러움과는 달랐다. 나는 부끄러워 사진을 황급히 숨겼다. 그때는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사춘기부터 늘 입을 옷을 직접 골랐다. 비만 체형이었던 내 몸을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항상 통 넓은 바지와 후줄근한 티셔츠.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교복이 없었던 학창 시절은 사복으로 무엇을 걸쳐도 허락해주었다. 한때 힙합 패션이 유행이라 해도 나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유물 같이 차려입었다. 늘 똑같은 힙합 브랜드의 옷을 입었고, 아이들은 부모님이 그 옷가게를 하냐고 물을 정도였다. 언젠가 농구선수나 어울릴 것 같은 300 사이즈의 신발을 끌다가 뒤축이 뒤틀린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혀를 차셨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내버려 두라며 내 편을 들었다.
사실 어머니야말로 옷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젊은 시절 직업은 정말로 패션 디자이너였다. 심미안이 부족한 나와 달리 타고난 사람이었다. 외삼촌은 미술과 피아노를 동시에 전공했던 것처럼, 외가의 자유분방한 가정환경은 예술인을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동생이 태어나고 어머니는 꽃다운 나이에 두 아들을 위해 꿈을 희생하는 걸 택했다. 그렇게 평범한 가정 주부가 됐지만 본능적인 끼와 감각은 감추질 못했다. 그는 자신의 옷을 살 때만큼은 깐깐한 브랜드 실장의 젊은 날로 돌아갔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원단의 재질과 재봉까지 꼼꼼히 살폈다. 딸이 없었기 때문에 한때 어머니가 옷을 사러 갈 때마다 나를 데려갔는데, 천방지축인 아들에겐 그건 너무나 고역이었다. 나는 대충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무조건 장바구니에 넣고 보는 편이었다.
패션에는 철학이 있다는데, 내게 남들의 시선이 원칙이었다. 꾸미는 데 더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은 전역 이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소일거리가 없는 군인들은 군대에서 옹기종기 패션잡지를 나눠보면서 치장하는 법을 배웠다. 그 무렵 나는 군대에서 일 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살을 빼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내린 날에도 뛰었다. 무릎이 아프고 미끄러져서 흙탕물을 뒤집어쓴 날도 멈추지 않았다. 상사가 찾아와서 무슨 일이 있느냐며 미친놈이라고 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도 다시는 못할 독한 짓이었다. 그 결과 몸무게가 25Kg이 빠지면서 나는 그야말로 완벽히 날씬한 체형을 갖게 됐다. 2년 만에 나간 학교 모임에서는 친구들이 나를 말 그대로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해있었다. 그 후로 나는 더욱 입고 싶었던 옷을 마음껏 샀다.
하지만 내 옷차림에서 부자연스러움과 촌스러움은 어딜 가지 않았다. 나는 고집스러운 성격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몸에 달라붙는 옷을 좋아했다. 예전엔 옷으로 몸을 가리려 했다면, 이번에는 옷에 내 몸을 맞추려 했다. 때로는 불협화음 같이 통일성 없는 총 천연색의 옷을 자주 입었다. 얌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조합은 늘 주목을 받았다. 여자 후배들은 제발 쓰레기통에 벗어던지라며 애정 어린 조언도 건넸다. 그때 나는 옷장에는 한벌의 비싼 옷보다 값이 싸도 선택지를 더 많이 두고 싶었다. 그럼에도 가지 수가 늘어나면서 이미 씀씀이는 몇 배나 커져있었다. 자신감을 얻었는데도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가 종종 하루의 기분을 결정짓기도 했다. 집안 곳곳에 아무렇게나 걸쳐진 이상한 옷을 보며 아버지는 매번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때도 어머니는 내 선택을 존중했다. 따지고 보면 충분히 뜯어말릴만한 이유가 수백 가지는 됐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런 옷들은 금방 바깥을 구경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결코 버릴 수는 없는 애물단지였다. 나는 어떤 물건이라도 감정을 오래 가지는 편이다. 누군가 그건 ‘애착 소비’라고 말했다. 물건의 가치보다 거기에 담긴 감정에 애착을 느끼는 것이라 했다. 대학교 봄 학기 첫 수업을 들을 때 입었던 리넨 재킷, 누군가와 첫 데이트를 할 때 걸쳤던 옥스퍼드 셔츠, 유럽 여행을 갈 때 가져간 하트가 그려진 카디건, 첫 면접에서 입었던 네이비 색 정장 등등. 하나하나 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게나 구겨져 먼지를 맞아도 찾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옷을 사서 추억을 켜켜이 쌓아두려고만 했다. 놓지 못하는 것들은 꽁꽁 붙잡아가면서. 어쩐지 실패에서 배운다더니 나는 늘 완패뿐이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도무지 끝을 모르는 방 정리를 하면서 옷장을 처음으로 정리했다. 한껏 고민거리를 안고 있는 내 마음처럼 이번에는 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더기로 쌓여가는 옷을 헌 옷 수거함에 넣으면서, 나는 엉뚱한 옷걸이였다는 생각에 돌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나하나 어루만지면서 그 옷을 처음 입었을 때 감정을 추모하려 애썼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든 포장하는 건 이유가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남에게 비칠 내 자존감에 자꾸 덧칠을 하는 일이겠지.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렇게 기억되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우리는 삶에 더 비싸고, 더 화려한 포장지를 덧대고 바꾸면서 가리는 게 아닐까. 그러다 보면 자꾸 맞지 않는 이상적인 체형의 마네킹을 그려놓고, 거동조차 불편한 차림을 하면서 다니는 것이겠다. 돌이켜보면 발가벗은 임금님처럼 빤히 부끄러워할 게 뻔한대도 말이다. 그러나 패션은 실패하면서 배우는 법. 이런, 저런 옷도 입어봐야 나도 어떤 옷이 잘 어울리는지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옷장을 절반 이상 비우고 나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조금 더 여유로운 옷, 단정한 옷, 오래오래 입을 수 있는 옷만 남겨 둔 것도 그때였다.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고 맞는 옷들. 시간이 지나도 유행을 좇지 않는 기억들. 더 이상 보이는 것만 신경 쓰는 게 답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건 어려웠다. 실패를 소중히 생각하되 얽매여선 안 된다는 옷장 철학도 그렇다. 나는 옷 한 벌을 살 때처럼 보고 말하는 모든 걸 가장 가까운 디자이너처럼 수천번씩 고민하기 할 테다. 어깨너머로 배운 안목을 드러내며 살아야겠다. 그러면 선택은 대부분 실패하지 않는다. “거봐 인생도 그렇단다”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