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규진 Oct 29. 2021

바다 이야기

2021년 10월 1일

“나는 그냥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요”


제주도 시내를 벗어나면서 그녀가 말했다.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녀는 운전석에 달린 거울로 내 반응을 살폈다. 더 이상 꺼내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이별의 상실감을 달래고 있었다. 굳이 다른점을 꼽자면 내 가슴속에 지난 사랑을 더 오랫동안 담아두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최근 이별의 그날을 끊임없이 복기하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제주도까지 먹먹한 미련을 한 보따리 가득 들고 그녀를 만났다. 달리는 차량 안에는 무거운 공기가 가득했다.


나는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새파란 하늘 아래 광활하게 펼쳐진 망망대해가 그리웠다. 무심코 바라보고만 있을 때면 어떤 고민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부서지는 파도에 더러운 마음을 씻어내곤 했다. 언제나 바다는 군말 없이 내 얘기를 들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기대를 품었던 건지.


“안 돌아올 거예요. 그 사람” 그녀는 자신의 전 연인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녀는 내가 억지웃음을 짓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공항에서 만난 그녀는 내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고 했다. 날카로운 것이 가슴을 찌르는 느낌이들었다. 그건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나는 반대로 그녀를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대답했다. 비겁하게 나 자신의 희망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죽은 사람의 일은 모르겠다고 했다. 다만 그때가 되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어쩌면 다른 선택을 할 것이라고 했다. 상실의 아픔은 예외 없었지만 이겨내는 방법은 달랐다. 한 사람은 희망을 놓아야 살 수 있다고 했고, 나머지 한 사람은 희망을 가져야 살 것 같다고 했다.


어느덧 창 밖에는 일렁이는 푸른 물결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해안가에 다다랐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카페에서 커피를 사들고 우리는 조금 걷기로 했다. 그녀도 이곳은 아껴두었던 곳이라고 소개했다. 여기쯤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리고 두 눈에 원 없이 담아두라고 했다.


새파란 바다 저 멀리, 끝도 없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이 끝없이 불었고 우리는 고스란히 몸을 내주었다. 손 한편에 든 플라스틱 컵에는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물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나는 바다 저 너머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도 꼿꼿한 자세로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온통 파랗게, 더 파랗게. 무신경하게 칠해놓은 그림 같았다.


나는 그동안 이별 노래만큼은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제 그럴 나이는 지났다는데 아프다고 했다. 그녀는 지난 연인이 좋아하는 노래들만 흘러나온다고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내가 걱정이 된다고 했다. 누가 더 나은 처지라고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함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진정한 인연이라 믿었던 사랑을 저버리거나, 사랑에 버려진 채 마냥 서있었다. 이제는 부질없는 것도 이곳에 놓지 못하면서.


그래서 나는 멍하니 바라만 봐야 했다. 그대로 굳어버린 조각상처럼 그랬다. 마침 귀에 들리는 것 같은 노래가 있어서 가끔 흥얼거릴 뿐이었다. 가수 윤종신 씨의 <바다 이야기>의 후렴이었다. 귓가에 닿는 바닷바람이 그 곡을 불렀다. “저 바다 건너, 다들 행복하다고 걱정 말라고. 나나 잘하라 하네” 그 노래는 그리 널리 알려진 곡도, 가사를 외운 것도 아닌데 계속 맴돌았다.


어느덧 태양이 머리 꼭대기를 지나고 있었다. 서울의 회사에서는 지방 출장을 가더니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연락이 왔다. 나는 원망스럽게 하늘과 바다를 뒤로 한 채 일터로 향했다. 그녀는 나를 데려다주면서도 힘내라며 배웅 인사를 건넜다. “정말로 그래야 살아요. 포기해야 해요” 나는 일을 시작하자마자 정신없이 허우적거렸다. 아까 전 바다가 해준 이야기 때문이었다.


바다조차 씻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름다운 그곳에서 발견한 내 마음의 얼룩은 짙었다. 섬의 어디쯤에 갇힌 것처럼 답답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밤이 되어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를 데려다준 그녀는 며칠 머물면 마음이 괜찮아 질거라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침과 밤, 새벽을 가리지 않고 나를 찾아왔다. 해가 바뀌어도 언제나 어디서나 그랬다. 나는 그날 밤에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말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패션은 실패에서 배우는 거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