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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진 Dec 18. 2021

배웅

2021년 11월 9일

선생님은 여행을 좋아하셨습니다. 학창 시절 책을 읽으며 떠나는 그곳은 언제나 다채로움이 가득했습니다. 이청준 작가가 그린 소록도가 나오는 당신들의 천국부터, 박태원 작가가 소개하는 청계천의 천변풍경까지. 우리는 놀랄 만큼 매혹적인 세계를 자주 다녀왔습니다. 여행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희망을 짓기 위해 묵묵히 물레를 돌리는 간디가 되는 법과, 모든 이와 함께 더불어 숲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주시기도 했습니다. 함께 한 수업은 학교를 떠나 세상과 삶을 마주하는 멋진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유독 비가 내리는 날이면 창 밖을 자주 내다보셨습니다. 그럴 때면 목소리를 가다듬고 교과서 대신 계절을 읽게 만드셨습니다. 언젠가 대입 수학능력시험 문제로 가득한 참고서를 내려놓으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그저 문제 풀이로만 채우지 마십시오. 우리의 영혼을 살 찌우는 건 이런 게 아닙니다 ” 어느덧 직장인이 돼버린 저는 아직도 그날의 말씀을 되새기곤 합니다. 지독한 일상이 시험문제같이 느껴질 때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슴속에 메아리치곤 합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계절에 물드는 수목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그즈음입니다.


이 책에는 그런 꿈과 사랑의 메시지가 모두 담겨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교단에 바치신 열정을 고스란히 담은 글이 엮여있습니다.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저는 까까머리 고교시절, 교탁 앞 첫째줄에 앉았던 학생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혼에 깊게 새겨진 가르침은 쉽게 바꿀 수 없듯이 생생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더불어 책을 통해 인생에 단 한 명뿐인 스승님의 순수함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생각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손수 모아주신 선생님께 다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정든 교정을 떠난다니 제자로서 아쉬움이 많습니다. 수많은 학우들의 소중한 은사님이자, 오랜 벗이 늘 계셨던 학교가 허전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선생님이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시는 것이라 믿고 응원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길을 따라가는 제자들을 위해 새로운 수업을 준비하고 계시리라 여깁니다. 문득 제가 사회생활을 준비하며 방황할 무렵 직접 보내주신 출사표 같은 글이 떠오릅니다. 먼 길을 떠나시는 선생님을 위해,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드리는 배웅으로 여기에 옮겨보려고 합니다


"지금은 긴 인생의 여정을 차분히 천천히, 사려 깊게 준비할 시간이다. 인간은 살아온 오래된 과거의 길을 되돌아보며 갈 길을 찾기도 한다. 당장 눈앞의 보이는 것만 보려 하지 말거라. 긴 인생의 여정을 그려보고 상상하는 지혜로운 안목을 터득하기 바란다. 멀리 길을 떠나는 자는 서두르지 않고,  멀리 떠날 채비를 잘해두는 일을 먼저 하는 법이다"


우리 모두 인생을 거대한 시험이 아닌, 여행으로 여기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수십 년의 수업을 제자들과의 여정처럼 여기셨던 선생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분이 지나가는 풍경과 바뀌어버린 계절도 즐길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흘려보낸 변화무쌍한 장면들을 쉽게 잊는 것이 아닌지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빗소리와 거기에 섞인 흙냄새까지 음미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주시길 바랍니다. 이 수업 도중에도 가끔씩 함께 눈을 감고 그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말입니다. 선생님의 멋진 여행이 그치질 않고 계속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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