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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진 Oct 24. 2021

조율

2013년 4월 17일

기타의 넥(Neck)을 다시 잡았다. 겨우내 찾지 않아 넥은 심하게 휘어있었다. 나는 기타를 오랫동안 치지 않았다. 알고 보면 그리 잘 치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기타를 마주칠 때면, 멈춰 서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누군가 옆에 있어도 시선을 쉽사리 뺏겨버린다. 왜일까. 거기엔 대학 초년의 모든 기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그 설렘을 떠올리려고 애쓴다.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자라 버렸고 이젠 그럴 나이가 아니었다. 방구석 한 곳에서 기타는 그렇게 먼지를 맞았다. 술을 먹을 때에만 다시 기타를 잡았다. 그리곤 곧바로 내려놓았다.


나는 참 많이 늦깎이다. 학교를 오래 다녔고 이제야 졸업을 앞두게 되었다. 정작 하고 싶은 일은 4학년이 되어서야 찾을 수 있었다. 선택은 놀라웠으며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많은 용기와 각오를 필요로 했다. 그만큼 돌이켜보니 자신이 참 비루했다. 턱없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하고 걱정한다. "할 수 있을까". 의심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한다. 어느덧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기도 벌써 한 달이 흘렀다. 동시에 군대를 전역한 지 3년째 되는 날도 지나갔다. 시간은 정말 빠르다. 군대를 다녀온 후엔 쉬지 않고 달렸다고 생각했다. 늦은 만큼 따라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강박관념이었다. 가끔 '내가 군대도 다녀왔나' 하곤 생각한다. 아직 철들지 못한 증거다.


실패를 두려워한다. 이 길은 가시밭길이다. 함께 걷는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망설이는 사람도, 주저앉아서 우는 사람도, 술로 매일을 달래는 사람도,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도 있었다. 나는 실패가 무서워서 도망쳤다. 미처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겠다고 말했다. 실수였다. 지난 1년의 휴학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많은 실패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도전의 첫 관문을 쉽사리 통과하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현실감각을 없애고 있었다. 겉멋에 취해있었다. 괜히 지난 세월들이 너무나 미웠다. 내게 '기타'로 상징되는 시간들을 미워했다. 일 년을 더 미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 어떤 답도 내릴 수 없었다. 떠밀리듯이 학교로 돌아왔다.


나의 소리는 아직 여물지 못했다. 어느 때처럼 시험에 떨어진 날, 술에 잔뜩 취한 채였다. 방 한구석, 그토록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기타가 눈에 들어왔다. 뽀얗게 쌓인 먼지, 완전히 뒤틀려진 넥이 보였다. 연주하고 싶은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더 이상 소리가 찰랑거릴 것 같진 않았다. 모진 마음에 차라리 강하게 후려쳤다. 놀랍게도, 소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기타는 줄의 장력을 이용한 악기다. 여섯 개의 굵기가 다른 줄이 넥을 쉬지 않고 강하게 잡아당긴다. 아무리 좋은 목재를 사용해도, 장력이 너무 세다면 곧바로 휘어버린다. 잘못된 습도 관리와 충격도 마찬가지다. 어떤 외부요인이 가해져도 쉽게 망가져버린다. 기타는 섬세하다. 어딘가 닮은 구석이 많지 않은가.


사람이 악기라면 더욱 쉽게 망가지겠다. 무거운 현실이 목을 조르다 보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게 여물어가는 과정이라면 어떨까. 부러지지 않는다면 바로 잡을 수 있을 텐데. 기타가 잘 마르며 익어가는 소리도 그렇듯이.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아직 늦지 않았다. 실패는 돌이켜보면 고작 1년뿐인데. 짧은 시간 안에 누구보다 이뤄 놓은 게 많았다.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조건도 누구보다 좋다. 과분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늘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부끄럽지 않게 멋진 소리를 낼 것이라고 믿는다. 언젠가 "나 이만큼이나 했어"라며 자랑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기타를 다시 잡았다.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나만큼은 나를 미워하지 말자. 모두 받아들일 수 있도록 비워내자. 소리는 점점 익어간다. 내 기타는 지금 멋진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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