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로 회사를 나왔다고 후회도 맘껏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진 이들에게
육아휴직 후 다시 복직한 회사는 사뭇 달라져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코로나로 인한 근무 환경 변화. 재택근무와 휴가 장려, 기존의 부서 인원을 쪼개어 파견 근무까지 하면서 사무실의 필수 인원을 남겨놓자니 새로 발령받은 사무실은 늘 한적했다. 혹자는 그럼 근무환경이 좋아지고 여유로워진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현실은 그 정반대였다. 그리고 특히나 휴직 전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여 새로운 부서 업무를 전혀 모르던 나 같은 직원에겐 최악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외부에서 회사의 전산 시스템을 쓸 수 없다 보니, 사실상 사무실 내 최소 인원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량은 엄청났고, 야근을 월 11시간으로 제한했기 때문에 근무량을 늘려서 처리할 수도 없었다.
나같이 연차는 높지만 일은 서툰 신규 직원에게 일을 알려줄 사수도 업무 교육도 기대할 수 없었다. 연차가 높은 죄로 일은 눈치껏 익혀서 해내야 했고, 그러다가 실수라도 나오면 나보다 십수 년 어린 회사 후배들의 온갖 눈총과 짜증 섞인 반응을 겪어야 했다. 모멸감이 들었지만 감상에 빠져 허비할 시간조차 없었다. 누구보다 새벽에 일찍 나가 업무방법서와 매뉴얼을 공부했고 야근을 쓸 수 있는 한도에서 다 쓰며 매일매일 업무를 해냈다.
오전 내내 기계처럼 업무를 하다가 문득 조용해져서 고개를 들어보면 같은 팀 직원들은 모두 점심식사를 위해 어디론가 자리를 비우고, 덩그러니 나 혼자 부서에서 시켜주는 도시락을 먹었다.
점심시간에는 사무실은 늘 소등되었다. 컴컴한 사무실에서 스탠드를 켜 놓고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업무 처리를 하다가 보면,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에는 소변이 마렵거나 머리가 아팠다.
복도 끝 여자화장실 제일 구석의 빈칸, 용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면서 동시에 이를 닦고 휴대폰으로 개인 카톡이 있는지 확인하거나 아이들 사진을 보는 15분 남짓이 하루 일과의 가장 긴 휴식이었다.
15분 이상 길게 앉아있기도 어려웠던 것은 1시면 곧 업무시간이 시작되기 때문에 여직원들이 양치를 하거나 화장을 고치기 위해 북적거리기 때문이다.
그날도 막 자리를 털고 나가려는데,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들이 들렸다.
“무슨 곰도 아니고.. 눈치 더럽게 없네. 개짜증!”
“그러니까요. 저희 부서를 괜히 아오지탄광이라고 하겠어? 인사부가 업무 1도 모르는 자기 같은 나이 많은 아줌마 발령 낸 걸 보면 딱 알아채고 스스로 손들고 나가던가 해야 하는데..”
“이번에 가족 돌봄 휴가 신청하려고 했다며? 암튼 줄줄이 애 가진 게 유세야!”
“어휴. 저런 노땅들은 다 꺼져버렸으면 좋겠어!”
우리 팀 여직원들이었다.
기혼에 아이가 줄줄이 딸린 곰같이 미련한 나.
79년생 마흔 줄의 나이 많은 아줌마. 육아휴직으로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아이의 비대면 수업을 이유로 가족 돌봄 휴가 10일을 신청하려다 부서의 난색으로 신청을 포기한, 더럽게 눈치도 없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회사를 아등바등 다니려고 조카뻘의 구십몇 년생 여직원들의 따돌림도 묵묵히 참는 나.
순간 깨진 핸드폰 액정 유리 위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내가 입사하던 해는 리만브라더스 사태 이후 금융 위기로 특히나 금융권 채용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고 했던 해였다. 제조업 회사를 다니다가 국내에서 금융 MBA 과정을 마치고, 시중 3대 은행 중 하나라는 곳에 서른이 넘은 나이에 투자금융 전문분야 인력으로 300:1의 경쟁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 당시 은행장 이름으로 축하 꽃다발이 집으로 배달되어 왔던 기억과 처음 본사 건물의 IB사업부로 발령을 받았을 때 부서장님이 반갑게 환영식을 해 주셨던 따뜻한 기억이 있다. 사수들을 쫒았다니며 열심히 배우고 제법 똑똑하게 일 잘한다는 소리도 들어봤다. 루키, 에이스, 당차고 똑똑한 젊은 여직원이 들어봤었을 법한 온갖 찬사들과 수식어들이 한때 내 것이었다.
큰 아이의 육아 휴직 중에 나를 아끼던 팀장님께서 친히 전화를 주셨다. 육아 휴직을 2년까지 쓸 수 있겠지만, 그동안 근무하던 부서와 자리로 돌아오려면 연말 인사이동 시기에 맞춰서 1년 일찍 복직원을 내라는 팁을 주셨다. 그러나 당시 큰 아이는 심장판막 수술 후 회복 중이었던 상황이라, 차마 남의 손에 아픈 아이를 맡기고 일을 나갈 수 없었다.
첫 번째 복직 후 나는 영 생소한 부서에 발령받아서 처음부터 일을 배워 익혀나갔다. 다행히 나를 좋게 봐주신 사수들 덕분에 점차 새로운 부서에서 인정도 받고 업무에도 익숙해졌다. 워킹맘으로 몸은 항상 바빴지만 하루하루 건강해지는 큰 아이의 모습에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 직장이 든든했고 내 자리가 소중했으며, 나를 품어준 사람들이 고마웠고 그때는 나도 남을 품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둘째 아이를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산으로 낳은 오빠와는 달리 딸아이는 우량아에 가깝게 건강하고 사랑스러웠다. 동생의 존재를 어색해하는 큰 아이에게 엄마가 가진 사랑이 공평하고 무한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두 아이의 잠든 모습만 봐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들을 위해 좋은 엄마가 되기로, 좋은 사람이 되기로 수백 번 수천번 아이들의 고사리 손을 잡고 다짐했다.
다시 돌아온 직장은 낯선 일터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온도 역시 너무나 차갑게 식어있었다. 사람들은 마스크 뒤로 각자의 분노와 좌절과 노여움을 숨겨놓고 있다가 기회를 포착하면 가감 없이 약한 곳을 공격했다. 나의 서툰 업무 실수로 인해 자신들의 6시 정각 퇴근 시간이 늦어질까 12시 정각 점심시간이 축날까, 마스크 위로 짜증 섞인 눈초리와 경멸을 너무나도 쉽게 날렸다.
“IB전문 인력이면 똑똑한 줄 알았는데 과장님은 아닌가 봐요! 석사도 하신 거 아니에요? 왜 이런 걸 틀려요?” 막내 여직원이 해맑은 표정으로 칼을 꽂으면, 나머지 여직원들은 키득거렸다.
그들의 냉대와 혐오의 근본적인 원인이 내가 나이가 많음인지, 단순 업무 실수 때문인지 짜증 나는 현실에서 오는 스트레스 풀이를 위함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팀장은 나보다 서너살 많은, 일과 결혼했다는 미혼 여성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자기라고 불렀지만 단 한번도 그 호칭이 친근하거나 다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팀장은 동생같은 젊은 여직원들 비위하나 잘 못 맞추는 융통성 없는 나를 탓했다.
“자기, 애들이 자길 넘 불편해한다. 사람도 빠져서 없는데…그렇게 쉬다 와서 회사에 민폐끼치면 안되잖아. 내가 보기 안타까워서 그래.”
복직 후 몇개월도 안되는 그 짧은 시간동안 내 무엇이 그들을 불편하게 했을까? 거듭 생각해 볼수록 서글펐다. 그들에겐 내가 유행지나고 오래된 구형 핸드폰처럼 기능엔 지장은 없지만 뭔가 후져보인다는 것일까? 후진 것은 뒤쳐졌다는 것이고 뒤쳐진 것은 불편해 보일터였다. 그런데 과연 내가 그런건가?
그들은 내가 업무를 배우면서 서투르게 이것 저것 물어보는게 불편했고 종당 그 업무를 잘해내도 불편하다고 했다. 그들의 불편한 시각이 만든 오해가 마치 나에대한 평가라도 되는 양 확대되고 재생산 되었고, 그것은 응당 잘 쉬다온 내가 치뤄야할 대가 혹은 그들에 대한 미안함, 죄스러움이 되어야만 했던걸까?
그 해 연도말, 퇴직 신청을 했다.
그 소식에 나의 사수였던 직장 상사들과 팀장님들, 동료들에게 다급히 연락이 왔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시기에 제 발로 나가겠다고 하는지 물으며 모두들 말렸다. 정기 인사는 2년마다 순환 보직되니까 참고 나중에 부서를 옮겨보라고 지금이라도 인사부에 퇴직을 철회한다고 하라고. 간혹 이제 사십 대에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거냐며, 혹은 이직을 하냐며 묻기도 했다.
새로운 시작.
긍정적인 어감이 마음에 들어서 그렇다고 얼버무렸다. 퇴직 인사를 돌고 나오면서 회사 앞의 통신사 대리점에서 쓰던 핸드폰을 바꾸었다. 아이폰 신형 중에서도 액정이 가장 큰 기종을 골라 정성스레 닦고 보호필름을 붙였다. 다시는 구석진 화장실에서 핸드폰 액정을 눈물로 적시는 구질구질한 경험을 단 1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내 발로 나왔고 내가 바꾼 거야. 내가 바꾼 거니까 괜찮다고. 괜찮을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