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퀘스트를 완주하는 마음으로
'게임'은 '인생'에서 유희의 형태만 따다 담은 예술이라 생각한다. 인생과 비슷하지만, 피로한 고난은 줄이고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스릴과 유희만 담는다. 가끔 게임을 하다가 '인생도 이렇게 단순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사실 '인생에 고난은 없고 행복만 가득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나 역시 닌텐도 게임 '동물의 숲'을 플레이할 때마다 돈 벌기가 이렇게 쉽고, 돈 쓰기가 이렇게 미련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성공과 출세가 아닌 오늘의 행복을 위해 낚시, 농사, 채집 따위로 돈을 벌고 이웃과 교류하며 화석을 캐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삶이라니. 아무리 빚이 많아도 이자는 없고, 빌려준 너굴씨도 재촉 한 번 하지 않는다. 내가 집을 키우고 싶다고 하면 서류 한 장 없이 나만 믿고 큰돈을 빌려주는 너굴씨.. 현실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게임을 만들 때엔 우선 잠재적 유저들을 끌기 위해 흥미로운 스토리 라인을 설정하고, 최종 목표와 이후 보상을 명확하게 설정한다. 유저가 꾸준히 접속할 수 있도록 데일리 퀘스트를 만들고, 지루하지 않게 긴 주기의 챕터 별 미션과 서브 목표도 넣는다. 이때 최종 목표를 이루는 난이도가 어려울수록, 또는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서브 목표가 잘 설정되어 있을수록 유저들은 게임을 장기적으로 플레이한다. 반대로,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엄청나게 큰 액수의 캐시가 주어진다면, 그래서 남들은 쉽게 못 얻는 아이템을 원하는 만큼 다 얻을 수 있다면 그 게임을 주기적으로, 또 장기적으로 플레이하기는 어려울 거다. (레벨 설정이 중요한 이유!) 초반 플레이에서 느끼는 잠깐의 쾌락을 뒤로하고 금세 새로 깰 퀘스트가 없음에, 어려운 최종 목표가 없음에 허무와 지루함을 느끼고 게임을 떠나게 된다.
또 다른 예시로는, 싯다르타와 쇼펜하우어의 어린 시절이 있다. 모든 호사를 비교적 쉽게 누리고 나면 그 끝엔 허무함밖에 남지 않음을 반증하는 시간이었다. 싯다르타는 열반에 올라 부처가 되었고, 쇼펜하우어는 비관론의 한 획을 긋는 철학가가 되었다. 어쩌면 그들의 삶은 어린 시절 모두 겪어버린 그 감정의 본질을 딛고 일어서는 긴 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삶은 최종 목표를 다 이루고 난 뒤의 삶이 허무할 뿐 아니라 쾌락과 고통의 모양이 제법 비슷하다는 교훈을 주었으나, 그것만은 시사하지는 않는다. 긴 여정 끝에 목표를 이뤄도, 그게 끝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결국 딛고 서야 할 것은 나 자신과 떼어놓을 수 없는 감정의 파도이다.
내 삶에는 감사할 일이 많다. 맛있는 음식 한 입, 푸르게 핀 나무와 꽃, 기분 좋은 햇살과 살랑이는 바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짧은 대화, 멀리서 바라본 낯선 사람들의 사랑스러운 교류, 세상에 악한 것은 없다고 믿게 되는 맑고 순수한 아기의 웃음, 귀여운 소품들을 사면서 해소되는 소장 욕구. 세상엔 나를 웃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물론 일상에는 금방 익숙해져 감각할 수 없는 행복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여행을 떠나 새로운 것들을 마주하고, 더 넓은 세상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곤 했다. 캐시로 산 행복이 아니라, 게임 속 매일의 이벤트처럼 쌓여가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우울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멀리 떠난 여행에서 느닷없이 찾아와 뇌를 마비시키던 그 우울은, 마침내 집에 돌아왔지만 이곳에서도 딱히 달라지는 것이 없음을 깨닫자마자 나를 완전히 잠식시켰다. 하루하루 퀘스트는 점점 더 어려워졌고 보상은 전혀 없었다. 게임을 이어갈 의지도 잃었지만 멈추는 것조차 능력 밖이었다. 뇌가 고장 났을 뿐인데 내 다리는 침대 밖을 나서지도 못했다. 겨우 타협해 집 앞을 나선 날에는 쉴 새 없이 이유도 모르는 눈물이 흘러 몇 발자국을 이어 가지도 못했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마음과 같이 고장 나 성한 곳이 없던 몸도, 이유도 모른 채 흐르기만 하던 눈물도,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주변인들도 아니었다. 다시는 감사할 수 없는 삶이 계속되는 것이었다. 그토록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온 나는 닥쳐온 불행에 그 흔한 불평도, 원망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누려온 행복에 비긴다면 이 불행은 감내해야 할 수준일 테니까.
그리고 마침내 놓아야 할 것을 놓았을 때, 영원히 짙은 어둠이 드리운 줄 알았던 내 인생은 기어이 나를 다시 빛 앞으로 데려다 두었다. 그곳을 아는 나는 일말의 타협도 없이 그 빛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한 줄기의 빛으로도 나의 어둠을 감싸기엔 충분했다. 내 인생에 감사가 되돌아온 순간이었다. 갈구했기에 다시 마주했을 때는 더욱 소중히, 더욱 가슴 깊이 새겼다. 매일매일의 보상을 박하게 아끼지도, 내일이 없는 것처럼 다 써버리지도 않았다. 돌이켜보면 인생이라는 게임을 더 현명하게 플레이하기 위한 중요한 스테이지였는지도 모르겠다. 고난이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격언처럼.
나는 오늘도 게임하듯 살아가려 한다. 목표도 퀘스트도 내가 정하고, 그 안에서 얻는 감사는 잊지 않고 모아둔다. 나만의 스토리라인을 직접 만들어 앞으로 마주하게 될 수많은 퀘스트들을 달성하며 성취를 느끼고, 찾아올 챕터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며 애정을 듬뿍 쏟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가장 긴 RPG를 플레이하며 지치지 않고 오히려 즐길 수 있는 가장 행복한 플레이어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몇 번이고 다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닌 한 번뿐인 내 인생을 살아가며 누군가 설정해둔 최종 목표를 좇을 것인지 묻고 싶다. 누구나 삶에 파고들기 전에 지금의 목표가 내가 설정한 것이 맞는지 재고해 보는 시간이 있기를 바란다. 그 목표가 사회적 성공이든 명예든 돈이든, 내가 정한 것이기만 하다면 좋다. 그게 정답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언제든 새 목표를 설정해 다시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