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좋은 사람일까?
2021.09.04. 연극 <렁스>
배우: 오의식, 류현경
연극 <렁스>를 본 후 감상을 기록으로 남기기까지는 많은 고민이 있었다. 렁스는 한 마디로 신선하고 충격적이며, 나를 포함한 누군가의 인생작이 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세트는 하얀 무대뿐이며 의지할 곳이라고는 조명, 그리고 배우들의 말과 표정뿐이다. 시간과 공간이 빠르게 전환되기 때문에 대사의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잘 따라가야 했다. 극 중 여자와 남자는 오래된 연인이다. 이 둘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한다. 환경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논쟁하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고민한다. 대사들이 쉴 틈 없이 이어지고, 단 한 문장도 놓칠 수 없을 만큼 모든 대사가 가슴으로 날아와 콱 박힌다.
이 둘의 대화는 대화가 아니다. 이들은 대화를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둘의 대화는 대화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듯한 날카로운 여자의 말, 그리고 남자의 지친 표정... 여자의 대사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남자가 하는 말은 고작 "그래, 알겠어." 정도이다.
여자는 세상일에 관심이 많고 논쟁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와 닮은 부분이 많은 인물이기 때문에 더욱 공감이 됐다. 남들이 나를 바라볼 때 저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남자도 여자의 영향인지 세상일에 관심이 많다. 이 둘은 환경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한 논쟁도 환경에 대한 논쟁에서 시작된다. 여자는 현시대의 여성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처음부터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이다. 반면, 남자는 아이를 원하지만 종종 여자의 의견에 동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두 사람은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서는 인류가 사라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한 사람이 평생 배출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탄소는 물론이고 그들의 번식을 통해 배출될 잠재적인 탄소까지 생각한다면 아이는 낳지 않는 것이 맞다. 그리고 이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점점 임신을 하지 않게 될 것이고, 무지한 사람들만이 번식을 이어갈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지구에는 열등한 유전자만 남게 되어 살기 더욱 나쁜 환경이 될 것이다.
나도 비슷한 느낌의 생각을 추상적으로 한 번쯤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감히 구체화할 수 없는 생각이었고, 입 밖으로 내뱉어 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회적 이미지와 체면을 생각했을 때, 이 같은 생각을 내뱉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불편한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말로 내뱉는다.
'멍청해지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이를 갖고 싶진 않아.'
극 중반부터 이들은 아이를 갖기로 결심하게 되지만, 이후 여자는 남자의 모든 성적 행위를 폭력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특히,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여자는 마치 남성에게 강간당하는 듯한 느낌을 거침없이 말로 묘사한다. 이들은 오랜 연인으로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계속해서 남자의 행위를 폭력적으로 느낀다. 글로 적기 어려울 정도로 폭력적이고 소름 끼치는 단어와 문장으로 여자는 그녀가 느낀 공포를 묘사한다. 이는 여성이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과장되지만, 매우 직설적이면서 실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내 주변에 앉은 커플들 중 일부 남성들은 이들의 대화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으며, 극 후반으로 갔을 때는 객석 곳곳에서 남자 관객들이 훌쩍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도 극을 보면서 잘 우는 유형의 사람이지만, 이처럼 남자 관객들이 많이 우는 공연은 처음이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들의 대화를 불편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바로 연극 <렁스>가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공연 내내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충분히 남자가 관계에 질리고 지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극 후반부에 가면 알 수 있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고, 공감하고 있었고, 적절한 대답을 알지 못해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잠든 여자를 바라보며 남자는 이런 말을 한다.
"언젠가 네가 읽던 책을 펼쳐 네가 밑줄 그어둔 부분을 다시 읽어 볼 거야. 그럼 그때의 너를 이해할 수 있겠지."
이 말이 나의 가슴으로 날아와 '쿵' 하고 닿았다.
연극 <렁스>는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전 생애를 다루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현실에서 한 번쯤 경험해 볼 법한 모든 불편한 상황과 이야기들을 직설적으로 가감 없이 말로 표현하면서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개인적으로 20대 후반이 지난 시점에서 이 작품을 볼 것을 추천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공감되고 와닿는 것들이 많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이 작품을 오래도록 보고 싶어졌다. 대사들을 복기하고 싶어 재빨리 원문 대본을 주문했다. 택배를 받자마자 슬쩍 읽어봤을 뿐인데 또다시 눈물이 났다.
연극 <렁스>는 나의 인생작이고, 당신의 인생작이 되기에도 충분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