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꽃이 나의 슬픔을 안다면 분명 눈물 흘릴텐데
연극 <올드 위키드 송>
이 작품은 나치정권의 피해자였던 마슈칸 교수와 그의 제자 스티븐(슈테판)이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Dichterliebe)'을 함께 공부하는 과정을 그린 극이다.
이 극은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과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동일시하며 비유적으로 서사를 풀어간다. 음악도 사람도 모두 성급하게 판단하고 감정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이해하고 가끔은 충분히 멈추고 침묵을 들으면서 다가가야 한다.
피아니스트인 미국인 스티븐(슈테판)은 슬럼프를 극복하고자 음악의 고장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건너오게 된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스티븐은 삶 속에서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점을 크게 인지하고 있지 않았지만, 유태인에 대한 모욕적인 말을 뱉어내는 마슈칸 교수에 대한 반감을 종종 드러내곤 한다.
쉴러 교수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뮌헨의 여정에서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다하우 수용소를 다녀오게 된다. 그곳을 직접 눈으로 보고 온 슈테판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 그는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유태인에 관한 모든 일들에 극도로 예민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그때 마슈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만해! 앵그리 유태인이 한 명 더 생겼군. 세상이 원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 대사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문득 세월호와 이태원 사고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이 떠올랐다. 분명 피해자인데 그들이 분노하고 화를 낼수록 시대는, 사회는, 정치인들은 그들을 앵그리 집단으로 이미지화 하고 그들을 통제한다. 실제 나치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피해자 마슈칸은 그 지점을 알고 있었기에 슈테판이 흥분하고 화를 표출하는 것이 결코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슈테판은 나치 정권 하에서 권력을 누렸던 자들이 계속해서 대통령에 당선되는 사실에도 끝없이 분노한다. 하지만 이 때도 마슈칸은 이렇게 말한다.
"나치가 수십만이 넘는 시대였어. 나라를 운영하면서 어떻게 나치였던 사람을 단 한 명도 쓰지 않을 수가 있겠어."
정치적 논쟁에서 유태인들에게 스테레오 타입을 씌우고 나치 피해자라는 명목으로 사회에 부당한 요구를 하는 부정적인 집단으로 규정해버리는 현실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의 피해자들도 마찬가지로 언론, 정치인, 그리고 사회가 그들에게 씌운 부정적인 프레이밍 속에 갇혀있진 않을까. 정작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규명과 진심어린 사과였을지도 모른다. 피해자도 아닌 사람들이 진짜 피해자들에게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현실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한 것 같다.
음악극 <올드 위키드 송>은 이 모든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음악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피해자들이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극이 조금 어렵고 가끔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슴에 오래 남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