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규림 May 12. 2024

까만 피부가 고민이라면

마음 밭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데 밥과 우유와 고기가 큰 몫을 하겠지만 그만큼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있다. 말. 부모의 말. 나의 말을 먹고 아이들은 이만큼 자랐고, 나도 내 부모의 말을 먹고 이만큼 살았다. 그래서 난 아이들이 말을 할 때, 특히 무언가 질문을 할 때 귀담아듣는 편이다. 아이의 질문을 잘 듣고, 머릿속에서 대답할 말을 이리저리 골라, 제법 진지하고 성실한 답변을 한다.


"엄마. 저 사진에 아기 나지? 저때는 하얬었는데 지금은 왜 까만 거야?"


"음... 아기 때는 하얬는데 크면서 좀 까만 피부가 됐네."


"언제까지 까만 거야?"


"계속 까만 피부일 거야. 아빠의 까만 피부를 닮았나 봐. 이모도 까맣잖아. 하얀 사람도 있고 까만 사람도 있는 거야."


"그래도 나는 하얀 피부가 예쁜 거 같아."


"하리는 까맣지만 눈도 예쁘고 눈썹도 예쁘고 너무 예뻐. 하리는 아빠 피부를 닮아서 좀 까만 편이지만 예쁜 곳이 훨씬 더 많아."


"혜리는 하얗잖아."


"하리야. 사람마다 다 다르게 생겼어. 엄마도 키가 작고 다리가 통통한 게 싫었어. 그런데 그건 엄마가 바꿀 수 없어. 하리 피부도 바꿀 수 없는 거지? 계속 나는 왜 이렇게 까맣지? 키가 작을까? 하고 불평만 하면 속상한 마음으로 사는 거야.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면 그냥 저 친구는 하얗구나~ 부럽다. 하고 넘어가고 너의 예쁜 점을 사랑해 주면 되는 거야."


"아. 그렇게 하면 마음이 안심되는 거야?"


"그럼! 하리 마음이 편해지는 거야. 네가 네 스스로를 사랑해 주고 예뻐해 주는 게 제일 중요한 거야."



요즘 들어 부쩍 외모에 관심이 많아진 첫째가 자주 하는 말이다.


"하얗게 되고 싶어. 어떻게 하면 하얘지는 거야?"


그때마다 하얘질 수 있다고 말해주기보다 선크림과 모자를 잘 사용해서 피부를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고민에 대한 내 대답에 아이는 "그러면 마음이 안심되는 거냐?"라고 되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자신의 피부가 까만 것에 대한 고민의 가장 큰 중점은 '자신의 마음이 불편한 것'이라는 걸 말이다. 예쁘게 보이고 싶었던 것보다, 자기 스스로 피부색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자녀가 어떻게 컸으면 좋겠는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는지 가끔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내 자식이기에 바라고 기대하는 바가 너무도 많지만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마음이 편한 아이로 자라는 것'이다. 불안하고 불편하고 두려운 마음이 아니라 편하고 평안하고 온유했으면 좋겠다. 나는 어린 시절 편하지 못했다. 환경도 불편했지만 늘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꽤 힘이 세다. 뿌리를 깊이 내리고 넓게 퍼져나간다. 불안한 마음밭을 갈아엎어 사랑도 심어보고 소망도 심어보고 평안도 심어 보지만 열매 맺기까지 잘 키우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지금도 자주자주 갈아엎는다. 불안이 몰려올 때마다 삽으로 퍼내듯 힘겹게 뒤집고 또 뒤집어 평안의 밭을 만든다. 그 횟수가 많아질수록 신기하게도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봉오리가 맺힌다.


부정적인 감정이 다가옴을 느끼는 것은 좋은 신호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대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면 이제 나는 움직인다. 몸을 움직여 집안일을 하기도 하고 걷기도 한다. 불안하고 두려울 땐 몸을 굽혀 기도하기도 하고 외롭거나 쓸쓸함이 몰려올 땐 글을 쓰기도 한다. 내가 겪어본 바로는 내 밭은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없다. 나만 가꿀 수 있는 밭이다. 함께 농사지을 동역자가 있다면 당연히 더 좋겠지만.

내 자녀들에게 나는 농부 친구인 셈이다. 먼저 일해본 사람으로서 조언과 도움을 줄 뿐 자기 밭을 일굴 사람은 우리 아이들 스스로다. 잘 자라도록, 잘 가꾸도록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일 말고는 내가 직접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내일도 맛있는 말을 골라 아이들에게 먹이고, 따뜻한 마음을 골라 아이들 밭에 뿌리고, 한없는 사랑의 흙으로 덮어줄 것이다. 이상하게 아이들의 밭을 돌볼수록 내 밭이 풍성해진다. 참 놀라운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비 오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