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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 Oct 19. 2021

<오징어게임> 비평

그 안에 나타나는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

[진부한 데스 게임 영화 문법]


서바이벌 데스 게임을 소재로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 흥행 1위의 열풍을 이어가고 있지만 오히려 국내에서는 재미있었다는 반응 외에도 신파와 표절, 클리셰 범벅의 진부한 장르 영화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비평 또한 보게 된다. 외국인과 노인, 여성에 대한 비하와 젠더 감수성에 대한 부재의 비난도 들려온다


국내 영화의 그런 특성들에 대해 평소에  싫증을 느끼던 나는 <오징어 게임>에 대한 별다른 기대 없이 시리즈를 보기 시작했고 곧 조금씩 빠져들며 몰입하게 되었다.


이 드라마의 흥행 성공의 이유가 무엇일까. 영화 전공인으로서 이런 장르영화의 규칙과 클리셰에 익숙해져 있어서 사실 보는 내내 어렵지 않게 다음 장면을 유추할 수 있었고 그 예측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서로 신뢰 관계인 짝을 지은 두 사람이 죽음의 게임을 하게 되는 것과 결국 상우가 알리를 속일 것이라든지 오일남이 기훈에게 양보하고 미녀가 덕수에게 복수하게 될 것, 전화기의 수화기를 반대편으로 놓음으로써 침입자를 확인하는 것 등 그리고 마지막 상우와 기훈의 대결구도까지..


프론트 맨이 비밀을 캐기 위해 몰래 이곳에 잠입한 경찰 황준호의 형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챈 것도 이렇게 치밀한 시스템을 만들고 그 안에서 비밀유지를 하는 자가 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자를 사살하거나 잡으려는 노력이 급박하거나 절실하지 않다는 점에서였다.


주인공인 성기훈의 어머니가 죽을 것이라는 것은 그 화의 제목이 '운수 좋은 날'이라는 현진건의 소설에서 차용했기에 한국 사람이라면 쉽게 누구나 예상 가능했다.


한 가지 제일 중요한 반전인 오일남이 주최자였다는 사실은, 성기훈이 살아남은 후 깐부에게 명함을 받는 장면에서야 깨달았는데 그 이유는 오일남이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구슬 게임에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등 치매 연기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드라마를 자세히 봤으면 오일남이 '제발 그만해 나 무서워'라고 절규하자 프론트맨이 바로 싸움을 멈춘다든지 오일남의 죽는 장면을 안 보여주는 것이나 이기훈에게 자신의 1번 번호가 적힌 자켓을 주며 '이것이 없으면 사람들에게 무시 당해'라고 말하는 은유적인 장면에서 유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흥행 이유-서사, 미장센, 배경음악, 자본주의 은유, 공감과 대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드라마가 왜 그렇게 전 세계적으로 흥행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뻔한 장르적 문법에도 불구하고 마치 현대 미술을 보는 듯한 파스텔톤의 시각적인 화려한 세트의 미장센, 감독이 숨겨놓은 여러 의미 있는 은유 장치들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각 캐릭터들의 조화, 감정을 이입하게 만드는 빌드 업된 그들의 서사로 인해 드라마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남을 짓밟고 살아남는 무한 경쟁 사회인 자본주의의 승자독식 구조를 닮았으며 밑바닥까지 내려간 소외된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상금 456억 원을 차지하기 위해 남을 속고 속임 당하며 살아남는 잔인한 세계가 이 사회의 축소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게임은 우리나라 전통놀이에서 차용하여 아주 단순하고 쉽다. 외국에도 비슷한 아이들 게임이 있기에 공감이 되고 한국적인 놀이에서 오는 신선함도 있다. 아이들의 그 순수한 놀이가 잔인한 죽음을 부르는 피범벅과 극렬한 대비를 이룰 때 배경음악인 리코더의 동심을 표현한 가락마저 기괴한 사운드로 들린다.


알록달록한 파스텔 색상으로 만들어진 계단 세트나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에서의 일어나는 피와 살인은 그 부조화로 인해 더욱 소름 끼치는 잔혹 동화를 연상시킨다.


[기독교 비판-신에 대한 항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첫 번째 게임에서 그로테스크해 보이는 무표정한 인형의 얼굴로 자행하는 무차별적인 학살에 준비되지 않은 참가자와 관객들은 당황하며 그 장면을 가장 인상 깊은 장면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불합리한 게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 공평과 누구에게나 평등한 게임 룰을 얘기하던 주최 측이 그야말로 게임에 지면 죽음이라는 힌트조차 주지 않은 채 참가자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서지만 파이널 라인에서 마지막 결과는 삶과 죽음이라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이 첫 번째 게임을 본보기로 참가자들에게 선택권을 주지만 기권을 택한 그들은 결국 다시 돌아온다. 현실 세계가 지옥이나 다름없었기에 차라리 수백억의 돈이 걸려있는 게임 속 세상이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는 세상이었다.


주최 측은 공평과 평등을 말하지만 폭력과 살인을 방조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운과 권모술수에 맡겨버리며 참가자들을 체스 판 위의 말로 치환시켜버리는 이 세계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에서 주어진 조건과 운명에 맡긴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관한 자조이며 신에게 하는 항의일지도 모르겠다.


극 중 등장하는 기독교인은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기 위해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위선자로 나온다. 그가 신에게 하는 감사는 오직 자신의 안위에 대한 감사이며 죄를 지으면서도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말로 정당화한다. 기독교를 몹시 혐오하는 인물인 극 중 지영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 아버지인 목사는 아내를 죽인 살인자이며 딸에게 몹쓸 짓을 하는 인간 말종이다.


조금 과장되고 풍자적으로 비틀린 부분도 있지만 솔직히 그런 거짓된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인의 탈을 쓰고 기생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이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떤 모습과 이름으로 비치는지 알기에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그들의 행태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너무나도 부끄러운 부분이다.


이 드라마에서 흐르는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보면 감독은 이 외딴 무인도에서 벌어지는 극악무도한 게임의 희생자들이 신이 만들어 놓은 불공정한 현실 세계 속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신이 아닌 인간의 욕심]


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규칙만 지키면 다 같이 협력하여 게임에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과반수가 반대하면 중단도 가능하다. 그 모든 혜택을 거부하고 서로를 속이고 이용하고 죽이고 배신하는 것은 욕심에 눈이 멀어 벼랑 끝에 서있는 인간들 자신이다.


서울대를 졸업한 엘리트인 상우는 자신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주는 순박한 이주 노동자인 알리를 철저하게 속이며 이용하고 기훈은 연약한 노인인 오일남에게 보이던 연민과 배려를 살고자 하는 욕망 앞에서 거두며 배신한다. 작은 조역인 유리 공장 장인도 얼마든지 처음에 나서서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끝내 모른 척한다.


숙소 침대 뒤에 숨겨진 벽에는 앞으로 참가자들이 할 게임이 순서대로 그려져 있다. 서로 죽고 죽이며 상금을 차지할 생각에 눈이 멀어있어서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참가자 중 한 명인 의사는 다음 게임을 알아내기 위해 장기 밀매를 위한 적출 수술을 돕다가 인과응보의 결과로 자멸하게 되는데 상우와 함께 그 좋은 머리를 서로 짜내었더라면 그 픽토그램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리를 건너는 마지막 게임도 유리 장인의 도움을 받아 두 명이 함께 설 수 있는 강철 유리의 힌트와 벗어놓은 신발을 이용해서 서로 협력했다면 무사히 건널 수 있지 않았을까.. 던질 수 있는 게 오일남이 남겨 준 유리구슬 하나뿐이었을까? 그들은 하찮은 사물이나 신발 대신, 사람의 생명을 물건처럼 던져서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


[숨은 의미와 메타포, 인간의 내면 심리]


<456번 넘버의 은유>


이 드라마에는 픽토그램뿐 아니라 여러 기호와 의미가 깊이 숨겨져 있다. 이곳에서 숫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선 최종 상금인 456억과 456번의 기훈의 등번호. 그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물론 의도적이겠지만 기훈이 경마장에서 딴 금액도 456만 원이다. 456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게임의 설계자인 오일남이 1번을 달고 있고, 자켓을 벗어서 자신을 도와준 기훈에게 기훈의 자켓이 아닌 자신의 1번 자켓을 돌려주면서 '이것이 없으면 무시 당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오일남의 1번과 기훈의 끝번호인 456번 숫자는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리 건너기 게임 전 사람들은 중간 번호를 제일 먼저 선택한다. VIP는 '중간 번호가 먼저 나간다. 그게 동물들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456은 중간 번호, VIP들이 동물로 비유한, 즉 가장 평범한 일반 대중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456 넘버(대중)는 상황에 따라 일확천금이 되기도 하고 기훈처럼 가장 끝 번호가 되기도 하는 두 개의 중첩된 의미를 가진다. 부동산 주식 비트코인 등으로 한 순간의 운에 따라 대박이 날 수도 다 잃고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요즘 현대인들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싶다.


<만원의 행복>


또 다른 숫자로는 만원이 나온다. 요즘 시대에 만원은 겨우 밥 한 끼를 대충 때울 수 있는 작은 돈에 불과하다. 하지만 기훈은 그 만원으로 경마장 창구 직원에게 호기롭게 팁으로 줬다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뺏기도 하고 이주 노동자 알리는 상우에게 받은 만원의 교통비에 감사하다가 그것이 결국 그의 목숨 값이 되기도 한다. 인정으로 베풀었던 그 만원 덕분에 상우는 결국 살게 된 것이다.


만원은 딸의 생일 선물이 되기도 하고 기훈이 엄마에게 드릴 맛있는 고등어의 값이기도 하며, '만원의 행복'이란 TV 프로그램의 제목처럼 서민이 소소하게 가질 수 있는, 인간이 살아가는 최소한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상징적인 금액이 된다. 기훈은 그 이상의 엄청난 돈 456억 원으로도 결코 만원의 행복을 살 수 없는 것이다. 엄마가 죽은 후에야 그것을 깨달은 기훈은 그 받은 456억 원의 상금 중 만원 외에 단 한 푼도 쓰지 않는다. 그를 vip로 대접하는 은행장에게 기훈은 그런 의미에서 만원만 빌려줄 수 있는지 물은 것이다.


<블루 칼라 & 화이트 칼라>


상우와 기훈 두 캐릭터를 살펴보면 이 사회에서 지배계급인 최고 학벌 엘리트인 상우와 자동차 회사 해고 노동자인 기훈은 화이트와 블루 칼라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화이트 칼라인 상우는 이주민 노동자인 알리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하는 상류층 마냥 동정을 보내고 기훈과 어린 시절 함께 자랐던 우정의 관계를 맺으면서도 가장 중요할 때는 게임 규칙을 알려주지 않으며 뽑기 게임에서 자기만 쉬운 것을 택한다. 또한 알리의 구슬을 속여서 빼앗고 다른 노동자인 유리 장인을 밀어버려서 죽음으로 내몬다.


또 다른 엘리트 계급인 의사도 마찬가지이다. 겨우 다음 게임을 알아내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의 장기를 적출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힘 있는 자인 폭력배에게 빌붙는다.


위로 올라갈수록 겉으로는 점잖고 나이스 한 척 위선을 떨다가 자신이 불리해지면 타인을 짓밟고 피도 눈물도 없이 약자들을 착취하는 약육강식 세계의 피라미드 상층부에 있는 이 시대의 엘리트들의 모습을 닮았다. 먹이 사슬 제일 꼭대기로 대변되는 VIP들은 그보다 더하다. 자신들은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에서 관전하며 서로 물고 뜯는 아래 계급 사람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 손에는 결코 피를 묻히지 않는다.


감독은 만약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모습을 한 엘리트들인 상위 계급의 사람들이 서바이벌 데스 게임이라는 그라운드에 놓였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그 이면의 무자비하고 이기적인 인간 심리를 파헤치며 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익숙함을 비튼 드라마의 서사구조, 오마주]

<스타워즈와 매트릭스>

이 드라마에는 또 다른 대결 구도가 나오는데 프론트맨과 그의 동생 경찰은 이 게임을 주최하는 자와 캐려는 자의 대치 형태를 보인다. 결국 벼랑 끝에서 가면 속 남자가 형임을 알게 되고 떨어져 죽는 설정은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가 아버지란 것을 알고 아래로 떨어지는 루크를 연상시킨다.


아직 나오지도 않은 시즌 2에 관해 개인적으로 유추하는 글을 곧 쓰겠지만 스타워즈의 오마주를 통해 잠시 보인 것처럼 감독이 앞으로 선보일 세계는 아버지 다스 베이더가 아들인 루크에게 한 대사인 '나와 함께 하자.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 상호 파괴적인 갈등에 종결을 고하고 은하계에 질서를 가져올 수 있다'는 회유를 바탕으로 한 형제간의 갈등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감독은 단순히 스타워즈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드라마에 두 개의 이야기를 담음으로써 무인도 안에서 게임이라는 단조롭고 한정된 공간을 좀 더 흥미롭게 만들었다.


시즌 1에서는 기훈이 플레이하는 게임 속 세계와 이들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경찰인 황준호의 관찰자적인 시선의 이중 플롯으로 전개되어 관객의 지루함을 덜고 다양한 관점으로 보게 되는 장점이 있었다.


아마도 시즌 2에서는 관찰자(준호)가 직접 게임 플레이어가 되어 뛰어들고 기훈이 또 다른 한 축의 이야기를 끌고 가게 되는 관찰자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만약 기훈이 다시 게임 플레이어가 되더라도 준호와 형이 메인이 되고 기훈은 그것을 관찰하며 결정적인 키를 쥐게 되는 역할 익스체인지의 변화가 있지 않을까 추측하게 된다. 형제의 갈등을 기훈이란 인물을 통해 이 대결 구도에 종지부를 찍는 역할을 담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프론트 맨이 우승을 하고도 이 세계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프리퀄과 동생의 부활(원래 모든 영화에서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난다는 클리셰가 있다. 더군다나 총알은 일부러 심장 위 어깨에 맞춰졌다.) 형제간의 대결, 기훈과의 대치가 주요한 내용이 될 것 같다.


또한 공유가 주인공에게 선택하라고 내미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딱지는 묘하게 매트릭스를 연상시킨다. 빨간 약은 매트릭스에서 진실을 알게 하는 약이다. 주인공 네오는 가짜로 만들어진 편하고 안락한 세상을 택하는 것이 아닌 고통스럽고 혼돈이 가득한 불편한 진실을 택한다.


기훈은 처음에 파란 딱지를 택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빨간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후에 비행기에서 돌아 나오는 장면은 456억 원 상금으로 누릴 수 있는 풍요로운 가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깨어나서 네오처럼 고통스러운 진실과 마주하며 그들과 싸우겠다는 암시가 아니었을까..


오징어 게임이 성공한 이유는 이렇듯 기존에 있는 익숙한 문법의 것을 차용하되 조금씩 비틀어서 예상을 빗나가게 하고 인물의 서사와 심리 묘사에 포커스를 맞춰서 공감과 보는 재미를 주는 것에 있다.


헝거게임, 배틀 로열이나 앨리스 인 보더랜드, 퍼지 등 서바이벌 데스 게임은 하나의 장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도식화되어 있기에 표절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장르는 한정된 장소에서 죽음에 맞닥뜨린 이들의 공포에 대한 스릴러와 인물들 간의 심리 게임, 봉착된 난관을 어떻게 타개하는지가 관건이다.


다른 데스 게임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에만 치중하여서 극 중 인물들의 동기라든지 그 안의 인물들 간의 관계와 게임이 만들어진 이유 등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데 비해 오징어 게임은 1편과 마지막 편을 다 할당하며 인물들 간의 내면의 심리묘사와 동기, 이유에 더 포커스를 둠으로써 차별화하였다.


[시대 공감과 한국인의 정서]


기존의 서바이벌 게임은 지나치게 천재적인 주인공의 능력이 발휘된다든지 개연성 없는 무자비한 폭력에서 초인적인 힘으로 살아남게 되든지 하는 형식을 취하는데 오징어 게임은 마치 이 사회 소시민의 요약본인 듯 무기력한 주인공보다 주변의 도움과 기지, 운에 의해 결정이 된다. 그러나 기훈의 따뜻한 연민과 마음이 없었더라면 그것도 힘들었을 일이다.


막판에는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그마저 무력이 아닌 기훈의 사랑이 상대를 포기시킨다.) 결승에서 승리하게 되기에 관객은 그를 응원하게 된다. 천재나 초인적인 힘을 가진 히어로보다 평범한 소시민인 기훈의 승리가 마치 자신의 것처럼 더 기쁜 것이다.


대중이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공감이 될수록 드라마는 몰입도가 높아진다.


그것을 위해 감독은 기존의 데스 게임의 틀을 유지하되 주인공의 서사에 많은 공을 들였다. 별 볼 일 없는 루저에 불과한 그가 쌍용 자동차를 연상시키는 드래곤 모터스의 해고 노동자이고 딸에게 애틋한 이혼남이자 병든 늙은 노모를 모시는 불효자라는 설정은 일반 소시민 누구라도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투영된 자아가 된다.


코로나로 인해 절망적이고 혼란스러운 요즘 시대 상황에서 느끼는 존재의 불안감이 반영되기 적합한 설정이지만 감독은 주인공을 마냥 어둡게 그리지 않고 지친 현실에 찌든 상황에서도 코믹하고 약간 모자라서 동정이 가는 연민 가득한 인물로 창조해내었다. 더군다나 약자에게 손을 내미는 따뜻한 마음도 위기의 상황에선 갈등하며 비겁해지는 연약함도 우리의 인간적인 모습을 꼭 빼닮았다.


<한국적 정서인 한과 정>


그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에는 한국 사람들만이 느끼는 정서인 '한'과 '정'이 흐르고 있다. 다른 서바이벌 데스 게임에서 보기 힘든 정서이다.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약한 자를 돕는다든지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나 복수심 등은 이런 장르에서 자주 보인다. 하지만 한국적인 정서인 '한'과 '정'은 그것과는 조금 차별화되는 다른 무엇이다.


기훈이란 인물 속에 그 두 개의 정서는 핵심이 된다.   정리 해고, 가족의 해체, 아픈 어머니의 병을 돈이 없어서 고치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태는 결국 어머니의 죽음으로써 '한'으로 남는다. 기훈의 기저에 흐르는 '정'은 오일남을 도움으로써 결국 그를 살아남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새벽이도 세상에 홀로 남겨진 지영이에게 손은 내미는 '정'을 보여주었기에 대신 죽음을 택하게 만든다.


한과 정은 양날의 검과 같다. 잘못 흘러가면 넘치는 과잉 정서나 신파로 흘러갈 수도 있는 그것들로 인해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외국 영화를 보다 보면 메마른 감정의 단절에 문득 놀랄 때가 있다. 친한 동료, 가족의 죽음이나 장례식에 그들은 약간의 눈물 외에는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다. 그저 영화에서 추구하는 목표만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요즘 들어 K 드라마나 영화가 흥행하는 이유는 메말라버린 현대인들 특히 서구권의 감성을 자극하는 우리만의 정서에 이입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떠남에 대한 슬픔과 한, 끈끈한 가족 공동체, (깐부처럼) 네 것 내 것 따지지 않는 이웃과의 정, 유대감 같은 것들 말이다. 개인 주위 서구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덕목이다.


[신파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이 신파라고 하는 것에 일정 부분 동의할 수도 그렇지 않다고도 생각한다. 그 감정선의 줄을 아슬아슬하게 타며 신파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점에서 이 드라마가 어필하는 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슬픔을 서서히 쌓아가되 억지로 감정을 쥐어짜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의 병폐는 신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아직 울 준비가 되지도 않은 사람을 벼랑 끝 극한의 감정으로 내몰며 이래도 안 울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극 중 조연인 부부가 짝이 되었을 때 제발 서로 대신 죽겠다고 울고불고하는 뻔한 모습이 보이지 않길 바랬다. 감독은 그 부분을 생략하고 남편의 자살하는 모습만을 보여줌으로써 그 전의 상황까지 관객 스스로 상상하며 비감해지게 만들었다.


기훈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어차피 뻔한 결말이라 '운수 좋은 날'이라는 현진건의 소설 제목으로 스스로 스포일 하였다. 한국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스포인 이것이 외국 사람들에게는 반어법의 은유로 느껴질 수도 있어서 더 새로웠을 것 같다.


[조명, 카메라 워킹, 음악]


어머니의 죽는 장면에서 조명을 어둡게 하여 기훈의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기훈이 울먹이며 엄마 곁에 누워 가슴에 손을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 지은 것도 신파를 차단하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어두운 방 안에서 누워있는 엄마를 향해 캄캄해서 보이지 않는 얼굴 표정의 기훈이 '엄마 나 왔어 눈 좀 떠봐 돈 벌어왔어' 하고 떨리는 목소리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장 이 드라마의 핵심이자 중요한 포인트인 기훈의 배신, 오일남의 양보와 죽음 장면은 기훈과 일남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교차 편집으로 서서히 감정을 쌓다가 마지막 구슬 하나를 쥐어주며 슬픔을 극대화시켰고 그것마저 나중에 엄청난 반전으로 허를 찔렀다.


마지막 일남의 죽음 씬에서 카메라가 그 둘을 바라보는 진행요원의 뒷모습 in out에서 시작해서 자기 이름을 알려주는 오일남을 뒤로 두고 눈물을 흘리며 걸어가는 기훈의 모습과 포커스 아웃된 오일남에게 진행요원이 in 되어 총을 겨누고, 기훈이 걷다가 자연스럽게 오일남을 담벼락으로 가렸을 때 울리는 총소리와 1번 탈락이라는 안내 음성, 기훈의 우는 얼굴 클로즈업을 원테이크로 한 카메라 워크는 정말 최고의 기믹이었다.


만약 이 부분에서 컷을 나누었다면 우리는 분명히 보여주지 않은 컷 너머의 속임수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은 영리하게도 처형 장면을 담벼락의 미장센으로 살짝 가리고 실사와 같이 롱테이크로 찍음으로써 관객들을 완벽히 속였다.  카메라가 기훈의 앞에서 이끌어가며 관객들을 뒷배경의 처형 장면보다 그의  클로즈업된 우는 얼굴에 더 집중하게 만든 것은 기막힌 감독의 트릭이다.


알리와 상우의 게임도 총살당하는 알리의 슬픈 얼굴에 상우의 비정한 표정 위로 총소리를 오버랩시키며 허무한 죽음에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다른 나라에서 6화를 최고의 드라마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슬픈 장면에서 음악이 오버되지 않고 단조로운 피아노 선율로만 나오는 것도 신의 한 수였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수정이 새벽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기까지 둘의 이야기나 정서 교류가 빌드 업 되지 않고 마지막 지영과의 대화에만 의존한 점이다. 물론 지영의 히스토리는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납득이 가는 면은 있었지만 조금 갑작스러웠다. 어쩌면 예상치 못한 의외의 사건 전개 반전을 노리는 감독의 치밀한 계획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


황준호가 형을 찾으러 고시원으로 찾아가는 장면에서 소품처럼 등장하는 책이 한 권 있다.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


나는 이것이 '오징어 게임'을 관통하는 알레고리라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인간의 '믿음'과 '욕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일남은 이 게임을 시작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제 더 이상 어린 시절 아이들과 함께 놀았던 '재미'가 없어졌다고 그 재미를 위해서 참가했다고 말했다.


기훈을 살려 준 이유도 그가 일남을 '재미있게 해 줘서'라고 답한다. '재미'라고 표현했지만 그 재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행복이었을 것이다.


하바드에서 몇십 년에 걸쳐 사람들을 일생 동안 추적조사를 했는데 행복의 조건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관계에서 오는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 사람 사이의 믿음과 신뢰와 사랑으로 인한 행복..


일남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어쩌면 평생 재미로 포장된 그 행복을 찾아서 살아왔을 것이다. 현재에 만족하여 더 이상의 욕망의 갈증에 시달리지 않는 상태.. 돈이 많으면 '재미'가 있을 줄 알았지만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아마 일생동안 일남은 그가 소유한 돈 때문이 아닌 연약한 노인인 그 자신에게 따뜻하게 손 내밀어줄 한 사람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훈도 사실은 완전하지 못했다. 평생 인간을 믿지 못하는 오일남을 기훈도 끝내는 배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기훈과 내기를 하며 그 비정한 현실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나도 가지지 못한 자와 다 가진 자의 공통점은 재미가 없는 것이다.' 고 말하는 일남은 무일푼이었을 때도 그 '재미'라는 욕망을 쫓아 거부가 되었지만 거부가 된 후에도 마지막 눈 감는 순간까지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었다.


라캉은 인간이 태어나서 동물과는 달리 언어 사용으로 인한 사회와 문화의 세계에 접어들게 되면서 한 개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 안에서 발생되는 여러 가지 규범과 규제와 금지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한 개인의 본능적인 '욕구(Needs)'는 사회적 '요구(Demand)' 사이에서 간격이 생기는데 이 간격을 라캉은 '욕망(Desire)'이라 불렀다.


라캉의 욕망 이론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재해석하여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세 가지 단계로 구조화하여 주체성의 형성과정을 설명한다. 세 단계는 삶의 근본적인 영역이면서 동시에 욕망이 발생하는 조건이 된다.


여기서 파생되는 억압으로 인한 욕망은 영원히 매울 수 없는 결핍이며 이 결핍이 무의식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욕망을 무의적으로 실행하는 존재가 주체이다.


나는 이 욕망 이론을 바탕으로 '오징어 게임' 주인공인 성기훈이라는 주체가 대상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라캉의 이론처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나누어 생각해보았다.

먼저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는 어린아이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볼 때 완전하고 흠 없는 것으로 믿으며 이상적 자아, 어머니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리라 믿고 어머니와의 상상적 동일시 관계에 있는 시기이다.


기훈은 사회에서 어머니란 존재 안에서 기생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의식주를 책임져주는 어머니는 그의 세계에서 이상적 자아와 같았다.


어머니가 병으로 인해 그이 인생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게임 속으로 들어가서 언어와 규칙과 규범이 있는 '상징계'를 마주한다.


상징계는 아버지라는 타자가 개입함으로써 언어를 사용하는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탈구조적인 불안이 시작된다. 처음에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모든 것이 되고 싶어 한다. 그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 즉, 어머니에게 결여된 것을 보충해 줄 수 있는 남근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이의 이런 관계 속에 아버지가 개입하는 것이다.


거울 단계를 지난 주체가 상징계 곧 아버지의 질서인 언어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처럼 기훈은 게임 속 질서로 편입된다. 상상계적 믿음이 착각임이 드러나며 아이는 현실을 충분하게 상상적으로 소유하던 세계에서 언어라는 공허한 세계로(게임의 룰과 규범) 추방당한 것이다.


자신이 원하던 남근을(게임 성공의 대가인 상금 456억 원으로 대표되는 돈과 권력) 아버지가(게임의 주최자) 가지고 있으며 아버지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관계 속에서 남근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이가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제 남근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아이의 욕망 즉, 어머니와 결합하고 싶은 욕망은 거세되고 억압되어 무의식 속의 기표가 된다.


기훈은 아버지의 법 언어로 대표되는 사회의 질서나 규칙 타자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고 여기에 자신을 일치시키게 된다. 욕망은 순수하게 나의 마음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다. 욕망은 타자의 언어이다. 라캉의 말대로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처럼..


기훈은(주체) 프로이트적 해석으로 자아의 남근과 동일시된 어머니가 거세됨으로써(죽음) 그 욕망의 목적을 잃었다.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되고 그 결핍을 메우려 노력하지만 언어 자체가 결핍에 의거해 작동하기 때문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욕망이다.


라캉에 의하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서는 순간 주체 '나'는 거세되므로 대상이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하고 차액을 남김으로 욕망의 회로를 맴돌게 되는 주체는 반복과 주체 분열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인간의 욕망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엄마를 잃은 기훈은 그래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실재계는 상징계에 저항하는 어떤 것이다. 욕망의 반복은 욕망의 불가능성과 연관이 있으며 이 불가능한 것이 실재계의 속성이다. 실재계는 잃어버린 대상이기도 하다. 언어의 세계로 들어오는 순간 기호적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주체는 실재계를 잃어버린 대상으로 느끼게 되며 욕망이 발생하는 것이다. 상징계에 포착되지 못하는 그 공백으로 판타지를 만들 수 있다.


기훈은 이제 실재계인 그 판타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 빨간 머리를 하고 네오가 되어 불의한 세계 게임 속의 '말'이 아닌 진실에 눈을 뜬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맞서기 위해 비행기를 타지 않고 돌아오는 것이다.


감독은 기훈이란 주인공이 라캉의 욕망 이론에 따라 이 비정한 사회에서 좌절하고 성장하고 도전하는 과정을 서바이벌 데스 게임이란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 끝이 성공일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가장 밑바닥이고 보잘것없는 그의 성공을 기도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가 바로, 결코 가질 수 없는 욕망에 휘둘리지만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진실을 추구하며 자아를 찾고자 하는 우리 자신들의 우울한 자화상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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