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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Jan 27. 2024

분재 심는 이실장님

스누트 3-4월 · 4회 │ 가장 강렬했던 그 사람의 첫인상

  11월. 점심시간 직후의 삼성동 사옥 8층. 구글 캘린더발 알람에 회사 로고가 박힌 수첩을 집어 커버 안쪽 포켓을 펼친다. 오케이, 명함 있고! 모니터 앞 이천 원짜리 다이소 손거울을 젖혀 내 얼굴을 스캔한다. 눈 밑에 번진 마스카라는 새끼손가락 끝으로 휙 훔치고 양치로 날아간 입술 생기는 립스틱으로 쓱 되살린다. 윗입술 아랫입술 빰! 빰! 씨익. 앞니에 묻은 립스틱까지 닦아내면 준비 완료!


  “2층 미팅룸 다녀오겠습니다.”


  2분 남짓, 하강하는 엘리베이터에서 (회)사회화된 십이 년 차 윤책임을 소환한다. 메일함을 열어 곧 만날 가드닝업체 실장님 성함을 묵음으로 발음해본다. 그녀가 첨부한 파일과 내가 보내 둔 질문도 다시 훑는다. 벌써 4층. 오른손 검지로 턱을 톡톡 친다. 목구멍 아래 맴도는 다짐의 메트로놈 마냥. 


  ‘수더분하게 웃자, 상대 말이 끝나고 말하자, 애매하게 말하지 말자.’ 


  로레알 더블 익스텐션 마스카라로 두배 짙은 속눈썹, 몽돌 같은 서울 말투로도 못 숨기는 채석장 절단면식 대구 어법 때문인지 내 첫인상이 세다고들 한다. 그래서 첫 태도를 신경 쓴다. 사실 비효율을 못 견디는 ENTP 인간이라 그것도 쉽진 않지만 회사원 인생 십이 년, 나이스하게 훈련된 자아 하나쯤은 어떤 자리에서든 명함처럼 꺼낼 수 있다. 


  미팅룸 앞 벤치에 라벤더색 니트를 입은 사십 대 초중반 여성이 앉아있다. 그녀의 발 옆엔 레옹 것 만한 화분 서 너개. (회)사회화의 필수 덕목인 눈치로 그녀임을 알아챈다. 


  “안녕하세요, 이주현 실장님?” 

  그녀가 일어난다. 

  “네! 윤아름 책임님이세요?” 

  처음 오르간을 연주하는 교생선생님처럼 조심스레 어절을 꾹꾹 눌러 답한다. 물음표에 따라 동그래졌던 눈이 이내 보리싸리 이파리처럼 곱게 휘어진다. 


  나는 백화점 VIP마케팅 담당자로서, 이주현 실장님은 백화점 VIP 천 명에게 세 달간 식물을 정기 배송해 줄 새로운 협력사 대표로서 16호 미팅룸에 마주 앉는다. 반쯤 올린 블라이드 사이로 오후의 빛 조각이 내린다. 해당 서비스 담당 3년 차이자 집에서 화분 열두 개를 기르는 식집사인 내게도 그녀의 모던분재 제안서는 흥미로웠다. 그녀는 여인의 두 손을 오목하게 모은 듯한 도예 화기에 자연을 축소한 분재 샘플을 하나씩 꺼내 말간 눈동자와 나긋한 손길로 샅샅이 설명한다. 나는 호탕한 리액션과 적극적인 질문으로 그녀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확신을 준다. 


  “근데 책임님, 먼저 양해를 구할 게, 화기마다 사이즈 편차가 있을 수 있어요.”

  “굽다 보면 쪼그라들어서요?” 

  원데이 도예 클래스로 주워들은 말을 얼른 던져 그녀를 안심시킨다.

  “네, 고온의 가마작업에서 어느정도 수축은 불가피하대요.”

  “에이~ 어차피 일 센티미터 정도 왔다 갔다죠? 괜찮아요.”


  사무실로 돌아오니 새삼 널브러진 서류가 보인다. 아, 내가 이렇게 말했네. 편한 인상 주려다 되려 정돈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동시에 첫 만남부터 그녀를 신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명료한 주술관계와 단정한 맺음, 적재적소에 쓰인 허세도 보푸라기도 없는 압축된 한자어. 빽빽한 서고에서 책 한 권 딱 뽑아 그 단어가 있는 페이지를 정갈하게 펼쳐낸 듯한 그녀의 화법은 그녀가 심는 모던 분재를 닮은 것도 같다. 


  일을 하며 그녀를 더 좋아하게 됐다. 의식적으로 그 화법을 따라하기도 했다. 장마 전선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6월, 그녀와의 프로젝트가 끝났다. 무반응이 칭찬이라는 VIP서비스 특성에도 불구하고 고객들의 만족적 피드백도 꽤 들려왔다. 우리끼리 회식이라도 하자며 약속을 잡은 날, 그녀가 코랄색 작약 한 다발을 안고 들어왔다.


  “책임님 덕분에 재밌게 했어요. 어제 꽃시장 갔더니 작약 시즌이더라구요. 우리 처음 만날 날 책임님이 떠올라서 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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